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어머니의 자궁이다. 목사에게 주일은 한 날이 아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말(공간 속에 있는 사물을 탐내지 말고 시간 속에 있는 것을 탐내야 한다. 한 주간 내내 일곱째 날을 탐내라)대로라면 탐내야 하는 날이다. 물론 유대이즘에 입각한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의 개념에 비해 개신교도들에게 있어서 주일의 개념이 어떨까를 질문하려니 무섭고 두려워진다. 분명히 일곱째 날을 탐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 볼 때 대단히 부끄러울 것이라는 예단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에게 있어서 주일이 여느 날과 다른 이유는 분명히 탐내야 하는 날이기에 주일은 항상 긴장의 날임 동시에 준비해야 날이다. 어제 민족의 명절인 설을 보냈다. 목회를 하는 목사에게 있어서 명절이 토요일이면 항상 주일을 준비해야하기에 명절의 분위기보다는 더 바쁜 날이다. 고향에 갈 생각은 언감생심 감히 엄두를 내지도 못한다. 상황이 그러니 당연한 일이라고 치부해도 한 가지 어쩔 수 없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고향이 그립고 또 그립다는 애잔함이다. 친가의 부모님들이 두 분 다 별세하시고 처가에 장모님까지 소천하신 이후, 말 그대로 아내와 나는 고아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고향에는 누님, 형님들, 그리고 조카들과 같은 피붙이들이 있기에 고향으로 마음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의 마음이지 않나 싶다. 언젠가부터 어려서 형님들과 망둑어(망둥어) 낚시를 했던 소래 포구도 가보고 싶고, 어렸을 때 뛰놀던 자유공원도 올라가 보고 싶고, 마음껏 기도하며 꿈을 꾸었던 송림동 달동네에 있는 출신교회에 가서 예배도 드려보고 싶고, 고등학교 시적 짝사랑했던 후배가 다녔던 인성여고 근처에서의 두근거림도 느껴보고 싶고, 초등학교 시절 언제나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했던 강재구 선배가 우뚝 서 있는 창영초등학교도 가보고 싶고,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며 부대꼈던 옛 친구들도 보고 싶어 졌다. 새해에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었다. 신학교 동기 중에 절친과 전화를 하다가 그가 이렇게 말했다. “이 목사, 59라는 나이와 60이라는 나이가 너무 다르다. 왠지 마음이 이상하고 우울해!” 그 마음이 어찌 친구만의 이야기이랴 싶다. 그래서 그런지 60대에 들어선 금년, 고향 생각이 더 진하게 다가오는 것은 늙어감에 따른 향수가 더 애틋하기 때문인 듯싶다. 주일을 지키느라 가보지 못한 고향을 이번 주에는 가보련다. 가서 앞에서 말한 추억 더듬기는 다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고향 하늘이라도 보고 오련다. 누님을 한 번 안아주고 싶다. 형님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오련다. 직장 생활을 하는 탓에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조카들을 마음속으로도 응원해 주고 오련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아주 오래 전 이동원, 박인수의 콜라보로 만들어낸 걸작 ‘향수’를 기계음(CD)이라 조금 아쉬움은 있지만 듣고 있다. 서재에 시가 울려 퍼진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음. 고향은 어머니의 자궁 같다. 그래서 그런지 고향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파묻히고 싶은 본능적인 그리움의 블랙홀인가 보다. 고향이 참 그립고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