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월터 브루그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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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cl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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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03-18 14:1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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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브루그만의 ‘하나님 나라의 권력 투쟁’ 을 읽고 (CLC, 2013년 작품) “다윗 왕조의 등극에 얽힌 신명기 역사가의 탁월한 인간군(人間群)의 심리 터치와 그 가운데에서 한 사람에게 집중하신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즐겼다. 왜 다윗인가? 질문의 질문이 이어질 만한 이슈이다. 저자는 외치는 듯했다. 다윗은 홀로 다윗으로서는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삶의 한 복판에서 간섭하셨기에 다윗이었다고.” 책 뒤에 기록한 독서 소회이다. 월터 브루그만은 사무엘상 17장에서 사무엘하 7장으로 이어지는 다윗 왕조의 등극에 관한 서사(번역자의 고유 표현)를 박진감이 있게 펼친다. 특히 눈 여겨 볼 대목은 다윗도 다윗이지만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등장인물들에 대한 내레이션이다. 이유는 저자에 의해 펼쳐지는 그들의 삶의 정황들을 이해할 때만 다윗 왕조의 등장을 드라마틱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평자가 이 대목을 주목한 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작금의 시대 역시 결국은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웅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삶에서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브루그만은 책에서 다윗 왕조의 등장을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성품들을 조명한다. 그가 그렇게 시도한 이유는 그들의 성품 조명은 곧 다윗이 대권을 차지하는 연결 고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윗을 둘러싼 권력의 이합집산과 그로 인하여 위기를 경험하여 권력의 한 복판에서 멀어질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 있었던 다윗을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 철저하게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다윗 왕조의 등극이라는 하나님의 완벽한 주권적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요소가 등장인물 안에 있었다는 스펙트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의 역자는 서문에서 책을 읽기에 앞서 중요한 논지를 하나 제시한다. “책 제목을 하나님 나라의 권력 투쟁이라고 붙인 것은 대권을 향한 사울과 다윗의 권력 투쟁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통시적으로 발휘되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를 공시적으로 일구어 가는 특정 시기의 권력 투쟁의 요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독서를 해 나아가면서 ‘다윗 왕조의 창출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그 시대의 조연들인 등장인물’이라는 초점을 어느 경우에도 잃지 않기를 바라는 역자의 보너스를 친절하게 기록하고 있다. 서평자는 브루그만의 긴장감을 주는 글을 접하면서 학창 시절 모범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역자의 매뉴얼을 참고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독서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천착했던 부분이 바로 저자가 사무엘상하를 통해 의도적으로 몰고 가려던 다윗 왕조의 등극을 해석함으로 인해 주어진 목회적 과제였다. 신학자들은 아마도 브루그만의 구약적 기술 방법론이나 혹은 추천사에 류호준 박사가 지적한 대로 역사비평을 넘어선 수사비평적 본문 해석에 더욱 관심을 갖고 접근했을 터이지만 현직에서 치열하게 목양의 현장과 맞닥뜨리고 있는 목사인 나는 독서 내내 물었던 것이 이것이었다. “what did(does) it means?" 이 질문을 던지면서 결론적으로 조명 받은 교훈은 하나님이 역사의 현장에서 간섭하신다는 성찰이었다. 자, 이제 한 번 저자가 시도하는 본문 해석에 접근해 보자. 사무엘상 18장에 기록된 사울가(家)의 긴장적인 내레이션을 저자는 책에서 줄곧 강조하는 사회학(권력), 신학적 조명(섭리), 그리고 문학적(성품)인 차원에서 기술한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다윗은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사랑받고 또 사랑 받는다. 요나단, 메랍, 미갈 그리고 만만(萬萬)이요 라고 외친 여인들이 그 증인들이다. 이것은 그의 성품이었다. 그는 어떤 잘못도 행할 수 없는 존재였다. 첨가하여 다윗에게는 그의 매혹적인 성품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회학적인 차원의 실제인 권력의 실재가 그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혼자 싸우지 않는다. 그의 주변에는 군수물자, 조직, 기술공학, 여론 등의 참한 실재들이 항상 집결되어 있다. 더불어 권력과 성품에 이어 다윗에게는 한 가지 더 신학적인 차원의 일관된 주장이 녹아 있음을 서사는 증언한다. 야웨가 항상 다윗 그와 함께 하셨다는 섭리의 명확한 표현이다. 결국 사무엘상 18장의 내레이션은 사랑받는 다윗이라는 인격, 성공하는 권력의 실재들,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셨다는 섭리의 현존을 기술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강하게 기록된 사무엘상 18장의 서사들이 목회적 현장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는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다음의 세 가지로 도전을 준다. ① 우리의 서사적 자아 저자는 이 대목에 있어서 목회적 돌봄이라는 목양적인 한 파트가 그 동안 심리학의 지식을 이용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음을 고발한다. 그러나 목회적 돌봄은 심리학과 같은 사회과학적인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분야가 아니라 도리어 인문학에 속한다고 역설한다. 저자의 이와 같은 지적이 주목할 만한 이유는 목회적 돌봄이 사회학적 심리학적 분석에 의해 단순히 평가하는 것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다른 이야기에 대하여 은폐된 일관성을 주시할 때 우리들의 서사적인 자아가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제할 때 사무엘상 18장에서 목양의 관점에서 캐치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점은 다윗의 인생 역전이 단순히 성공, 사랑 그 이상의 것이었음을 찾아내는 것이며 또한 야웨 하나님께서 그와 전적으로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발췌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② 필연성을 넘어서는 서사적 결론 특히 이 부분은 도전이 된다. 저자는 사무엘상 18장의 기록이 요나단, 미갈, 메랍, 그리고 사울의 조그마한 행동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사무엘상 18장만은 바라보는 독법이 그 장에서만 한정되고 있을 때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사무엘상 18장의 이야기이기는 그 텍스트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참되고 신선하게 그 장의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자동적으로 그 안에 나오지 않는 것을 크게 보고 자꾸 읽어야 하는 독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텍스트로 주어진 내용의 등장인물에 대한 플롯에 주의하고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메시지에 대한 해석적 도약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경우에만 필연성을 넘어서는 서사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사무엘상 18장의 등장인물들을 통한 예술적 해석(저자의 고유 표현)이라는 독법을 거칠 때 비로소 ‘야웨께서 그와 함께 계셨다’ 는 평결이 주어지고 또 그 분이야 말로 출애굽에서부터 여호수아에 이르기까지 현존해 오시는 분임이 밝혀짐으로서 이 위대한 이야기의 하나님이 ‘나의 이야기의 하나님’으로 접합하는 접족체가 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이해는 정말로 탁월하게 다가왔다. ③ 항상 우리를 넘어서 다시 말해지는 우리의 이야기 사무엘상 18장의 서사는 나의 이야기이면서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에 관한 것이 아니기도 하다. 이러한 정의는 목회적인 돌봄이라는 현장에서의 접근을 유용하게 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진보 때문이다. 다윗의 세계에는 사랑이 가능하고 증오가 광포한 세계, 성공이 마구 빈발하고 실패가 있는 세계, 야웨께서 변혁적 방식으로 현존하는 세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다윗의 세계는 등장인물이라는 사람들로 득실댄다. 이러한 일련의 난장들은 다윗의 이야기이기에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곧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이야기이기도 한다. 적어도 이것을 전제하면서 세 가지의 관점에서 본문과 나의 목회적 돌봄이라는 현장과 상호관계 하여 연결시키는 것이 오늘의 목회 현장에서 매우 유익함은 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① 삶의 재 이미지화를 위한 맥락으로서 서사적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② 모든 부분을 총괄하는 해석된 전체성의 의미로 둘 다를 접근시켜야 한다. ③ 우리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로 설명되는 것을 현실성 있게 적용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해석적인 조명에 노력을 기한다면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적 돌봄이 우리의 주목할 만한 현장에서도 목회적 돌봄으로 적용됨으로 새로운 세계를 제공 받게 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상의 해석학적 관찰을 목회적 현장에 도입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 저자는 책의 제 3장에서 다윗이 왕정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전 장에서 해석된 야웨께서 다윗의 전 등극과정에 간섭하시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저자가 목도한 내용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까지 수없이 많이 직면한 폭력을 통한 정권 창출이라는 유혹을 피하고 살인의 죄를 거부하였다는 내레이션이다. 저자가 이 대목에서 텍스트로 잡은 부분이 사무엘상 24-26장 그리고 사무엘하 1-4장이다. 전자의 텍스트에서 사울은 정치적 대적자인 다윗을 집요하게 살해하는 계략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다윗은 사울보다는 더 의로운 사람임을 역사가는 부각시킨다. 치열한 권력 다툼으로 보이는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다윗은 폭력을 기초로 한 왕권 획득의 승리자가 아님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상 26장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이 밤중에 사울의 진영으로 들어간 에피소드 역시 충분히 상황은 아비새의 의도처럼 사울을 죽이고 새로운 왕권을 수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살인죄를 거부하는 장면을 다시 한 번 연출한다. 다윗의 의식 속에 역사의 주관자가 야웨이심을 인정하고 밀어붙이기식의 폭력을 거부하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 챕터에서의 압권은 사무엘하 1-4장에 기록된 마지막 세 번째 플롯이다. 정치적 대적자인 사울의 죽음을 시작으로 다윗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로 유익이 되는 등장인물들의 죽음이 그려지고 있다. 사울의 오른팔이었던 아브넬의 죽음, 동시에 사울의 마지막 상속자인 이스보셋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윗은 그들의 죽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결백함을 서사는 속도감 있게 진행해간다. 다윗의 정적들의 죽음이 다윗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살해의 진범들이 있음을 밝힘으로 역시 폭력과 물리력을 동원한 권력 쟁취가 아니었음을 서사는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더불어 이 세 사람의 죽음의 과정을 통해 오히려 다윗으로 하여금 과거보다 정치적으로 더 강해지고 신학적으로는 그를 더욱 변호하였음을 저자는 설명한다. 이러한 세밀한 터치로 그려진 역사가의 진술들을 통해 오직 브루그만만의 매력인 목회적 관련성이라는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 무엇인가? ① 서사는 폭력과 유혹이 난무하는 가운데에서도 다윗을 부상시키면서 그의 도덕적인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술에서 서평자가 생략했지만 아비가일에 관하여는 ‘양심의 가책’을 통한 다윗의 도덕성을 또 하나 사울과의 관계에서는 ‘의와 신실’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는 점에서 다윗의 이러한 증거들을 볼 수 있다. ② 부재하시는 분(the Absent One) 에 대한 주목으로 초대하고 있는 점이다. 다시 말해 지금 현장에 있지 않은 것 같지만 항상 결정권을 쥐고 다윗과 함께 하시는 부재하시는 분의 이름으로 통치하시는 대목으로 우리들을 초청한다. 이것은 목양의 현장에서 주목해야 하는 도전이다. 결국 역사의 서사는 다윗의 권력 쟁취에 대한 정당화, 무죄방면, 그리고 그에 대한 적극적인 변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들이 이 점에 대하여 심사숙고해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는 우리의 삶이 다윗과 같다는 점 때문이다. 다윗을 인도하였던 그 실재가 또 우리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은 도전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왕권 절대주의의 요구에서 중요한 화두를 하나 던진다. 다윗의 권력은 다윗의 의도대로 된 작품이 결코 아니라 다윗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루신 작품이라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주권이다. 그 하나님의 주권적 승리는 다윗의 시대에 나타난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의 조명을 통하여 권력, 섭리, 그리고 성품이라는 세 요인을 인지한 조화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승리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구약학적인 체계로 독자들인 우리는 사무엘서의 기법이 신명기 역사에 근거하여 저술 편집되었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가나안 정착 이후 신정정치의 체계에서 왕정 정치의 체계로 옮겨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지켜야할 신학적 사관이 신명기의 영적인 지렛대인 토라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었다. 시대는 이것을 강력하게 요청했지만 소위 사사 시대의 과도기적인 시대는 물론 1대 왕정인 사울의 시기에도 토라 신앙은 무참히 무너져 내린 형극이었다. 이런 의미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이미 급속한 속도로 가나안화 되었고 이런 시대적인 암울함 속에서 이스라엘을 이끌 2대 통치자는 그의 부분적 완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셨던 왕정의 정통성과 재확인이라는 절실했던 시대적 상황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권력 투쟁으로 보이는 사울과 다윗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술함에 있어서 다윗 왕조의 등극의 타당성을 확보한 것이 필요했다. 이런 신학적인 역사적 전제를 위해 역대기 역사의 작품들인 역대상하와 에스라,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왕조들의 실수나 실패를 과감히 제거했다. 이에 반하여 저자가 연구한 본 책은 앞서 전술한 신명기 신학의 역사서를 채택했다. 그렇다면 브루그만 역시 본인의 책을 마땅히 신명기 신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며 조명해야 상식적인 포석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서평자는 브루그만의 본 책을 읽으면서 도리어 저자가 다윗왕조의 등극을 신명기 신학적인 작품의 궤도가 아닌 역대기 신학의 작품들 궤도로 착각할 정도의 궤도 수정하여 기록한 것은 아닌가 하는 희열을 느꼈다는 것은 신선했다. 물론 이러한 접근은 개인적 해석학의 입장이다. 돌출된 도전과 교훈이 브루그만의 책을 읽으며 독서하며 얻게 된 학문적인 자극이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수학은 1차 방정식을 이해하고 2차 방정식을, 2차 방정식을 이해하고 난 뒤, 3차 방정식을 푸는 것이 마땅하지만 신학적인 도서들은 이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혁명적인 학문이 아닌가!” 하는 무모한 생각을 말이다. 집중하여 독서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브루그만의 책이지만 도전하여 이해의 지평을 넓힌다면 구약적인 독서의 외연 확장에 상당한 도움을 경험하게 되리라고 서평자는 감히 주장하며 추천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