더 무서운 것은? 아우슈비츠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본인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의 여러 군상들을 그렸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군상으로 수용소 감시병에 대한 예를 들면서 상당수 많은 새디스트(sadist) 즉 가학성 변태성욕자들을 소개한다. 이들 중에는 정신의학적으로 볼 때 전형적인 새디스트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부류의 새디스트로 수용소 안에서 자생된 새디스티들이 존재했다고 술회한다. 후자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다수의 감시병들은 감정이 메말라 있는 상태였다. 몇 년 동안 수용소에서 점점 심해지는 야만적 행위들을 보면서 지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시형역, 청아출판사, 2012년,p,150.) 엔도 슈사쿠의 초기 작품인 ‘바다와 독약’을 보면 불과 약 2시간 전에 살아 있었던 미군을 의도적인 생체 실험을 해서 죽인 뒤, 그의 간을 꺼내들고 이동하던 군의관 토다가 독백한 글이 나온다.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왕 소름이 돋았던 경험이 있다. “검붉은 피로 탁해진 액체에 담긴 이 암갈색 덩어리,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게 아니라, 자신이 죽인 인간의 신체 일부를 보고도 거의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괴로움도 없는 이 섬뜩한 마음이다.” (중략)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가책이었다. 가슴의 격렬한 통증이었다. 가슴을 찢는 듯한 후회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다.”(엔도 슈사쿠,“바다와 독약”,박유미역, 창비, 2014년,pp,170-171.) 우한 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공포가 지구촌을 뒤덮고 있다. 누구도 이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 또한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뉴스에 도배된 이 공포 스토리는 앞으로 더 가중 될 것 같아 불안감이 엄습한다.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별로 답이 없어 보인다. 아마도 각자 도생의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가를 뒤돌아본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신종 바이러스가 스쳐지나가지 않는다. 우리도 똑같이 바이러스성 전염병에 노출된 연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역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로서 한 가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에 대한 집중이다. 질병에 걸린 이웃에 대하여 냉소하지 말자. 그들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높고 높은 담을 세우지 말자. 그들을 도외시하는 이기적인 그 어떤 방관에도 동의하지 말자. 할 수 있으면 아픔을 당하고 있는 저들을 향해 공감의 손을 내밀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저들에 대한 냉소요, 방관이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픔에 대한 공감의 태도다. 예언자 오바댜를 통해 야웨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선언을 레마로 받고 귀를 기울이자.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옵 1:11) 방관과 냉소는 더 무서운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해야 할 영적 바이러스다. 냉소자이자 방관자였던 에돔을 향하여 예언자 오바댜에게 주군은 끝까지 이렇게 말씀할 것을 ‘나비’하셨다.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옵 1:15) 1986년 노벨평화상 수장자인 엘리 위젤의 말이 그리스도인이 나에게 크게 들린다. “내가 고통을 당했다고 해서 타인에게 고통을 줄 권리는 나에게도 없다.” (엘리위젤,“이방인은 없다.”,정혜정역, 산해, 2003년,p,1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