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레슬리 뉴비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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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IV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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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03-21 12:0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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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뉴비긴의 ‘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를 읽고 재의 수요일이 시작되던 지난 3월 5일 오전에 이 책을 완독했다. 묘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인류의 죄를 위해 골고다라는 치명적이고 숙명적인 해골 골짜기에서 하나님 아들의 신분으로 아니 몰트만의 이야기대로 하나님 당신의 신분으로 죽으심으로 결국은 지긋지긋한 사탄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기신 주님의 고난을 더 깊이 묵상하고 피정하기를 결심하는 그날 이 책을 손에서 놓으면서 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 의 레슬리 뉴비긴의 물음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말이다. 지난 3월 9일 주일에 교우들에게 뉴비긴의 책을 섭렵한 뒤 가장 강한 감동으로 다가온 그의 말을 인용하여 설교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고 그래서 복음의 권위를 단언하려면 그 복음을 선포하는 일,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삶과 예배를 통해 공동체적으로 그 이야기를 몸소 살아내는 일 밖에는 없다.” (p.104) 뉴비긴의 이 글을 인용한 뒤 교우들에게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설교를 맺었다. “그가 외치는 광야의 소리가 들리십니까? 아니 안 들렸다면 들으셔야 합니다. 몸소 살아내는 일입니다. 교회가 선택해야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선택해야 하는 일은 세상을 깔아뭉갤 수 있는 넉넉한 힘과 물리력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몸소 주님이 하셨던 이야기와 말씀들을 살아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이 땅에 제 2의 세 모녀가, 제 삼의 세 모녀가 나타나는 비극을 교회가 막을 수 있습니다.” 이 설교를 마친 뒤 섬기는 교회의 젊은 집사님 한 분이 영적인 다가옴이 있었던지 교회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소회를 자유 게시판 격인 사랑방에 남겼다. “레슬리 뉴비긴의 글이 오랫동안 마음에 머물고 있습니다. 말씀이 부족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진실 된 그리스도인답게 삶으로 조금씩 나타나기 위한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언제 어디서나 늘 그리스도인답게 한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도록. 귀한 은혜의 말씀 오늘도 감사합니다.” 힘들지만 그리고 지칠 때가 너무나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선포된 케리그마를 통하여 영적인 삶을 다잡이 하겠다는 결단의 그리스도인들이 작지만 만들어지고 있는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두껍지 않지만 그렇다고 결코 가볍거나 얄팍한 상술의 의도를 갖고 있지 않은 책, 레슬리 뉴비긴의 본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받은 감동은 21세기 추락하고 있는 조국교회 목사들에게 적지 않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는 감동이었다. 조국교회를 향한 날카로운 비평과 화살들이 난무하다. 그 화살들을 맞고 있는 조국교회의 한 면을 맡아 동일하게 사역하는 현직 목사인 서평자는 그 화살을 맞고도 별로 할 말이 없다는 좌절감이 늘 있어 왔다는 데에 더 큰 절망감이 있었다. 오히려 맞을 만큼 맞아야 된다는 건방진 대리만족의 교만까지도 스멀스멀 내 안에 잠재되어 있었다는 솔직한 고백도 하고 싶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 돌멩이를 던지는 자들을 향하여 하고 싶었던 말이 하나 있었다. 그래도 교회가 포기할 수 없는 소망인데 어쩌란 말인가? 의 자탄 말이다. 솔직히 현 상황 하에서 조국교회를 향한 회복의 대안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별 자신이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서 아팠고 또 아팠다. 그러나 아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회는 마지막 시대의 소망이라는 마지노선에서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자존감이 나에게는 있다. 이 자존감을 스스로 지켜가는 것이 어렵고 또 외로울 때가 많았는데 레슬리 뉴비긴이 나에게 힘을 주었다. 이 책 때문에. 기독교 신앙공동체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과정을 경험하고 힘들어 했을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들과 회의(懷疑)할 것에 대한 종용의 유혹들 말이다. 그 시작이 데카르트의 회의주의를 기초로 했든 아니면 니체의 허무주의를 기초로 했든 아니면 현대 과학적 방법을 기초로 했든 일련의 근대주의에서 자랑스럽게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했던 권위에 대한 탈피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던 것이 사실이고 또 그 열광은 근대 그 이후 포스트모던의 작금에서도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식의 자유함이 승리하고 있는 열광의 분위기로 인해 오늘날의 공식도 일체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런 이유 때문에 다음과 같이 갈파하고 있다. “근대성으로 채색된 지성은 기독교 신앙을 부조리한 것으로 혹은 미심쩍은 것으로 보게 만드는 온갖 신념과 가정(假定)들로 가득 차있다.(p.34)” 동의한다. 왜 저자의 갈파에 동의하는가? 그의 이어지는 통쾌한 선언 때문이다. 저자는 이미 이러한 근대성의 선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도전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믿음의 문제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걷는다.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아는 것처럼 장차 알게 될 그 날을 기대하며 믿음의 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레슬리 뉴비긴이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주었던 선명한 혜안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매개체를 성경, 전통, 이성, 경험으로 제시한 대목일 것이다. 첫째, 왜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매개인가? 저자는 린드벡의 말로 답을 제시한다. “성경은 인간의 경험과 이해를 구조화하는 하나의 내러티브이다. 성경을 이루는 구성 요소가 아무리 다양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유일무이한 이야기임을 주장하는 하나의 이야기(the story), 우주와 그 안에서의 인간의 삶에 관한 참된 이야기이다.” 둘째, 전통에 대한 이해이다. 앞에서 성경은 우주와 그 안에서의 인간의 삶에 관한 참된 유일무이한 하나의 이야기임을 밝혔다.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성경에 대한 기록을 주님이 남기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주님이 당신의 사역을 글로 남긴 것이 없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특정한 시대, 장소, 언어, 문화와 연루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남기신 글이 아닌 역사의 흐름과 관계되어 있는 이야기들은 당연히 주님과의 관계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어졌고 그러므로 기독교적 제자도의 전통을 무시한 채로 성경에 호소한 일은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기독교적 제자도의 전통에 권위를 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성이다. 셋째, 이성이다. 저자는 이성을 정의하면서 중요한 가치를 하나 제시한다. 이성을 나의 주권적 의지를 섬기는 종이라고 해석한 부분이다.(p.74) 이것을 전제할 때 건강한 이성은 주인 노릇을 하는 자율성의 종이 되는 대신에 귀를 기울이고 신뢰하는 열린 마음의 종이 될 때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적용하자. 이성이 과학, 철학의 산물로 작용하는 매개가 아니라 우주의 창조주의 말씀을 들었던 그 사람들의 이야기(성경)와 전통을 합리적으로 머물 수 있도록 하는 나의 주권적인 의지를 섬기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해야 함을 강조하는 대목이 설득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경험이다. 저자는 말하기를 모든 경험은 해석의 틀 안에 놓인다고 했다. 부연하자면 기독교 복음은 모든 경험을 하나님의 지혜롭고 자애로운 목적에 비추어 해석하게 하는 일종의 틀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경험이 권위 자체가 하나님의 권위를 돕는 매개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런 개별적인 4가지의 매개체가 하나님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는 도구로 사용되려면 반드시 개별적으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면 반드시 묶여질 때만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pp.81-82) 레슬리 뉴비긴은 책의 마지막 챕터에서 오늘 조국교회를 향한 비수를 하나 던진다. 이 책의 초판이 1996년에 출간된 것을 감안할 때 저자가 한국교회를 염두 해두고 선포한 의도적인 글이 아님을 서평자는 안다. 그러나 촌철살인으로 조국교회가 담아야 하는 교훈이 있다.“이른바 기독교 세계에서 기독교와 정치권력이 서로 손을 잡게 된 결과 마침내 교회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군이 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교회 사적인 차원에서 The Christendom이 자행했던 죄악들에 대한 통렬한 경고성 메시지로 이 글을 남긴 것이 확실시 된다. 내가 사랑하는 한국교회, 내가 울며 지키고 싶은 조국교회, 더 이상의 하나님의 진리를 죽이지 않는 교회이기를 기대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에게 다음의 권고를 친절하게 요청한다. “성경이 스스로 말하도록 허용하고 우리의 마음이 들음으로 인해 변화되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이럴 때 이성과 양신이 완전히 개입되는 그런 토론에 들어갈 수 있고 믿음의 공동체, 성령의 교통하심, 그리고 스스로 계속 이어지는 토론에 참여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허용하여 교회가 자기의 사명에 따라 하나님의 위업을 신실하게 증언하는 통로가 되게 하자고 말이다. 나는 레슬리 뉴비긴의 이 당부를 실천하는 방법 중에 하나를 서평의 초두에 언급했다. 그래서 적어도 거창한 프로젝트가 아니라도 서평자가 섬기는 교회, 조그마한 지방 소도시의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교회인 세인 교회 공동체에서 그의 말처럼 말없이 감당해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고 그래서 복음의 권위를 단언하려면 그 복음을 선포하는 일,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삶과 예배를 통해 공동체적으로 그 이야기를 몸소 살아내는 일 밖에는 없다.” (p.104) 몸소 살아내야지. 은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