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진짜 무기2024-03-07 13:59
작성자 Level 10

2021년 1월 2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서른일곱 번 째 강해)

 

제목진짜 무기

본문고린도후서 10:1-6

 

서론)

 

지난 주간에 후배 목사가 SNS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목사 되기 너무 쉬운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그러나 바른 목사 직분을 감당하기는 너무 어려운 세상입니다.”

평소에 잘 교제하는 후배 목사의 이 글을 읽다가 그의 심정이 어떤 심정인지를 알겠지만그의 글을 조금 바꾸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목사를 너무 쉬운 상대로 아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그래서 바른 목사 직분을 감당하기가 너무 어려운 세상입니다그러나 어쩌겠습니까그래도 살아내야죠.”

얼마 전에 혜민이라는 승려가 추락했습니다.

그의 이율배반의 삶이 고발당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사가 실렸을 때한 사람이 이런 댓글을 달았던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책을 돈 주고 샀다우편등기로 책을 보낼 테니 책값을 환불해라이제부터 너에게 딱 좋은 직업이 생겼다목사 하면 될 것 같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을까 싶지만 그 화풀이를 교회 목사에게 푸는 이런 아류의 극단적 정신병자들이 너무 많아져서 현직 목사로 사는 나는 참담하기에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너무 당하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너무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괴감에 빠져 분노가 극에 달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제 새벽에 누가복음 22장을 교우들과 함께 읽었습니다.

이제 서재에 들어가서 설교 준비를 해야 하는 제 마음을 어떻게 아셨는지 벼락을 하나 떨어뜨려주셨습니다.

해서 백기투항 했습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금요일 새벽녘에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가야바의 종교적 수하에 있었던 군사들과 종들에게 둘려 쌓이셨습니다.

이윽고 가롯 유다가 배신의 입맞춤을 하자 가야바의 수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순간베드로가 그 중에 한 사람말고의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립니다.

이 광경을 보셨던 주님이 반응이 누가복음 22:51절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말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를 때리면 그냥 맞고비난을 퍼부으면 그냥 듣고고소를 하면 그냥 당하는 게 주님이 원하시는 뜻인가 보다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자 상당한 무력감이 제게 임했습니다.

어떻게 설교 준비를 하지 고민하는 마음으로 서재에 앉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어떻게 하죠단 한발자국도 디딜 수가 없네요하나님어떻게 하죠?”

그리고 직업의식을 갖고 오늘 원고를 작성했습니다.

그러기에 말씀의 은혜는 제 몫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두 달 만에 대면 예배에 나온 교우들에게 전합니다.

이제부터는 철저히 성령이 일을 하실 것을 믿고 본문에 충실하여 대언하겠습니다.

주의 긍휼을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까지 고린도후서 8-9장을 공부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공동체 지체들에게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이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경제적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힘 있는 대로 구제 연보를 모아 그 형제들을 돕자는 권면을 했음을 살폈습니다.

8-9장의 과정 중에 함께 살폈지만바울은 이 사역을 행하면서 때로는 타이르고 잘 다독여서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이 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조심또 조심했음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분위기가 180˚로 돌변합니다.

그 동안 참고 참았던 바울이 마치 폭발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상당히 과격한 언어들이 등장하고살벌하기까지 한 내용들로 넘쳐납니다.

본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부터 보는 10-13장에 걸친 4장이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9장과 10장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반전이 일어났을까요?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 상황과 맥락을 이해해야 합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 학자들이 주장하는 두 가지의 견해를 소개합니다.

① 10-13장을 1-9장보다 먼저 쓴 글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그래야 문맥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공부했듯이 7장까지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본인의 적대자들에 대하여 아주 단호한 어조로 자신의 사도권을 강변하였던 것을 살폈습니다그렇다면 사도권 변호라는 주제에 걸 맞는 10-13장의 텍스트는 마땅히 7장 뒤에서 이어지는 텍스트로 보든지 아니면아예 1장 앞에 위치를 놓아야 하는 의미가 통하기에 그렇게 텍스트를 재 정렬해야 한다고 학문적 주장을 하는 자들의 이론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결정적인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본도 이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헬라어 사본 중에 그 어떤 하나의 사본도 이렇게 배열을 한 사본이 없기에 이들의 주장을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② 1-9그리고 10-13장은 기록의 시점이 시간적 거리가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학설입니다.

조금 부연설명을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강해들을 통해 고린도후서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네 번째의 편지라는 것을 이미 살폈습니다.

첫 번째 편지 (서신 a) ; 분실되었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편지고린도전서입니다.

세 번째 편지 (서신 b) : 분실되었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 편지고린도후서입니다.

주목할 것은 네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를 바울이 쓴 이유는 소위 눈물의 편지라고 정의하는 세 번째 편지를 디도를 인편 삼아 보냈는데 디도가 가지고 온 인편의 답신이 상당수의 고린도교회 형제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고 다시 회복되었다는 희망이 메시지를 가지고 왔기에 바울은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기록한 글이 고린도후서 1-9장까지임을 살폈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바울의 사도됨을 인정하지 않는 반대자들 혹은 적대자들이 상당수 고린도교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바울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고린도교회를 무너뜨리는 암적인 요인들이었고바울이 네 번째 편지 1-7장에서 1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강온전략을 피며 그들을 설득했지만전혀 요동하지 않았던 자들이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들의 행태가 더하면 덜했지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본인들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자칭 떠벌였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언변으로 고린도공동체를 유린했습니다.

환상과 계시의 체험을 했다고 말하면서 바울은 영적 체험을 하지 못했고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고 공격했습니다.

심지어 본인의 부를 위하여 돈까지 모금한다고 공격하며 바울을 괴롭히고고린도교회를 잠식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이런 악한 일을 방치할 수 없다고 보았던 바울은 8-9장의 구제 연보 독려 글을 쓰며 잠시의 숨고르기를 한 뒤전혀 다른 색깔의 글이 필요하다고 여겨 문체와 내용을 바꾸어 10-13장을 썼다는 것입니다.

해서 어떤 학자는 이 기록(10-13)을 다섯 번째의 편지라고 까지 해석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거기까지는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1-9장과 10-13장은 글 쓴 시기가 다르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사정이 이렇게 급박하다보니 오늘 본문 10-13장은 1-7장까지의 사도권 변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표현들을 써가며 강력하게 반대자들을 비난하고 성토함은 물론 공격까지 하는 장면이 계속 등장합니다.

이 선 지식을 갖고 본문을 해석하면 그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릅니다.

바울은 그 동안 수비적인 자세를 바꾸어 완전히 공격적인 자세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합니다.

풀면 이렇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을 다음과 같이 공격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우리(적대자)들을 보면 유순하게 쥐 죽은 듯이 있고밖으로 나가면 도리어 강해지는 종이호랑이 같다고 공격을 한 그들에게 드디어 강하게 반응을 보인 것이 1-2절입니다.

또 하나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은 바울을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라고 공격을 했습니다.

이런 공격을 받은 바울이 이제부터는 너희들(고린도교회의 대적자들)에 대하여 태도를 바꾸겠다고 선전포고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평가한 그대로 외부에 있을 때만이 아니라 이제는 직접 너희들을 대면할 때부터는 담대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경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3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바울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이 나를 육신에 따라 사는 자라고 공격을 했는데 반론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호흡이 있으니 육신을 따라 행하는 것은 맞는다고 전제하였지만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않는다.”

이렇게 선포한 바울은 개인적으로 제가 참 좋아하는 메시지를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에게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본문 4-6절을 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이 구절 중에 특히 5-6절에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않기에 반면 그가 집중하는 싸움의 목적이 있음을 말합니다.

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는 싸움.

②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싸움.

적어도 이 싸움을 싸워 반드시 내가 이룰 것이라는 영적 목표를 적대자들에게 분명히 합니다.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6)

이제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에 복종하거나 굴복하지 않는 자들을 찾아가서 반드시 벌할 것이라는 사도의 권위자로서의 선전포고를 한 셈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바울이 선전포고한 두 가지 사실에 대해 묵상하는 순간 소름이 끼쳤습니다.

이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미 들은 만큼 들었고교육 받을 만큼 받아서 목사가 아하는 설교를 하면 어하는 능력이 있으니 내 선에 넘어오지 말라고 협박하는 영적 교만의 극치를 달리는 자들과 맞서 싸우겠다는 말입니다.

가 무엇입니까?

복음의 능력에 붙들린 것이 아니라 말은 복음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언제나 복음 위에 자기의 신념을 견고히 세워놓고 내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 내 담 안으로 한 발바국도 들어오지 말라는 영적 님비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완전히 복종하는 자가 될 때까지 싸우겠다고 일사각오의 선전포고를 한 셈입니다.

①②의 대상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고린도교회에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설교의 폭을 좁히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마케도냐 지역의 남쪽에 위치한 부유한 도시 고린도에 살고 있었던 유대교 출신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만 이런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2021년 1월 24일 충북 제천시 내토로 15길 23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들 중에도 ①②는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완전히 사로잡혀 사는 자들이 아니라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음의 말씀을 방패삼아 조금도 나에게 적용되는 영적 헌신과 자기 포기의 삶을 피해 다니는 자들이 우리 교회에도 널려 있습니다.

이들과의 싸움은 쉽지 않습니다.

종교성으로 포장되어 있는 유사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NGO 단체인 컴패션 대표인 서정인 목사가 맡고 있는데 서 목사께서 북한의 탁아소를 다녀온 소감을 송태근 목사가 소개하는 영상을 유튜브를 통해 접했습니다.

영적 교훈이 있어 소개합니다.

NGO 대표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서 목사는 구호물품을 들고 한 탁아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마침 방문한 날유아들이 다 자고 있었답니다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탁아소의 관리자들에 의해 자는 체하고 있었답니다그 광경을 보는데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술회한 서 목사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답니다.

목사님진짜로 자는 아이를 흔들어 잠에서 깨우는 것은 쉽습니다생리적으로 그것은 그냥 깨기 때문이지요그런데 정말로 힘든 일은 자는 척 하는 아이들을 깨우는 일입니다자는 척 하는 아이들은 외부의 학습된 그 무언가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고 짓눌려 있기 때문에 깨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막힌 통찰 아닙니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말대로 설익은 피아노치기를 배운 아이들보다 피아노의 자도 모르는 완전 초보자를 가르치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는 말처럼 포장되거나 섣불리 아는 자를 고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을 대적하고 있는 자들은 무언가를 조금 안다고 착각하는 자들입니다.

마케도냐 지역을 휘감고 있었던 헬라의 지혜철학적 이성 등에 맛 들린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박 겉핥기의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그 예수를 전부 아는 것처럼 설레발치고 있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인들처럼 흉내 내면서 척하고 있는 자들이지만 실상은 복음의 능력에는 눈감고 있거나다른 복음에 함몰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1-7장까지의 메시지를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든 그들을 타이르고어르고또 경성시켜 적대자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했음을 엿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 하고 있는 그들에게 소망이 없음을 알고 본문에서는 180˚ 입장 변화를 하고 그들을 반드시 변화시켜 복종 시킬 것이며안 되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단호한 입장을 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단호한 입장을 표명한 바울은 어떤 자신감으로 이렇게 본인의 의지를 담대하게 표출했을까요?

그 답을 본문 4절이 줍니다.

이 4절은 앞서 잠시 언급한 대로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고린도교회에 존재했던 바울의 적대자들이 무장했던 무기를 바울은 모든 이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들이 갖고 있었던 모든 이론을 견고한 진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이런 무시무시했던 교회 안의 무신론자들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진짜 무기를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본문 4절에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무기가 무엇일까?

고신대 신약학 교수인 최승락 교수의 말을 질문의 답으로 제시합니다.

크리소스톰이 잘 지적하는 것처럼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육체에 속해 있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우리의 무기가 육체에 속해 있지 않는다는 말이다크리소스톰은 이 무기를 설교라고 지적한다무엇보다도 복음의 설교는 우리에게 주신 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강력한 무기다.” (최승락, “고린도후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로 how주석 41,197.)

교부 시대의 황금의 입으로 불렸던 설교자 크리소스톰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 최 교수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렇게 쐐기를 박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무기설교의 무기는 인간의 모든 논리계략들수사학적이 기교들교만함의 탑들을 무너뜨리고 사로잡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199.)

부인할 수 없는 도전입니다.

피할 수 없는 영적 다이너마이트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성령께 맡긴다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고 교우들에게 바울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 질문하겠습니다.

 

※ 여러분은 담임목사 치열한 영적 분투함으로 준비한 설교를 영적인 진짜 무기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담임목사가 피 흘리는 심정으로 준비한 메시지가 사탄의 견고한 진을 파헤치고 허무는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무기임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담임목사가 성령의 조명을 기대하며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는 마음을 담아 선포한 메시지를 강력한 공격 무기인 성령의 검으로 활용하고 계십니까?

종교개혁주일에 부른 찬송가 585장 1절의 3,4 소절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그래서 손 놓고 있습니까?

싸워봐야 100전 100패를 확신하기에 사탄의 견고한 진에 빠져서 백기투항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마르틴 루터는 2,3절 가사를 이렇게 썼습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 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들 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진리를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진리로 이길 것이라고 노래한 마르틴 루터의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고 노래한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는 그 하나님의 살아계신 진리를 교우들에게 레마로 적용시키는 영적 무기입니다.

설교는 문자로 기록되어 있지만이 모든 글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글이기에 오늘도그리고 시분초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대언하는 사역입니다.

그러기에 설교는 교우들이 이 땅에서 사탄의 견고한 진을 훼파하는 강력한 영적 무기로 사용해야 하는 공격용 무기입니다.

지난 주간우리 교회 지체와 교제했습니다.

교제 중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아주 가끔은 다른 교회에 방문해서 타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그런데 그 때마다 어느 경우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 설교 때문에 나옵니다또 어느 경우에는 끝까지 들어볼만한 설교인 것 같아 버티며 듣기도 합니다그런데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 지체는 담임목사의 설교를 격려하기 위해서 제게 한 말일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들리고최곱니다.”를 말하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소리에 기분 나빠 할 목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예민하게 반응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십 분 동의하는 마음을 담아 그 말을 한 지체뿐만이 아니라 우리 세인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담임목사가 피 흘리기까지 준비한 하나님의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그 말씀을 갖고 일주일 동안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사탄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기 위해 무기 삼아 피 흘려 싸우고 있습니까?

작년 류호준 박사의 글을 읽다가 야구 방망이로 머리를 타격 당한 데미지를 입은 글을 만났습니다.

설교자라는 한 인격체가 설교의 주어이어야 합니다왜냐하면 설교하는 ’ 역시 사인(sign)이기 때문입니다즉 나는 내가 하는 말로 표현하는 것 이상을 말하고 있는 상징이며 사인이라는 뜻입니다강단에서 단수형 일인칭으로 서 있는 설교자는 자신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상징인 것입니다이런 점에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설교자 자신에게 엄청난 부담과 중압갑을 줍니다설교자는 네 발을 보지 말고 내 입을 보시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설교자의 진정성이 있는 삶과 신앙이 담보되지 않는 설교는 죽은 설교입니다주님을 믿는 ’, 신앙에 따라 행동하는 ’,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 복음의 깊은 감동을 받고 사는 ’, 복음에 의해 스릴을 경험하는 ’, 복음에 의해 도전받는 ’, 복음에 의해 갈등하고 고민하는 ’, 한 마디로 진정성이 있는 가 강단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류호준, “교회에 하고픈 말”, 두란노,142.)

사정이 이런 데목사가 어찌 설교를 가볍게 여길 수 있단 말입니까?

사정이 이런 데어찌 성도가 선포된 말씀을 일주일에 한 번 듣는 입담 좋은 목사의 립 서비스로 여긴단 말입니까?

설교가 여러분에게 진짜 무기입니까?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무슨 오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금년 2021년에 제가 삼은 목표 중에 하나는 귀동냥만 했지글로 접해 보지 못한 고전의 숲을 반드시 걸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선택한 고전 탐닉입니다.

제일 먼저 손에 들은 것이 보수주의자들이 불온서적 랭킹 1위로 뽑은 프리드리히 빌헴름 니체가 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입니다.

읽으며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밑줄동의되는 부분은 색으로 밑줄을 긋고 있습니다.

묘한 이중적 양가감정을 들게 한 글을 인용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언젠가 짜라투스트라는 제자들을 손짓하며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여기 성직자들이 있다비록 그들이 나의 적이라고 할지라도 칼을 잠재운 채로 그들의 곁을 조용히 지나쳐라그들 가운데에도 영웅은 있다그들의 대부분은 너무나 많은 고통을 당해 왔다그래서 그들은 보복으로 남에게고 고통을 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홍신문화사,119.)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니체가 기독교와 결별한 이유는 아마도 상처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게 하는 결정적 텍스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대단한 석학이고 사상가였지만한 가지 남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가 인정했던 영웅이라고 표현한 성직자의 설교를 조금만이라도 붙들었다면아니 본인이 신학을 했으니 그 영웅이 본인 스스로가 되었더라면 삶을 만신창이로 막 살지 않았을 것이며, 1900년에 심각한 정신분열증의 후유증으로 그렇게 허무한 삶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적어도 더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도구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제게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앞에서 소개한 류호준 박사는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설교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아니값싸게 오지 않습니다비용이 많이 듭니다설교가 인생과 삶을 바꾸는 일이라면 어찌 비용이 들지 않겠습니까?”

세인 교회를 섬기는 이강덕 목사는 인생을 바꾸는 설교하기와 준비하기를 위해 피 값을 지불하고 있고 또 지불하겠습니다.

세인 지체들이여!

설교를 무기 삼으십시오.

설교는 사탄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진짜 무기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이 땅위에 오신

 

1. 이 땅 위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죄 사하셨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우리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

모든 입이 주를 시인해

영광중에 오실 주를 보리라 선포해

 

2. 우리 고대 하네 주님 오실 그날

다시 사신 왕의 영광 이 땅을 비추네

사단의 권세는 주앞에 무너져

생명과 진리의 주 권세 가장 높도다

우리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

모든입이 주를 시인해

영광중에 오실 주를 보리라 선포해

 

후렴)

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

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