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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평화가 곧 길입니다.2024-03-07 13:57
작성자 Level 10


본문 
이사야 11:1-9

제목 평화가 길입니다.

 

서론)

 

체코 출신의 저항 작가인 밀란 쿤데라의 걸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중부 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오로지 범죄자들의 창조물들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인 진리를 어둠 속에 은폐하고 있다범죄적 정치 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역민음사, 2015,287.)

제가 이 글을 읽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유독이 이 문장에서 멈춰 섰던 것은 그만큼 제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명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는 것처럼 체코는 제 2차 세계대전의 희생양이 되어 다른 중부 유럽의 국가들처럼 소비에트 연방(구 소련)의 정치적 위성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조국의 무너짐 한 복판에 있었던 밀란 쿤데라는 체코에서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자 프랑스로 정치적인 망명을 했고그곳에서 이 유명한 작품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발표하면서 전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조국 체코가 전체주의화 되어가는 것을 비난하면서 던진 그의 이 화두는 저로 하여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촌철살인이었습니다.

획일화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고립화다른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매장시키는 전체주의의 망령 등등이 오늘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선언하고 외치는 목사에게 얼마나 사역이 위태롭고아슬아슬한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의 거울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유일신 신앙에 대하여 극단적인 혐오감을 나타냅니다.

이런 지성적이지 못한 종교를 믿으라는 것이냐고 떼거지로 공격합니다.

조금은 점잖게 행동하라고 훈수를 두기까지 합니다.

세간이 말하고 있는 이런 타이름에 교회는 두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오른쪽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 세상을 사탄에게 붙들려 있는 상대 못할 지옥 백성들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왼쪽에 치우쳐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하든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타협의 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에게 반목하며 손가락질하고 대척점에서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이런 대립의 각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저이기에 오늘의 목사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고 아프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범죄적 정치 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다.”라고 강하게 외친 밀란 쿤데라의 이 비수에 대하여 귀를 열고 들어야 하는 자들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구입니까?

극단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극단주의는 신앙적이라는 이름을 갖고 포장하여 나서지만 그 배후에는 정치적이라는 괴물이 지탱하고 있는 또 다른 우상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특별히 극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대단히 감동적인 서사가 펼쳐지고 있는 본문입니다.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흔히들 이 구절을 해석할 때통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윗의 계보에서 태어날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상징하는 메시지라고 해석하는 앎입니다.

또 하나 그렇게 오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임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주 넓은 의미에서 해석한다면 그렇게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언자 이사야가 본문에서 선포한 이 메시지가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보는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주목해야 구절이 하나 보입니다.

이새의 줄기입니다.

이 구절은 대단히 신선한 영적 교훈을 주는 대목입니다.

왜 예언자 이사야는 본문에서 이 땅에 임할 메시야의 그림자를 다윗의 줄기라고 표현하지 않고 이새의 줄기라고 표현했을까?

주전 700년 즈음그러니까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한지 약 300년 정도가 지났지만 그래도 다윗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민족적 영웅이었고 자존심이었는데 예언자 이사야는 영웅의 이름을 인용하지 않고 왜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인용하며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주석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차준희 교수의 해석을 빌려보겠습니다.

현재 예루살렘에서 통치하고 있는 유다의 왕들은 모두 다윗의 후손에서 나왔습니다그런데 다윗의 후손에서 나온 왕들은 하나같이 이상적인 왕들이 아니었습니다그래서 이상적인 왕은 다시 원뿌리로 돌아가서 다윗을 낳은 그 아버지로부터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즉 이상적인 통치자가 다윗을 낳았던 이새에게서 온다는 말은 새로운 통치자가 다윗과 같은 제 2의 다윗이라는 말입니다다윗을 닮은 사람이 아니라 다윗과 똑같은 제 2의 다윗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차준희, “6개의 키워드로 읽는 이사야서”, 성서유니온,p,112)

무슨 말입니까?

이 땅에 올 메시야는 완벽한 제 2의 다윗일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올 메시야는 부분적으로 그럴듯한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제 2의 다윗인 완벽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오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예수님 탄생 약 700년 전에 예언자 이사야 통하여 선명히 선포한 것입니다.

본문 2절은 이렇게 오실 메시야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가득 찬 존재임을 명시합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누가복음 3:21-22절이 무엇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까?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본문 2절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누가는 보고합니다.

이제 본문 3-5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너무 가슴 뜨거운 예언이지 않습니까?

이 땅에 임할 메시야는 분명한 의지를 갖고 행동하실 사역자임을 못 박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들로 이루어진 유대의 왕들은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통치한 자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했습니다.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무시했습니다.

거짓이 난무한 것을 그대로 용인하기 일쑤였습니다.

해서 악인들이 떵떵거리며 살아도 괜찮은 통치를 자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임할 메시야의 통치 방식은 정 반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통치할 것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극단주의에 빠져 통치하지 않고 공의와 정직이라는 두 가지 분명한 통치철학을 갖고 백성들을 다스릴 것임을 시시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이 땅에 임한 메시야는 악인들을 분명히 제어할 것임을 천명합니다.

그리고 다시 나오는 단어 공의(체다크)와 성실(에무나)로 무장하여 통치할 메시야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통치가 이루어질 그 나라를 이어지는 본문 6-8절에서 드라마틱한 감동의 나라로 묘사합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이 구절을 보면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릅니까?

어렸을 때 힘 있게 불렀던 복음 성가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며는/

사막이 꽃동산 되리/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어린이도 같이 뒹구는/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오리라/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며는/사막이 낙원 되리라/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장난쳐도 물지 않는/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그런데 본문을 가사로 만든 찬송으로 이 구절을 이해하고 즐기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너무 아쉽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예언한 이 구절의 참된 영적 교훈을 쓸어 담는 것입니다.

창세기 9:2-3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의미심장한 성경 말씀입니다.

인간에게 동물들을 먹이로 줄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이 때가 언제입니까?

노아의 홍수 이후입니다.

그러면 노아의 홍수 이전은 어떠했습니까?

창세기 1:30절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무슨 말입니까?

홍수 이전에는 인간이나땅에 사는 동물이나하늘에 사는 새나 모두에게 공통으로 허락된 먹을거리는 채식이었습니다.

무엇을 교훈합니까?

홍수 이전에는 인간과 동물들이 공존했다는 것입니다.

서로 상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 이후에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파괴되었음을 창세기 기자는 알려줍니다.

육식을 인간에게 허락했다는 말이 인간에게 좋은 것처럼 들립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원 창조 사역과 통치에 대하여 문외한 인 셈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계획하셨던 창조와 통치는 인간과 동물의 공존이요동물과 동물의 상생구조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 한 이후 그 관계는 파괴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8절이 주는 예언자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다시 인간과 동물의 관계동물과 동물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날이 온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리와 어린 양이 공존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울 수 있습니까?

어떻게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암소와 곰이 함께 먹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그 굴에 손을 넣을 수 있습니까?

상상 불가입니다.

그렇다면 설명한 이사야의 이 메시지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임할 메시아의 강림이 도래하는 날 이런 엄청난 혁명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이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깨어진 관계의 회복입니다.

깨어진 관계의 회복이라는 단어를 설교자인 저는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 극단적 대립 구도에서 평화로의 진입입니다.

 

대림절과 성탄의 절기가 되면 언제나 떠올리는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구절을 상기하고 복기할 때마다 뜨겁게 다가오는 감동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강림이라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은혜의 사건의 제일의 목적은 평화의 도래라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전혀 신앙과는 상관이 없는 자일 것입니다.

혹여 비 신앙인이라도 평화의 도래를 거부한다는 것은 비 신앙인이 아니라 비정상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다가오는 영적 무게감이 있다는 점에서 부담이 됩니다.

어떤 점입니까?

누가복음 2:14절을 표준 새 번역본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무엇이 부담으로 다가옵니까?

저와 여러분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주시는 그 평화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어떤 자격입니까?

주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입니까?

즉 평화를 추구하고사모하는 자들입니까?

다시 극단주의를 버리고 평화를 추구하는 자들입니까?

지난 주중에 우리 교회 협력 선교사인 미국 OMS 파송 선교사인 김은진 목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통화 중에 김 목사가 이렇게 아픈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목사님저희 부부 지난 4주 동안 죽다가 살아났습니다저희 둘 다 코로나 19에 감염되었다가 기적처럼 회복되었습니다저는 열이 38남편 최 목사는 40도까지 치솟아 생사의 기로에 있었습니다미국의 의료시스템으로는 저희 같은 임시 체류자들은 감히 병원에는 갈 수 없는 이방인이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루에 세 번 타이레놀을 네 알씩 먹고 집에서 생으로 버티는 것이었습니다치료제가 아니라 그냥 먹고 운 좋으면 살 것이고그렇지 않으면 죽는 그런 것이었지만 달리 이 방법 말고는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생사를 주께 맡겼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아나 전화를 보고를 드립니다.”

통화 끝에 김 목사가 했던 말이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목사님대한민국 사람이 대한민국이 아닌 이방의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있다는 것이 얼마나 서글프고 아픈 일인지를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습니다내 사랑하는 대한민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를 다시 한 번 절감했습니다.”

미국은 대통령이 되면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을 하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얼마나 주님이 오셔서 주신 평화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지 우리는 이번에 대선에서 패배한 트럼프 행정부의 통치기간 동안 미국우선주의라는 극단의 패권주의를 통해 보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극단주의가 미국에만 있습니까?

코로나 19로 거의 지쳐가는 오늘우리는 내 사랑하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극단적 정치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통해 더 많이 지쳤습니다.

법무부 청사와 서초동 대검 청사 앞에 조화와 화환을 보면서 목사인 저는 옷을 찢고 싶은 참담함을 지난 시간동안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한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극단적인 패권의 시대입니다.

마태복음 8:28절을 교우들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 구절이 주는 폭발적인 은혜를 아십니까?

가다라 지방으로 사역의 동선을 옮기신 주님을 마태가 보고한 짧은 글입니다.

주께서 가다라로 가시기 전에 활동하던 사역하셨던 장소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 유대 땅이었습니다.

주님이 사역하셨던 땅은 동족의 땅이었고세속적인 주님의 인지도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시기였으니까 그곳에 머무는 것이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상행동을 보이셨습니다.

마태복음 8:18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제자들을 독려하여 가버나움을 떠나가자고 했던 건너편이 바로 가다라입니다.

이 가다라를 다른 지명 표시로 말할 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거라사라고도 합니다.

가다라(거라사)가 어디입니까?

이스라엘의 바이 일란 대학교에서 공부한 신학교 후배가 본인의 SNS에 글을 하나 올렸는데 본인에게 허락을 받고 퍼왔습니다.데가볼리(Decapolis)는 갈릴리 호수 동편요단강의 동편산지에 흩어져 있던 10개 주요 로마도시들의 연합 지역을 가리킨다본래 데가볼리 지방은 주전 4세기 이후 형성된 헬라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AD 74년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Pliny the Elder, Natural History 5.16)의 기록에서 데가볼리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 때 데가볼리는 로마의 속주처럼 하나의 동맹으로 이루어진 도시들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플리니의 데가볼리 동맹 도시들은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빌라델비아(Philadelphia), 라바나(Raphana), 히포스(Hippos), 디온(Dion), 펠라(Pella), 가나다(Canatha), 게라사(Gerasa), 가다라(Gadara), 다메섹(Damascus) 등이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발로 밟기도 꺼려하던 이방인들의 땅입니다.

주님이 이곳으로 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벌레만도 못한 땅으로 취급하던 이 땅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흉악하게 귀신들인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기를 종용하셨던 땅에 주님이 가셨습니다.

앞서 소개한 한 구절이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마 8:28절 1f)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극단을 넘어 평화의 길로 걸으셨던 분이십니다.

왜 이 길을 걸으셨습니까?

당신이 평화 그 자체이셨기 때문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탄절을 직전에 앞둔 대림절 4번째 주일입니다.

언젠가 김기석 목사가 쓴 글에서 다음 문장을 보았습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평화가 곧 길이다.”

심비에 새길 시금석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마치며 저는 김 목사의 글을 성경 한 구절에 적용하면서 이렇게 재해석하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6절에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이 길입니다.

100% 아멘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적용해도 될 것 같습니다.

평화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가 곧 평화입니다.

이 땅에 아기 예수께서 오시는 계절입니다.

아픔이 가득한 이 땅극단으로 갈라진 이 땅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길만이 진정한 평화임을 믿기에 주님께 집중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이렇게 믿고 동일하게 고백합니다.

본문 마지막 9절을 다 같이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며는/

사막이 꽃동산 되리/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어린이도 같이 뒹구는/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오리라/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며는/사막이 낙원 되리라/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장난쳐도 물지 않는/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