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광야에 있습니까?2024-03-07 14:01
작성자 Level 10

2021년 3월 7일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설교

 

제목광야에 있습니까?

본문마가복음 1:35-39

 

서론)

 

캐나다의 정신박약자 수용시설인 라르쉬’ 공동체소속의 데이브레이크로 들어가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살았던 예수회의 사제 헨리 나우웬이라는 영성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초기에 미국의 명문인 예일 대학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교수였습니다.

해서 그의 미래와 삶은 보장 받는 탄탄대로의 길이었습니다.

문제는 나우웬 스스로가 예일대학 교수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적인 풍요가 쌓이면 쌓일수록세속적 인기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는 외로워짐을 느꼈습니다.

나우웬은 이런 영적인 공허함을 극복하고자 교수직을 던지고 당시 제 3지대였으며 위험천만의 슬럼가였던 페루의 빈민가로 들어가 빈민들과 함께 하는 현장 사목을 감당합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냈을 때그의 지적 능력을 아까워하던 지인들이 하버드로 돌아와 교수직을 맡아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여 1981년 다시 잠시 교수직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역시 교수직은 더욱 자신을 영적으로 황폐하게 하고외롭게 한다는 것을 알고 다시 사직한 뒤, 1996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캐나다의 데이브레이크에서 약한 자와 함께 하는 철저한 낮아짐의 신앙적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삶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낸 나우웬은 오늘 사순절 셋째 주간으로 나아가는 세인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영적 화두를 던져줍니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가고 그것을 잊거나 부인하려고 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 외로움을 지켜서 그것을 생산성이 있는 고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영적인 삶을 살려면먼저 외로움의 광야로 들어가서 조용하고 끈기 있는 노력을 통해 광야를 고독의 동산으로 바꾸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헨리 나우웬, “영적 발돋음”, 두란노, 34-35)

저는 나우웬의 이 글을 2,000년이 되기도 전에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기억하는 이유는 인상 깊게 새겼기 때문입니다.

그가 던졌던 한 문장 때문입니다.

외로움의 광야로 들어가라

왜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까?

외로움의 광야에 진입하지 못하면 고독의 동산이라는 궁극적 영혼의 성숙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움이라는 광야를 거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광야에서 경험한 외로움을 잘 이겨내면 반드시 생산성이 있는 고독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이 고독을 누리고 있는 자만이 진정한 영혼의 안식을 얻게 된다고 나우웬은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은 사순절 세 번째 주간입니다.

동시에 오늘은 세 번째 주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의 테마를 광야로 정했습니다.

 

본론)

 

예수님께서 병들어 있는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괴롭히고 있는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이라는 유대 종교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는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도전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에 회당에서 상투적으로 율법을 강론하던 서기관들을 비롯한 율법 교사들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갖고 회당 사역을 마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와 베드로의 집으로 심방을 가셨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집에 도착을 해서 보니 마침 그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있었던 베드로의 장모를 위하여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녀를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중보를 들으신 예수님은 열병으로 죽게 된 베드로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그녀를 고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수많은 가버나움 인근 각처에 있었던 각종 병자들이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의 질병을 고치시고 치료하셨고 많은 귀신들린 자들을 축귀하셨습니다.

본문 35절을 봅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이 구절은 목회자들이 흔히 새벽예배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는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문자적으로 단순히 이해를 하면 예수님께서 새벽 기도를 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배경을 조금 더 깊게 연구하면 그것보다도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러자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가버나움 지경의 각종 병든 자들이 한꺼번에 예수님께서 머무시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추측건대 주님께서는 상당수의 많은 환우들을 사랑으로 치료하셨습니다.본문 직전 구절인 마가복음 1:34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생각하면 이런 상상이 떠오릅니다.

갈릴리라는 낙후된 곳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의 예언의 소리를 끊어져 영적인 사망 상태에 있었던 가버나움이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수많은 병자들을 현장에서 고치시고 선포하셨던 예수님의 대중적인 인기가 얼마나 높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을까?

아마도 이론적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인기몰이에 성공을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예수님은 충분히 어떠한 정치적인 역량을 결집하여 자기의 세력을 모으고 정치적인 기득권의 수장으로 군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충분히 이런 분위기가 감지되는 대목이 나옵니다.

36절을 주목하십시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시몬 베드로와 함께 있었던 자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당연히 다른 제자들과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이적을 눈으로 직접 목도한 가버나움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36절에서 사용한 동사를 통하여 아주 주목할 만한 단서를 우리 독자들에게 제공합니다.

'뒤를 따라가다'라는 동사입니다.

원어성경을 보면 이 단어를 '카타디오코‘ 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우리나라 성경에 번역되어 있는 대로 '뒤를 따라가는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적어도 '카타디오코는 '사냥을 한다.'(hunt) 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수색하다.' (search for) 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서 주는 마가 기자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35절과 36절이 이어져 있기에 독자들은 이 두 구절을 하나의 동선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36절을 원어 성경에 가깝게 번역한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단순한 찾음이 아니라 사냥하듯이 찾았다는 말입니다.

샅샅이 뒤지면서 찾았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은 예수께서 어디를 가셨는지 알지 못했던 후발대였음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들이 갖고 있는 목적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갖고 있던 것은 어떤 목적이었겠습니까?

지금 대중적인 인기가 하늘을 치솟고 있는 주님께서 빨리 오셔서 대중들 앞에서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서 분명한 이익을 추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목적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 때문에 본인들도 세속적인 만족을 얻는 그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이 아마도 간절했기에 예수님을 그렇게 샅샅이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만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주님은 그러한 세속적인 욕심을 갖고 있는 그들에게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38-39절입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님의 반응은 제자들의 욕구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자고 하십니다.

다른 마을로 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분명한 의지를 밝히셨습니다.

'내가 거기에 가서 전도하리라 내가 온 목적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 선포를 마치신 주님께서는 가버나움을 떠나 다른 갈릴리지역으로 이동하시면서 전도를 하셨고 귀신들을 내어쫒는 일들을 하셨음을 마가는 우리들에게 고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목적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본문 해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외딴 곳의 영성에 주목하셨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35절을 다시 봅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께서는 새벽의 통이 트기도 전에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한적한 곳으로 나가셨습니다.

개역개정판에서는 '한적한 곳'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헬라어 원어 '에레모스는 '광야'(desert)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영어성경도 '광야'로 번역을 해 놓은 것이 주류입니다.

오늘 본문 35절에서 말하고 있는 '한적한 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인 '광야'를 말합니다.

주님이 세속적인 인기몰이를 피하셔서 찾으신 장소는 버려진 땅 광야였습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있고 금빛 찬란한 샹들리에가 있고 세속적인 부귀와 영광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땅 '에레모스'였습니다.

이곳은 세속적인 인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이곳은 세속적인 권력이나 물질의 풍요로움이나 정치적인 야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외딴 곳(isolated place)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이곳으로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동이 트기 전인 새벽에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왜 외딴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까?

본문은 아주 명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기도하시더니'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이 이 한 구절이 줍니다.

인간이 언제 기도하게 됩니까?

광야에 있다는 사실을 알 때입니다.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버려진 땅으로 가신 예수님은 그것에서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며 조명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버려진 땅이지만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창세기 13:14절 전반절을 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아브라함의 유일한 혈족인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비옥한 땅 요단 동쪽인 소알 지역을 선택하여 떠났습니다.

롯이 옆에 있을 때아브라함은 조카를 의지했습니다.

그때는 아브라함이 롯이 의지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떠났습니다.

이후소름끼치는 전율함이 이 구절 하반절인 창세기 13:14(2f)-15절에서 보입니다.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나님께서 롯이 떠나고 홀로 남겨진 아브라함에게 드디어 오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롯이 선택한 요단 동편이 아닌 그 외의 지역의 동서남북이라고 말씀하시며 이 땅을 모두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후 도착한 것은 헤밸 1,000미터가 넘는 산악지대인 헤브론이었습니다.

소알에 비하면 헤브론은 광야와 같은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지만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사순절은 내가 광야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절기입니다.

광야에 나만 버려져 있는 것 같지만그 광야가 도리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의 시간이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시간으로 사순절을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광야로 피하신 주님의 행동에 말할 수 없는 위로와 감동을 받습니다.

가끔은 아주 빈약하지만 주님이 행하셨던 바로 그 행동이 종에게도 피부로 와 닿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목사로서 어떤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던질 나이의 목사이기에 더 더욱 주님의 이 선택은 종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대중적인 인기가 추구하는 곳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주목의 길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포플리즘적인 인지도가 높은 길을 가고 싶은 것이 목사인 저에게도 언제나 오는 유혹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길을 주님이 택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주님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길을 끝까지 지키시고 사수하셨다는 점이 종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라고 고백하고 선언했습니다.

이 고백이 진정이라면 주님이 왜 광야로 가셔서 아버지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를 하게 되었는지를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불교에서 불교의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승들인 이판승들이 있어 불교의 위기 때마다 그 명맥을 이은 것처럼 우리 기독교가 이제는 눈부신 대중적인 인기와 정치적인 권력에 탐하는 그런 불행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외딴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더 엎드리고 더 무릎으로 섬기고 나아가는 외딴 곳의 영성을 추구할 때 앞으로 진정한 영성 있는 기독인으로서의 승리를 경험하지 않겠습니까?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우연히 유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유재석씨와 조세호씨가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날게스트가 라는 가명으로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온 정지훈이라는 가수였습니다.

프로그램의 말미에 유재석씨가 게스트에게 물었습니다.

40대의 지금 지훈씨가 20대의 지훈씨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

그러자 한참을 생각한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20대 치열하게 살았습니다좀 더 잘 되고 싶어서 열심히 했습니다인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그렇게 살아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그런데 지금 40대 되고 보니 왜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는지 후회가 될 때가 있습니다공허하기도 합니다조금은 실수도 하고완벽하지 않게 인간적이기도 하고바보도 되어보고 그렇게 살았더라면 지금 느끼는 나름의 공허함은 덜 했을 텐데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그래서 2대 지훈이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가끔은 홀로 생각하고 마음의 편안함이 있는 사람으로 살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舊 동독의 저항시인이었던 마리아 쿤체의 시어를 하나 소개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방금 전만도 알았던 것/말이 되는 도중에 너를 떠나 버린다/무대는 이제 네가 설 곳이 아니다/말을 잃고 출구에 서 있다상실들” (마리아 쿤체, “나와 너와 마주하는 시간”, ‘불가역적’ 중에서,91.)

내가 세상에서 추구하려는 일체의 것들은 나와 영원히 함께 있지 않습니다.

결코 나와 함께 영원히 있지 않습니다.

언제가 나는 모든 것을 떠나야 하는 출구 즉 상실의 때에 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가 풍요지려면 지금 광야에 서 있는 나를 축복하십시오.

광야는 결코 저주의 장소가 아닙니다.

내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최고의 복된 장소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합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