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1일 사순절 첫 번째 주일 설교 제목: 차라리, 침묵하십시다. 본문: 야고보서 3:1-6 서론) 우리는 오늘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오늘부터 4월 3일까지 주일을 뺀 40일을 사순절기로 지킬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재의 수요일(2월 17일)부터 사순절 묵상집을 함께 나누며 아침을 열고 있으며, 더불어 탄소금식을 선포하여 그 동안 너무 풍족함으로 인해 아무 생각이 없이 흥청망청 사용하던 우리들의 물질적 폭주를 다시 한 번 경성하며 잠시의 멈춤도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신약성경을 직접 손으로 필사하며 조금 더 주님의 말씀에 가까이가려는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40일 동안의 사순절 기간, 저는 잠시 고린도후서 강해를 멈추고 적어도 우리들이 성찰하고 나아가야 할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내용들을 교우들과 함께 나누며 은혜의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말의 멈춤에 대하여 살피려고 합니다. 본론) 2011년 1월 12일, 총기 사건이 발생한 미국 애리조나 주에 위치한 투산에서 버락 오마바 대통령이 참석한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그 날, 버락 오마바 대통령은 총기 사건으로 희생된 크리스티나의 이름을 거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티나가 상상한 것처럼 민주주의가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유트브에서 퍼옴) 이 말을 한 버럭 오마바는 갑자기 추모 연설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51초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깊은 호흡을 내쉬고, 그의 시선은 허공을 쳐다보았습니다. 장내에 있는 군중들은 대통령의 침묵이 이루어진 51초 동안 긴장하며 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51초 동안 오마바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려고 어금니를 깨물고 버티는 그 진정성이 고스란히 텔레비전 방송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이 연설이 끝난 뒤, 뉴욕 타임스는 이렇게 그의 연설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버락 오마바는 대통령이자 두 딸의 아버지로서 단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통령은 미국인들과 말만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눴다. 51초는 오바마 재임 기간 중에 가장 극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버락 오마바의 이 연설을 유트브로 다시보기 했습니다. 시청이 끝나자 이런 소회가 제게 임했습니다. “51초의 침묵이 도리어 가장 큰 울림이 되어 나에게 공명되었다.” 잠언 18:19절에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이 구절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게 마련, 지각 있는 사람은 입에 재갈을 물린다.” 대단히 공격적인 교훈입니다. 그렇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너무 적확한 교훈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성도인 저와 여러분이 제일 먼저 멈추어야 하는 것은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스위스 출신의 의학 철학자인 막스 피카르트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침묵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본질적인 행위인지를 강하게 역설하기 위해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인용합니다. “세계의 현 상태, 생활 전체가 병들어 있다. 만일 내가 의사이고 그래서 당신에게 무슨 충고를 해주겠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침묵을 창조하라! 인간을 침묵으로 데리고 가라. 이 소음 속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소음 속에서도 들릴 수 있도록 소란스런 방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떠들썩하게 외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까치, 269) 100% 동의합니다. 오늘 본문은 신약성경 중에서 특별히 말에 대하여 조심할 것을 경종시킨 야고보의 글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대단히 단호합니다. 2-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어떤 면으로 보면 과격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야고보 기자의 역설은 그 기세가 진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言)에 실수가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강조입니다. 그렇다면 실수를 하지 않는 방법은 말(馬)에 재갈을 물려 그 말을 통제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입에도 재갈을 물려 통제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잠언 기자의 충고를 야고보도 그대로 받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야고보가 활동하던 주후 1세기의 사회문화적인 상황으로 볼 때 이 표현은 최선을 다한 표현일 것입니다. 바다나 강을 건너기 위해서 제작된 배와 그 배를 움직이게 하는 방향키를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야고보 당시의 배는 기관실을 갖추고 있는 동력선이 아니었습니다. 바람에 따라 키를 조절하여 움직이는 풍력선이자 무동력 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장이 방향을 잡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는 방향키는 어떤 의미에서 그 배의 목적을 향한 항해와 안전을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도구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4-6절을 해석해야 합니다. 배의 크기나, 그 배를 움직이게 하는 바람은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배의 방향을 가늠하는 방향키는 대단히 작은 크기입니다. 그런데 야고보기자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방향키는 작지만 바람의 세기와 배의 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통제하는 도구라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 인간의 혀는 어떻습니까? 배의 방향키보다도 더 작습니다. 문제는 혀를 통제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야고보 기자의 거친 글을 조금만 더 살펴보십시다. 이번에는 5-6절을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혀는 키보다 작고 말(馬)에게 물리는 재갈보다 훨씬 작은 인간의 신체 중에 하나이지만, 그 혀의 위력은 제어가 불가능한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는 신체의 기관이라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제어가 안 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혀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위력은 실로 너무 어마 무시무시한 것이라 모든 것을 순식간에 살라버리는 지옥에서나 존재하는 불과 같은 것이라고까지 비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기가 막힌 필채가 본문에서 발견됩니다.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 뭐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혀입니까? 그럴 리가요? 혀를 갖고 놀린 말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한 야고보는 본문 1절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선언을 하나 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야고보는 혀 놀림의 위험성을 경고하기에 앞서 그 대상을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늘해 집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혀 놀림을 조심하야 하는 대상은 ‘선생’입니다. 헬라어 ‘디다스칼로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를 제가 설교 준비를 위해 참고하는 14권의 영어성경 중에 12권에는 ‘teacher' 라고 번역했고, 두 권에서만 'master'라고 번역했습니다. 'teacher‘가 무엇을 의미하는 단어입니까? 말 그대로 가르치는 자입니다. ‘master'는 어떤 의미입니까? 책임을 맡은 자입니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학자들 간의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였던 야고보라고 보는 것이 무방합니다. 야고보는 이 서신을 누구에게 보냈는지를 본 서신 1:1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흩어져 있는 12지파라고 명명합니다. ‘흩어졌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바로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디아스포라’입니다. 통상적으로 ‘디아스포라’라고 하면 팔레스타인 밖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쓴 저자임을 감안할 때, 반드시 유대인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밖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있었던 형제들도 수신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3장에서 말하고 있는 ‘디다스칼로스’ 즉 선생으로 지칭된 자들은 유대교 공동체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공히 사역하는 종교적인 지도자들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오늘로 이야기한다면, 교회 안에 있는 목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일체의 지도자들을 종합적으로 지칭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바로 이 해석에 즈음하여 우리는 사순절 첫 번째 주일에 주시는 영적 교훈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 교회에서 앞서 나간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여, 말조심을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침묵하십시오.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미 죽이기로 계획한 산헤드린 공회의 수장인 가야바의 뜰로 명명된 종교재판의 장소로 끌려왔습니다. 이윽고 날이 밝은 금요일 아침, 뜰로 끌려나온 예수님에게 유대교의 디다스칼로스(선생)들이 이미 작정된 시나리오대로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지를 말하라 겁박이었습니다. 말을 하면 그 말꼬리를 잡고 죄의 내용으로 물고 늘어지겠다는 아주 질 나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 저의를 아신 주님이 저들을 향해 선포하신 말씀이 근래 목회의 현장에 서 있는 저에게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누가복음 22:67-68절입니다.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후 주께서는 대적자들의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하셨고, 세대의 악함을 아셨던 주님은 일체의 대답을 하시지 않고 고난당하심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본인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주님이 택하신 방법은 목회를 하는 제게도 지난 세월과 그리고 지금도 사역하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만에 하나, 목회를 하면서 당했던 수모와 치욕에 대하여 일일이 반응하며 열거한다면 전집 하나는 족히 될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침묵하는 것이 방법이었고,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었음을 지난 세월동안 현장에서 배웠습니다. 작가 이기주는 본인의 책에서 종교학자 프리드리히 폰 휘겔의 말을 소개하며 침묵을 예찬합니다. “위대한 것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 침묵의 내면에서 말을 키워라. 말로만 하는 토론은 왜곡만 가져다 줄 것이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황소북스, 83.) 아주 가끔, 제가 쓴 글에 인격적인 모독에 가까운 공격을 하는 근본주의자들의 댓글을 흔치 않게 발견합니다. 허면 저는 그 댓글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대신, 일체의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는 제가 반응하지 않자, 이어지는 댓글을 통해 거의 인격 살인에 가까운 독설을 남겨놓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제가 그들에게 침묵하는 것은 항변하고 대항할 지성적 무기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미 그들은 들을 귀를 닫아놓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공격적으로 말한다면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영적 정력을 소비하는 그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시간을 갖는 것은 제게 너무 아깝고 아까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에 제가 할 것이 있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면서 새벽예배에 참석한 교우들과 나누고 있는 존 베일리의 기도대로 사는 것이 제게는 그 시간에 해야 할 일이기에 그들과 논쟁할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오늘 저의 첫 생각이 당신이게 하시고, 오늘 저의 첫 열망이 당신을 향한 예배이게 하시고, 오늘 저의 첫 말이 당신의 이름이게 하시고, 오늘 저의 첫 행동이 당신 앞에 무릎을 꿇는 기도이게 하소서!” (존 베일리, “매일기도”, 성서유니온, 8) 이것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무슨 논쟁을 하며 그들과 싸우겠습니까? 이해인 수녀께서 쓰신 ‘말을 위한 기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이해인 수녀께서 왜 이렇게 고백했을까요? 그녀가 詩作을 시작한 초기 작품인 ‘민들레 영토’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큰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 들려옵니다. 나의 자그마한 안뜰에 남 몰래 돋아나는 향기로운 풀잎, 당신의 말씀 -그 말씀 아니시면 어떻게 이 먼 바다를 저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해인, “민들레 영토”, 가톨릭출판사,120.) 그러면 그렇지요. 수녀는 알았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소리로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아니, 도리어 단 한 번도 큰소리로 나타나신 적이 없는 주님인 것을 알았기에 수도자인 그녀는 말을 잘 탄생시키는 지혜와 침묵하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혀를 제어할 힘이 없으십니까? 차라리 입을 닫고 침묵하십시다. 주님은 오히려 당신이 침묵하는 그 과정에 훨씬 더 가까이 계실 것입니다. 예언자 하박국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20절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난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찌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난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 찬양합니다 내 온 맘 다하여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