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1일 월요일 성서일과 묵상 암-하레쯔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19:65-72, 레위기 4:27-31; 5:14-16, 베드로전서 2:11-17, 시편 121편 출애굽기 12:14-28 꽃물 (말씀 새기기) 레위기 4:27-28 만일 평민의 한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예물로 삼아 마중물 (말씀 묵상) 평민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암-하레쯔’를 M.A 과정 석사 논문을 쓸 때 많이 인용했다. 논문 제목이 『농촌현실과 농촌교회의 상관관계연구』라는 연구였기에 농민들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접근 과정에서 가장 많이 전하게 된 단어가 바로 ‘땅의 사람들’이었다. 대체적으로 이들은 힘이 있는 자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피해자들이었다. 신약성경을 배경으로 이야기 하자면 갈릴리 백성들이 그 대표성을 갖고 있다. 오늘 성서일과를 기초로 암-하레쯔을 대면하게 되었다. 평민의 한 사람, 즉 암-하레쯔 중, 누군가가 부지(不知) 중에 야훼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 있거든 그가 범한 죄를 깨우치라고 권한다. 부지(不知) 라는 단어를 유진 피터슨은 문자를 풀었다. “뜻하지 않게” 나는 이렇게 접근했다. 암-하레쯔 들 중에 빈곤과 가난과 핍박과 박해로 인해 삶이 찌들려 있는 저들이었기에 그들이 살기 위해, 버티기 위해 행했던 여러 상황의 행위들이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 있을 수 있었다고 본다. 문제는 이 내용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황을 깨우쳐 주는 이의 유무는 대단히 중요한데 이 일을 감당해 주는 자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 이유는 ‘암-하레쯔’들이 무시당했기 때문이리라. 저들에게 율법에 저촉되는 일을 깨우쳐 준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가르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깨우침의 일은 관심이라는 단어에 더 가깝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대상들,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여김을 당하던 소외된 이들, 심지어 버려짐을 당한 자들의 상징어인 ‘암-하레쯔’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는 적극적 관심이 깨우쳐주는 일이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차별하지 않고 보듬는 스승이 필요하다. 교사가 아닌, 스승이 필요하다. 이런 스승의 역할을 해 준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셨는데, 그 예수가 경멸당하고 있는 시대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관심을 갖고 돌보는 나와 너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두레박 (질문) 나는 무관심한 자인가? 관심을 가는 자인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이 땅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암-하레쯔’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가 되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오늘 내가 찾아 관심을 보여야 할 암-하레쯔가 누구인지 살피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학생들의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에 1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사의 인권이 무시되는 것을 전제한 학생들의 인권 보장은 무시무시한 폭거이자 폭력입니다. 힘든 일이기는 하겠지만 둘의 관계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이 땅이 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