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4일 사순절 네 번째 주일 설교 제목: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본문: 요한복음 3:22-30 서론) 지난 주간 새벽예배 나눔 묵상 집에 실려 있는 글이 너무 은혜로워 주일 예배에 교우들과 다시 한 번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베들레헴에 천 번을 나신 들/그대 안에 나시지 않으면/그대 영혼 의지할 데 없으리/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 아무리 바라 본 들/그대 마음속에 세워지지 않으면 그 십자가 헛되고 헛되리” (앙겔루스 실레시우스) 17세기 독일의 시인이었던 앙겔루스 실레시우스의 이 시어를 읽다가 많은 생각이 오갔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있었는데 이게 바로 생각하는 신앙의 삶이라는 감동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소개한 기막힌 교훈입니다. 로마서 8:18절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의 이 선언에 담긴 감동이 두 가지입니다. 심판의 날을 믿는 자만이 현재의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교훈의 감동과 또 하나, 이런 신앙의 노정을 걷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일 때만 가능하다는 감동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벼운 자가 누구입니까? 생각하지 않는 자입니다. 어떤 일을 마주쳤을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자는 가벼운 행동을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자는 느려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삶’을 저는 오늘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로 바꾸어 은혜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단히 강력한 긴장감이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본문 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무슨 배경을 전제합니까? 복음서의 보고(마가복음 6:17-29)에 의하면 헤롯이 사망한 뒤에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분할 받아 통치한 헤롯 안티파스가 그의 이복 형제였던 헤롯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재혼을 했음을 알립니다. 헌데 이 결혼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유대 율법적인 정황으로 볼 때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세례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에게 권위를 갖고 비판했음도 보고합니다. 이에 원한을 품은 헤로디아가 자기의 남편을 부추겨 세례요한을 체포하게 하고 사해에서 동쪽으로 8KM 떨어진 베레아 지역의 막케루스의 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결국 남편의 생일에 세례 요한을 살해하는 악행을 저질렀는데 바로 이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24절에 기록된 요한이 옥에 갇혀 있던 때는 바로 막케루스의 옥에 구금되어 있던 때를 의미할 것입니다. 재론하지만 본문 24절이 무엇을 방증합니까? 아직은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기 전이었기에 왕성히 활동하던 시기였음을 알려줍니다. 이 시대적 배경을 전제하여 본문 접근을 해야 사순절 네 번째 주일에 주시는 중요한 영적 교훈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접근해 보십시다. 본문 22-23절을 소개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두 사람이 세례를 베풀고 있다는 요한의 보고는 묘한 긴장감을 줍니다. 애논이라는 장소가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셨던 유대 땅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본문 26절 때문입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세례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세례를 받는 자들의 동선이 예수께 이동한다는 것을 듣고 볼 수 있었던 지근거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긴장감 100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또 한 가지의 정황을 소개합니다. 먼저 세례요한의 이력을 보십시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것처럼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난 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출신 성분이 어떠했습니까? 요즈음 잘 쓰는 단어로 빌려 쓴다면 소위 진골, 성골 출신입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 계보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는 제사장 사가랴입니다. 나사렛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목수를 아버지로 둔 예수님의 배경과는 비교가 안 되는 출신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론의 제 8대 손인 아비야(역대상 24:10)의 후손이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비교 불가입니다. 더불어 세례요한은 영성에 대해서도 거의 무명에 가까운 예수님과 비교하는 것은 세례요한의 그룹에 있는 자들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지냈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주식 삼아 살던 영성 훈련에는 도가 튼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특별히 무슨 교육을 받았다는 근거가 전혀 나오지 않는 전직 목수 예수의 영성과는 견줄 수 없는 네임-밸류가 있었던 자가 세례요한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만 더 추적해 보십시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활동하실 때, 이미 세례요한의 영적 지명도는 전 유대를 들썩이게 할 정도의 인기도가 있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3:2) 그의 외침은 영적인 카리스마가 있었고 그의 선포는 영적인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서 불을 뿜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랴 하더냐? 회개하라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영적인 교만을 가지고 있는 너희들아 우쭐대지 말아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것이라“ (마태복음 3:7-9) 말 그대로 세례 요한은 불의 사자였습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구약성서가 예언한 메시아로 확신하고 있을 정도로 당시 요한은 대중적인 인기도에 있어서 무명이었던 예수님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의 고지를 선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정황들을 전제할 때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전했던 본문 26절의 긴장성은 세례요한에게 적지 않은 심리적 압박의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2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볼까요.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위기의식 백배입니다. 이미 차지하고 있었던 세속적 기득권의 요동침을 느끼던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에게 작금의 이 상태를 평정할 뭔가 한 방을 보여 달라는 압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알아차린 세례요한은 그렇다면 뭔가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게 리더십이고, 리더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주목해 보십시다. 본문 27-30절을 읽습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렇습니다. 찬물 끼얹기였습니다. 두 문장이 이를 증명합니다. 나는 그리스가 아니다. 폭탄선언 하나를 더 보겠습니다. 지금 질문하고 있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너희들이 증언해야 한다. 주군은 내가 아니라 바로 요단 강 저편에서 세례를 주고 있는 분이라는 충격적 선언을 한 셈입니다. 나는 단지 요단 강 저편에서 세례를 주고 있는 분의 길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보내진 사람이라는 자기 부인의 메시지가 28절 본문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29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신부를 얻는 이는 당연히 신랑이다. 그리고 들러리가 되어서 신랑 곁에서 그가 하는 말을 모두 듣는 신랑의 친구는 참으로 행복하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제 결혼식이 끝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이 시작될 것을 아는 신랑의 친구가 어떻게 질투할 수 있겠느냐?” (메시지 요한복음 3:29) 듣고 나니 어떠십니까? 정말로 어마어마한 선언이 아닙니까?“이 선언 뒤에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가장 감동적인 고백을 세례 요한이 토해 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 구절을 NEW LIVING TRANSLATION 영어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He must become greater and greater, I must become less and less.”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는 반드시 더욱 더 커져야 하며, 나는 반드시 더욱 더 작아져야 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조동사 ‘must’ 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끝나 가는 역할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자신은 이사야의 예언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을 알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는 주의 길을 평탄케 예비하는 자의 사역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과 더불어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명예로운 퇴장의 시기를 요한은 명백히 알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 조동사 must 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반드시’ 라는 역설을 강조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선언하며 자기를 철저히 알았던 자, 세례 요한, 자기의 인지도를 빌미 삼아 주님의 자리를 넘보지 않으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세례 요한, 나는 주님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모자란 자라고 자기를 철저히 낮춘 세례 요한을 향하여 주님이 훗날 뭐라 평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1:11절 전반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최고의 극찬입니다. 저는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보내면서 이상의 본문 해석을 중심으로 깊이 성찰하고 싶은 영적 레마를 교우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뜻에 목적을 둡니다. 세례요한은 철저한 자기 성찰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자기의 대중적 인지도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의 강력한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작금의 상태에서 눈 한 번 감으면 세상의 보이는 일체의 영광들이 합법적인 모습으로 본인에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종교적 지성의 사람이었는데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집단적 요구에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살인적인 유혹에 그는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그는 자기의 신분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성찰이라는 철저하게 생각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자는 결국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천착합니다. 결코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결코 쉽게 넘기지 말아야 하는 주님의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백부장 하인의 질병을 고치셨는가 하면, 베드로 장모의 열병도 고치셨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귀신들린 자도 축귀하셨고, 각종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던 한 제자가 주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선언합니다. 단 전제가 있습니다. 아버지를 장사한 뒤에 따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신 주께서 그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말씀으로 반응하십니다. 마태복음 8: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생각하는 자가 아닙니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뜻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 교양과목인 자연과학개론의 첫 수업에 출석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출석을 부른 다음 교수는 나는 자네들의 출석을 불렀네. 이제 수업에 나오지 않아도 되네. 1년 동안 집에서 틀어 박혀서 생각하고 오도록” (강상중, “고민하는 힘”, 사계절, 89.) 이 글의 저자인 강상중 교수는 재일 한국인입니다. 강 교수는 초기에 나가노 데츠오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공부도 하고 활동을 했지만, 1972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래, 그의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강상중이라는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이런 선택이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얼마나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 결정인지 주지하는 바입니다. 그럼에도 강 교수는 그때부터 한국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성찰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그의 인생은 재일 한국인들이 겪어야 하는 차별에 대하여 대일본을 향한 비판적 성찰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후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에게 언제나 공격 대상이 되어 녹록하지 않은 험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 국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로 도쿄대학 최초의 정교수가 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그의 인생을 그리게 된 결정적인 일이 바로 자연과학개론 수강 때에 받은 첫 번째 지성적 충격 때문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1년 동안 집에서 틀어 박혀서 생각하고 오도록” 아이러니합니다. 일본인 선생님이 말한 생각하는 자가 되라는 엽기적인 도발을 기점으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발견하고 강상중의 인생이 바뀌었다는 점이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의 임무와 사명을 단 한시도 잊지 않는 신약에 등장한 첫 예언자이자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극단적 근본주의에 빠져 목사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모 목사가 스스로 말한 나는 대한민국의 예언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참담했습니다. 예언자는 자기 소리를 내는 자가 아닙니다. 예언자는 세례요한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는 자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했기에 이렇게 놀라운 신앙의 고백을 거침없이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반드시 더욱 더 커져야 하며, 나는 반드시 더욱 더 작아져야 한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마크 베일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크 베일리, “제자도의 7가지 핵심”, 디모데, 100-101) 그리스는 말했다. 지혜를 가지라. 네 자신을 알라 로마는 말했다. 강하여라. 네 자신을 훈련하라. 유대교는 말했다. 거룩하라. 네 자신을 순복하라. 쾌락주의는 말했다. 관능적이 되라. 네 자신을 즐겨라. 교육은 말한다. 풍부한 자원을 가져라. 네 자신을 확장하라 심리학은 말한다. 자신감을 가져라. 네 자신을 충족하라. 물질주의는 말한다. 탐욕적이 되라. 네 자신을 기쁘게 하라. 교만은 말한다. 우월하라. 네 자신을 선전하라. 금욕주의는 말한다. 열등하라. 네 자신을 억제하라. 중도주의는 말한다. 온당하라. 네 자신을 조절하라. 공산주의는 말한다. 공동으로 하라. 네 자신을 확고히 하라. 인본주의는 말한다. 유능하라. 네 자신을 신뢰하라. 박애주의는 말한다. 이타적이 되라. 네 자신을 주라.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네 자신을 부인하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은 나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의 세례 요한처럼. 한 주간, 나를 드러내는 주간이 아니라, 나는 부인하고 주님을 드러내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주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세상의 것 의지할 수 없으니 감사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기쁨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