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박득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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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포이에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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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08-23 08:4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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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처음 만난 것은 바른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생각하는 목회자들의 세미나에서였다. 십일조 논쟁이 지상파 100분 토론의 주제가 되어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을 때 올바른 한국교회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정책 세미나로 기억된다. 교회 개혁 실천 연대를 섬기고 있던 저자는 강사로 나서서 이렇게 표현했다. ‘오늘날의 교회의 참담함은 상식도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라는 참담함’이라고 날선 비평했다. 그에 대한 기억은 그래서 서평자에게 아주 나이브하게 각인되어 있는 편인데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냉철한 교회 개혁주의자로 말이다. 이미 그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던 바 그가 쓴 ‘돈에서 해방된 교회’ 라는 책을 읽기 전부터 이 책의 흐름이 어떻게 흐를 것인가에 대한 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허나 그의 책을 읽어가면서 저자가 얼마나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이 농축되어 있는가를 느끼면서 한(恨))과 사랑은 정비례함을 더 놀랍게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책을 시작하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본회퍼와 자크 엘륄이다. “값싼 은혜에 따르면 부르주아의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꼭 붙잡고 예전처럼 그대로 살아갈 수 없다. 게다가 은혜가 엄호해 주리라는 확신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바로 이런 종류의 은혜가 미치는 영향력에 힘입어 세상은 소위 ‘기독교적’이 되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기독교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할 정도로 세속화돼 버렸다. 그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존경받는 부르주아 신분 삶 사이에 존재하전 대립 관계는 끝나버렸다.”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 중에서) 교회가 세상과 벌인 한 판에서 보기 좋게 당한 KO패 선언이다. 교회가 가져야 할 세상과의 대립적인 긴장관계가 교회가 세상과 타협함으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교회 자존감의 상실을 본회퍼가 경고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자크 엘륄의 기막힌 촌철살인도 인용한다. “교회는 자본주의 체계와 더불어 부르주아가 되고 도시가 되고 돈 있는 곳이 되었으며 (중략) 기독교는 계속되는 문화들이 제멋대로 아무거나 채우는 빈 병이 된다.” (자크 엘륄의 뒤틀려진 기독교 중에서) 어떤가? 치욕스러워 떨리는가? 아니면 심한 거부감이 드는가? 서평자는 전자이다. 금년 초 찰스 링마가 쓴 ‘행동하는 신앙인을 위한 자크 엘륄 묵상집’(죠이 선교회간)을 읽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런 갈파를 했다. “가난한 사람의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 교회가 오히려 권세를 가진 자들의 버팀목 노릇을 했다.” 엘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죄를 지은 교회가 대각성 운동을 통하여 엄청난 변혁을 일으킨 것처럼 해석되는 데 가난한 자에게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고. 우리는 지난 주간 교황의 방한을 목도했다. 그가 방한 한 뒤, 보수화된 가톨릭에 대한 후폭풍이 예사롭지 않음을 공중파의 일부 방송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교회가 가난해져야 한다는 교황의 언급”, “교회는 부자와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에 대한 후폭풍 말이다. 가톨릭은 그렇다 치자. 우리 개신교회의 상황은 어떤가? 박득훈 목사는 본인의 책에서 부자들을 위한 교회, 맘몬에 함몰된 교회, 번영신학을 올바른 신학으로 뒤틀어 버린 한국의 대형교회, 자본주의의 거대한 공룡과 맞서는 교회가 아닌 그 공룡에 무력하게 무릎 꿇은 교회임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자본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인 맘몬 숭배를 교회가 더 용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자행하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주류 자본주의의 아이콘인 ‘경제적 인간’을 만들기 위해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과 경기 순환으로 인해 파급되고 가중되는 혹독성을 가난한 자에게 부담시키는 것을 교회가 용인했다고 에둘러 말한다. 예레미야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사람이 하나님으로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다.(렘 22:16)라고 가르쳐 주고 있지만 교회는 이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지적한다. 왜 교회마저 자본주의에 대하여 이렇게 호의적인가? 왜 경계해야 할 자본주의에 대하여 허물어졌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저자는 파리 제 10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허경회 박사의 글로 답하고 있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돈의 신, 맘몬은 예외다. 우리 현대인들에게 그는 유일하게 현재하는 신이다. 우리들은 ‘이성을 잃은 경제 이성’으로 유일하게 현재하는 신인 맘몬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 재현하는 거룩함 맘몬의 성도들이다. 또한 우리는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는 다른 우리들에게 등을 돌리며 나의 부를 간구하고 있고 맘몬은 우리에게 기꺼이 샤일록의 냉혹한 풍요를 하사하고 있다.” 왜 이 글을 저자가 한국교회의 현 자화상이자 현실의 답으로 제시하고 있는가? 한국교회에 깊이 파고들어 있는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는 자본주의 맘몬의 실체를 발견해야 함을 역설하기 위함이요, 동시에 치유 불능의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로 하여금 이 맘몬의 유혹에서 벗어나 건강함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임을 밝힌다. 저자는 한국교회 안에 너무 깊숙이 자본주의라는 맘몬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역설한다. 더불어 교회는 결코 자본주의 정신이 자리를 잡으면 안 되는 이 땅의 유일한 처소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가장 한 복판에 그 정신이 자리를 잡고 있어 이미 교회의 영향력은 구제불능의 지경에 이르렀고 상실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한국이라는 사회의 근현대적인 특수 상황 즉 일제 억압, 분단, 전쟁, 혁명, 군사독재 등등의 숨 가쁜 역사 속에서 대중들이 가난과 억압을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이 교회의 종말론적인 교리 그리고 번영신학 신드롬이 기막히게 맞아 떨어진 지구상에 유일한 나라이기에 교회가 이렇게 비신학적인 방향성으로 그리고 맘몬 숭배라는 일탈로 가는 데 최적의 조건을 형성했다고 피력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기복신앙이 형성되었고, 축복의 복음이 대세를 이루었고, 야베스의 기도와 깨끗한 부자론에 열광하며 대리 만족하는 기형의 극단을 달려왔음을 저자는 신랄하게 비평한다. 이런 이유로 당연한 수순이지만 고난의 과정이 생략된 긍정의 힘은 한국교회를 또 다른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이제는 가난한 자가 저주 받은 자요,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는 실패한 목사요, 십일조를 하지 않으며 암에 걸리는 것이 복음이 되어 버린 소위 말해 막가는 교회가 되고 말았음을 저자는 포괄적으로 지적한다. 저자는 이런 한국교회의 비참한 실정을 본회퍼 당시 나치즘에 굴복한 독일 주류 교회인 루터교회를 비난하는 본회퍼의 글로 가늠한다. “우리 루터 교회들은 마치 독수리처럼 값싼 은혜라는 시체 앞에 모여 들었다. 그러고는 거기서 독을 들이마셨다. 그 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저자는 과감하게 이렇게 역설한다. “한국교회는 달콤한 값싼 은혜의 유혹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값비싼 은혜로 돌아가야 한다.” 저자는 책의 가장 중요한 테제를 교회가 맘몬을 이기는 방법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는 대목이다. 서평자는 이 대목에서 많이 공감했다. 이유는 진보적인 성향이 농후한 저자가 교회가 맘몬의 우상을 이기는 방법을 사회과학적인 방법이나 아주 극단화된 진보적인 신학의 펼침으로 논하려 하지 않고 영적인 부분에서 제일 먼저 원인 분석과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그것은 전인적 구원관에 대한 접근이었다.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맘몬이 영적인 것임을 인지한 저자가 제일 먼저 영적인 스펙트럼으로 맘몬 신 대적의 이론을 전개하였다는 점과 편향되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저자는 역설한다. 1) 부가 억압과 착취의 결과로 축적되며 공동체 전체보다 특정 개인과 가족, 집단에 의해서 집중적으로 향유될 때 부 즉 돈은 우상이 된다는 것을 항상 경계하여야 한다. 2) 개인구원과 사회 구원의 양극단을 피할 때만 부가 한 쪽으로 집중되는 것을 막는다. 즉 개인구원을 강조하려고 사회 구원을 무력화시키는 것, 반대로 사회 구원만을 강조하여 개인 구원을 외면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접할 때는 죄를 총체적으로 깨달아야 하며 개인적인 죄와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구조적인 죄를 모두 발견하고 회개해야 한다. 3) 이것을 전제로 성경 신학은 억압이 가난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임을 제시하고 증명해 줌으로 교회가 이 틀을 극복하고 싸워야 한다. 종합하면 저자의 강조점은 이것이다. 전인적인 구원을 모르고는 절대로 맘몬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전인적인 구원의 길을 기본과 토대로 이제는 맘몬과 교회는 싸워야 함을 다음과 같이 논거 한다. ① 신자들은 자신의 경건한 언어 사용에 스스로 속아 맘몬에 무기력해진 굴레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② 자신이 맘몬에 포로 되어 있는 이유가 율법적인 종교성에 속았기 때문임을 인지해야 한다. ③ 미슈파트(정의)와 츠다카(공의)의 회복이다. 성경에서 미슈파트가 사용될 때는 항상 거의 어김없이 당시 대표적인 사회 약자인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등장함을 소개한다. 즉 교회가 맘몬의 우상에서 이기려면 과부, 고아, 객과 같았던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초점을 잃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츠다카의 실천이다. 츠다카는 ‘바른 관계의 삶’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에 따라 삶에서 맺어지는 모든 관계들을 바르게 하는 데 헌신하는 것이 츠다카라고 주석한 알렉 모티어의 정의는 그래서 합당하다. 그리스도인들은 경제 활동을 할 때 이 정체성을 결코 잊지 않고 살아갈 때 맘몬의 신에게서 이길 수 있다. 저자는 승리주의를 번영신학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한다. 도리어 승리주의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궁극적인 승리를 왜곡한 정신과 삶의 방식이기에 그것을 경계해야 맘몬의 공격에서 이길 수 있음을 선언한다. 진정한 성공이란 세상적인 강함이나 약함과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약함을 아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라고. 극단을 피하는 것이 타협이 아니라 지혜라고 어떤 선배가 충고해 준 적이 있다. 근래 들어 목회가 해가 가면 갈수록 더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다. 중립을 지키는 것이 목회에서는 이어령비어령이기 때문이다. 어제 구독하는 경향신문의 웹툰 만화 ‘장도리’ 에 4단 컷 만화를 보면서 더 더욱 앞으로 한국교회 목사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화는 이렇게 그려졌다. 1단 :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고통 받고 있는 자가 있는 낮은 곳을 향하여 사다리를 내려오는 프란치스코 교황, 2단-3단 그림: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그림과 더불어 우리도 그렇다는 것을 그린다. 그런데 그 다음 그림의 내용이 이렇다. 작은 교회 목사는 실패한 목사, 십일조 안 하면 암 걸려, 박원순 뽑은 서울 시민은 다 돌았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불국사에나 가지 왜 배타고...... 압권은 4단 그림이다. 사다리 타고 내려오는 목사 질 낮은 곳으로 장도리를 그리는 화백이 진보적인 성향의 화백이기에 선입견을 갖고 지지하지 않더라도 나는 개인적으로 그랬다. “어디 숨을 곳이 없을까?” 분명히 이것을 나는 안다. 진도 팽목 항에 남아 있는 10명의 유족들을 위해 아직도 텐트를 걷지 않고 묵묵히 끝까지 봉사하고 있는 봉사단체가 기독교 봉사단체임을. 이 땅에 아직도 그늘진 곳에서 그래도 그들의 아픔을 달래주고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있는 공동체가 기독교임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주님의 그 사랑에 눈물겨워 생계적인 부분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동역자들이 훨씬 더 많음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같은 목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미슈파트와 츠다카의 실천적 삶을 살아가는 몸부림을 더 했으면 한다. 그것은 추락된 조국교회가 전시 효과적인 극적인 반전을 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이 예수께서 살아가셨던 길이기에 말이다. 개인적인 멘토이신 100주년 기념교회 이재철 목사께서 쓰신 글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다. 교황 이노센트 3세와 스콜라신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마침 유럽 각 교회로부터 속속 도착하는 헌금 주머니들을 보며 교황이 말했다. “보시오, 아퀴나스 경.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에 금 은 보화가 넘쳐나고 있소.” 그러자 아퀴나스가 교황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황 성하, 그러나 그 대신 교회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걸인을 일으켜 세우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과 권능은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섬기고 있는 우리 교회, 그리고 조국교회가 은과 금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되찾아올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위해 두 손 모아 본다. 사족 목회를 하면서 무척이나 헷갈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사람은 변화될 수 있는 것일까? 이다. 그러나 요즈음 더 헷갈리는 것이 있다. “교회는 교회될 수 있는가?” 이다. 2014년 8월의 첫 날, 다시 되물어 본다. 교회는 교회될 수 있을까? 목회의 연수가 더하면 더할수록 송구스럽지만 헷갈림이 더 심해진다. 믿음 없는 목사의 믿음 없는 고백 같아 나도 부끄럽다. 그렇지만 더 솔직한 마음을 토로한다면 자신이 없다. 나와 돈과 명예와 권력과 기득권에서 빠져 나오지 않기를 목숨 걸고 있는 작금의 교회와 나 자아의 목적 상실 때문이리라. 그래서 더 간절히 하나님께 연약을 아뢰고 힘을 구한다. 아들아, 배우자. 지금 얼마나 교회의 아픔이 치열한지를. 그래서 아들이 목회하는 시대에는 남은 자 되어 승리하기를 에비가 기대한다. 2014년 8월 1일 오전 11시 25분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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