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ING-믿음2024-03-07 13:57
작성자 Level 10

2020년 12월 6일 주일 대림절 두 번째 주일 설교

 

제목: -ing 믿음

본문요한복음 21:1-6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더불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두 번째 주일이기도 합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청정도시라고 설레발을 떨던 때가 엊그제 같은 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흑색으로 변한 듯합니다.

거리는 적막강산이고인적은 온데 간 데 없어졌고가게들은 셔터를 내리기 십상이고문을 열었다고 하나 찾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를 않아 개점휴업 상태인 말 그대로 셧 다운 그 자체로 변한 잿빛 도시 같다는 생각이 지난 한 주간을 보내면서 느낀 소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울하기 그지없는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는 영적 분위기는 상실되었고앞으로 닥칠 위기들을 어떻게 하면 이겨나갈까를 걱정하는 교회의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기까지 합니다.

오늘 저는 지속하는 고린도후서 강해를 잠시 멈추고 제목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교우들과 작금의 상태에 대한 영적 진단을 내리고 함께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선포되는 메시지가 교우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본론)

 

본문 1절을 읽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오늘 본문 정황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을 배경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소는 다락방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0:19절이 이것을 증언해 줍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이 부활하신 당일에 제자들이 모여 있던 다락방으로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문을 굳게 닫아 놓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에게 샬롬을 주셨습니다.

이곳에는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부재중이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도마에게 부활의 확실성을 전해주시기 위해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후 8일 만에 또 다시 도마가 함께 있던 장소에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이 있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바로 이 일이 있은 그 다음의 시기가 본문 1절에 기록되어 있는 그 후에입니다.

헌데 주목할 것은 오늘 주님과 제자들이 만나는 세 번째의 장소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다락방이 아니라 디베랴였다는 점입니다.

디베랴가 어디입니까?

그림을 잠시 보겠습니다.


(그림 참조)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갈릴리는 대단히 큰 호수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세워진 마을들의 이름들이 각기 다릅니다.

갈릴리 호수 북쪽을 가버나움이라고 부르고동쪽은 그 유명한 거라사 지방이라고 호칭합니다.

남쪽은 벧세메스가 보입니다.

그리고 서쪽은 성경에서 게네사렛이라고도 부르는 긴네렛과 오늘 설교의 배경이 되는 디베랴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의 고향은 가버나움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디베랴가 본문의 배경으로 등장한 것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의도적인 기록으로 보입니다.

어떤 의도입니까?

베드로의 세속화에 대한 고발입니다.

디베랴가 어떤 곳이었습니까?

문자적으로 설명 드린다면 티베리우스의 도시라는 말입니다.

이곳을 통치하던 분봉왕 헤롯 안티바스는 자신의 권력과 입지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당시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에게 이 도시를 바친다는 의미로 도시를 건설했고그 도시의 이름을 티베랴로 개명할 정도의 정치적인 의도가 짙게 깔린 도시였습니다.

여유롭고 한적했으며고즈넉한 어촌이 대단히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도시로 변질된 셈입니다.

11년 전 성지순례 때 이곳을 버스로 이동했는데 지금도 디베랴는 도시의 색깔이 그대로 남아 있는 관광도시의 변모를 갖추고 있음을 보면서 왜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낙향 거점을 디베랴라고 저자가 썼는지는 깊이 생각해본 경험이 생생합니다.

바로 이곳으로 베드로는 낙향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름이 거론된 5명의 제자와 익명으로 보고된 2명의 제자 총 7명이 함께 마음을 모았던 것은 고기잡이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하는 관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보고하고 있는 베드로를 부르셨던 첫 번째의 calling 시에 베드로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누가는 이렇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5:10절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첫 부르심 때그와 함께 했던 동역자는 세배대의 아들들인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즉 3명의 사람들이 고기잡이에 연대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헌데 오늘 본문 즉 베드로에게 주어진 두 번째 부르심을 소개하는 요한복음 21장에는 세 명의 동역자가 아닌 7명의 무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무엇을 요한복음의 저자가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요?

세속의 도시에서 세속화된 베드로의 세속적 동역자가 그만큼 늘었음을 알리고 싶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주님을 배신하고 영적으로 무너진 상태임에 분명했지만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이나 목도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원하셨던 사람을 낚는 어부의 미션을 포기하고 다시 세속의 고기를 잡는 어부로 후퇴한 이유가 세속적인 세력이 확대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하는 요한복음 저자의 기막힌 필채를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열심히 고기를 잡았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만 잡지 못한 것이 아니라 7명의 연대에도 불구하고 단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본문 3절 하반절부터 4절입니다.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이 구절을 해석한 글 중에서 제가 참 감동적으로 받아들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형으로 서 계시고제자들은 현재형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그러나 헬라어 원문의 시제는 이와 다르다원문에는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과거형으로 서 계시고제자들은 그 예수님을 과거완료형으로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재철사명자반홍성사, P,130.)

이렇게 주석한 이 목사는 다음과 같이 메시지를 적어 놓았습니다.

“2000년 전 주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 현재형으로 서 계셨다그러나 불행히도 제자들은 이미 주님을 과거형으로 망각하고 있었다욕망의 바다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님은 까마득히 잊혀진 과거의 존재일 뿐더 이상 현재의 주님이 아니셨다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주님이 현재형으로 임해 계시는데 어찌 제자들이 그 주님을 과거형으로 잊을 수 있단 말인가!”(이재철같은 책,P,131.) 이제 오늘 설교의 감동의 압권 부분인 본문 5-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잠시 감정이입을 통해 황송하지만 내가 본문의 주님이라고 가정해 보십시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실 것 같습니까?

괘씸 그 자체이지 않겠습니까?

부활했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증명하셨고평강을 주셨던 주님의 원 뜻과 바라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주께서 제자들에게 수난고지를 하시며 제자들에게 주셨던 내용을 추적해 보십시다.

마가복음 14:28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대단히 명쾌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살아나서 갈릴리로 갈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은 만사를 제쳐 놓고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그곳은 주님이 공생애를 감당하셨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부활 이후에도 나는 갈릴리 지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것이고그 나라의 비밀을 알릴 것이라는 재다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을까요?

부활절 새벽에 제일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게 수종들던 천사가 대단히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전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7절을 주목하십시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무슨 말입니까?

갈릴리로 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주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셨던 소름끼치는 메시지가 디베랴가 아닌 갈릴리라는 점입니다.

허나 제자들은 주님의 이런 분명한 영적 메시지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경홀히 여겼습니다.

아니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주님이 원하셨던 영적 장소인 갈릴리가 아닌 세속적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디베랴로 갔다고 그 공범의 자리에는 요한도 있었음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사건이 있은 지 약 70년 뒤에 이 안타까움을 요한을 따르던 요한공동체의 제자들이 단 한 구절도 미화하지 않고 요한복음 21장에 본인의 선생은 물론 제자들의 실패담을 그대로 보고하고 있다는 점은 전율한 교훈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동시에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 제천은 지금 대단히 힘든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픔의 시기에 우리 세인지체들이 심비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하는 교훈을 찾아내보고자 합니다.

 

※ 지금도 여전히 나를 위해 일하시는 주님을 현재형으로 심비에 포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소스라치게 놀라는 본문의 대목은 이재철 목사께서 지적한 바로 그 대목입니다.

제자들이 다락방 문을 굳게 닫고 있을 정도로 두려워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따르던 주군의 사망으로 인해 급격히 위축된 본인들의 입지 때문이 아닙니까?

혹시나 모를 예수 잔당들을 제거하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가해질 위협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위기를 단번에 역전시킬 일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과 임재였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씩이라 RE-CONFIRM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다시 일어서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명령 겸 당부하셨던 갈릴리로 돌아가서 다시 복음을 붙들고 복음을 증거하며 사역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했습니다.

헌데 제자들의 사정은 갈릴 리가 아닌 디베랴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속의 낚싯줄을 다시 드리우는 것이 그들이 선택한 전부였습니다.

왜 제자들은 이런 악수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까?지금도 여전히 자신들을 위하시며 일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현재형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잊혀진 과거의 사람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때 우리들에게 좋은 말씀을 전해 준 선생에 지나지 않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2주 전에 차준희 교수가 집필한 책을 제게 보내주었습니다.

말 하지 않아도 서평을 써서 보내라는 것이 책값이라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친구의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절의 말씀입니다.

차 교수는 이 글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학자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림무드는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주목할 것은 이사야 8:16절에서는 전혀 다른 단어로 번역했음을 알려줍니다.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제자입니다.

이렇게 소개한 친구가 의미 있는 글을 본인의 책에 남겼습니다.

여기서 제자라는 단어가 림무드입니다우리는 학자라고 하면 가르치는 것만 생각하지,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8:16절에서 제자라고 번역했으니 50:4절에서도 제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차준희, “6개의 키워드로 읽는 이사야서”, 성서유니온, 2020,p,140.)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제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제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학자를 제자 즉 공부하는 사람배우는 사람으로 주석한 친구가 결정타를 하나 남깁니다.

본인 배운 것만 가지고 평생을 우려먹어서는 안 됩니다이를 곰탕신앙이라고 합니다. ‘아침마나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라는 말에 매일매일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공급받아야 합니다유통기한이 지난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신선한 양식을 깨우침으로 받고 그것을 공급해야 합니다.”(위의 책,p,141.)

저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에 주시는 말씀의 레마를 지금도 여전히 나를 위해 일하시는 주님을 현재형으로 심비에 포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자.’고 역설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코로나 19의 확진자가 100명을 넘어선 위기의 이 제천이라는 갈릴리 현장에서 여전히 서 계셔서 우리들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주군은 과거에 일하셨던 주님으로만 계시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주님은 디베랴라는 세속의 바닷가에서 계속 헛발질하던 제자들의 모습과 우리들이 닮았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헛발질을 하던 현장에 있었던 요한을 따르던 요한공동체의 따르미들이 이 일이 있은 후 약 70년 뒤에 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자기들의 스승의 그 헛발질을 숨기지 않고 기록했다는 것은 스승의 전철을 밟지 않고 주군의 일하심이 여전히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음을 고백한 쾌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뉴욕 리디머 교회의 담임목사인 팀 켈러가 쓴 죽음에 관하여에 소개한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가 필라델피아 제 12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겨우 삼십대 후반이던 그의 아내가 열 두 살도 안 된 네 자녀를 남긴 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그가 자녀들과 함께 차를 몰아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데 대형 트럭이 안쪽 차선으로 추월을 하면서 트럭의 그림자가 그의 차를 드리웠다그 순간 반하우스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은 트럭과 트럭의 그림자 중 어느 하나에 치여야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니?”

당연히 그림자죠.”

11살 난 아들의 답변에 반하우스는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그게 지금 엄마에게 벌어진 일이야… 죽음 그 자체에 예수님이 이미 치이셨기에 엄마는 죽음의 그림자에게 치였을 뿐이야” (팀 켈러죽음에 관하여두란노, 2020, pp,41-42.)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반하우스는 아내의 죽음마저도 현재 진행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믿었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힘드십니까?

당연한 말을 뭐라 질문하느냐고 반문하시는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무식한 목사라고 저를 공격하시겠지만 이렇게 직설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코로나 19의 상황에도 주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ing 로 믿는 자가 신앙인입니다.

일하시기 위해 주님은 오십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이것을 믿고 나아가는 자는 터널을 통과할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금관예수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주여 이제는 여기에

주여 이제는 여기에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