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프닝 지난 주간, 페이스북에 친구 한 명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수면제 100알 먹고 자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우리 교회에서 매년 섬기고 있는 장애인 선교단에 속해 있는 형제였습니다. 이 형제는 심하지는 않지만 정신지체 장애를 약간 갖고 있기에 진정성에 갸우뚱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교단을 이끌고 있는 목사님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이윽고 잠시 후, 밀알 선교단 목사님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명지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이네요. 장난으로 과장해서 글을 썼다고 합니다. 관심 감사합니다.” 참 다행이라는 답신을 보내고 나서 문 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목회 여정 중에 수 백 번의 장례를 인도했던 추억들이. 제천에 와서는 거의 매 주,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에 걸쳐 장례를 인도하는 어처구니없음도 생각났습니다. 오죽하면 섬기는 교회 지체들이 이런 농을 제게 던진 적도 있습니다. “목사님, 원로 목사님이 재직하실 때, 오늘 내일 하던 교우들이 무던히 참아내더니 목사님이 부임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하나님이 부르시네요.” 하기야 직전 교회에서 시무할 때, 아내가 저에게 붙여준 별명이 ‘장례 전문 목사’였으니 두 말해 무엇 하나 싶을 정도로 정말로 장례 인도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목사가 장례를 인도할 때, 너무 귀한 장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장수하다가 호상으로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입니다. 감사함으로 기쁘게 장례를 인도합니다. 반면,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례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너무 사랑한 젊은 지체가 암이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인도하고 싶지 않은 장례이지만 그래도 이 장례는 하나님께 용기를 구하고 인내로 감당하여 왔습니다. 허나 목사가 된 죄 때문에 도무지 내키지 않지만 죽지 못해 인도하는 장례가 있습니다. 자살자 장례입니다. 지난 31년 동안 직접적인 관계로 이렇게 인도한 장례를 손꼽아 보니 세 번이었습니다. 애인이 변심했다는 이유로 자살한 교회 청년, 부부간의 불화로 자살한 남편, 심각한 우울증의 끝으로 자살한 자매까지 정말이지 목사 사표를 쓰고 싶을 정도로 인도하기 고통스럽고 거북했던 장례식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지옥 그 자체를 경험한 것 같은 장례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육체는 최고의 선물이자 걸작입니다. 그런데도 근래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개인적인 희망의 단절로 인해, 공동체적인 폭력에 시달리다가, 마음의 암 덩어리인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여, 사회적인 죄의 결과인 가난의 억압 등등 자살의 요인도 날이 갈수록 증가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목사로서 느끼는 자괴감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에 전혀 예외가 아니라는 통계를 접할 때입니다. 사는 것이 고통이고, 무의미이고, 지옥이고, 무통 감각의 고난이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 태어난 이상,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 주신 주님의 것입니다. 예언자 제 2 이사야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한 장애우가 올린 문장을 보고 급하게 그 내용을 알아보려 했던 이유도 모든 생명의 고귀함은 그 생명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직업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이 살기 좋은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누구도 자기 몸에 학대를 가하지 않는 좋은 세상. 마음은 이런 대 슬프게도 제게 보이는 세상은 광화문과 서초동의 광기만이 보입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