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민의 ‘WHY JESUS’ 를 읽고 (두란노, 2014)
책의 말미에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53세의 나이에 iMBC CEO 아주 잘 나가던 바로 그 시기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로 마음먹고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하여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가 펄쩍 뛰면서 반대를 하였다. 백 번 양보하여 신학교를 간다고 하더라도 먹고 살 돈은 챙기라고 했다. 그 때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밤에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신다면 어쩌겠소? 오늘밤에 죽어버리면 그 많은 돈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이 이야기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은 이유는 53세의 나이에 신학교를 가겠다고 결심한 저자가 맨 처음 기독교를 접하게 된 동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광적인 신자처럼 새벽예배를 나가던 아내를 그렇게 만든 교회를 알아보고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어 보이면 방송인의 사명으로 취재하여 만천하에 교회의 불의를 고발하기 위해 찾아갔던 바로 그 교회에서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를 부르는 교인들의 찬송 소리에 무너지면서부터였음을 저자가 밝히고 있다. 그 때부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한 저자는 소위 말하는 세속적인 주도권을 모두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결국에는 신학을 하겠다고 결심했고 저자는 지금 조국교회의 현직에서 교회를 섬기며 사역하는 목회자로 서 있다.
서평자는 이 책의 읽고 난 뒤에 이렇게 독서 소회를 적어 놓았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는 말씀의 현실적인 적용자로 조정민 목사가 눈에 띤다. 지천명이 훨씬 넘은 나이에 목회자의 반열에 서기 위해 힘든 결단을 하고 사역을 감당하는 그의 노정을 보면서 먼저 믿는 자를 부끄럽게 하는 자기포기와 자기부인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는 그의 실천적 삶을 통해 왜 예수인가? 를 힘 있게 전한다. 그는 자기 성찰적인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정답이요 해답이기 때문임을 고백했다. 나는 정말로 예수가 해답이요 정답인 것을 전하며 살고 있는 목사인가? 피드백을 하게 해 준 예수의 사람 조정민을 만났다. 2014년, 4월 7일 오후 8:35”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물어야 하는 질문으로 한 가지를 선별한다면 저자의 질문일 것이다.
왜 예수이어야 하는가?
저자는 이 대답을 12가지의 키워드로 답하고 있다.
① 종교 이상
저자가 이 부분을 강조한 것이 아마도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세상이라는 스펙트럼은 기독교를 종교라는 틀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예수가 종교가 아님을 인지한다고 말한다. 그 증거로 몇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예수를 만난 사람은 예수 믿기 전과 이후가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는 현상적인 것을 예로 든다. 다시 말해 예수 믿기 이전의 삶과 믿은 이후의 삶은 반드시 단절되는 것이 전제하는데 이 말은 예수 믿기 전의 나의 삶은 내가 죽지 않는 자아를 갖고 있지만 이후는 내가 죽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크리스천은 반드시 과거의 나와는 단절되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더 놀라운 것은 일반적인 타종교와는 전혀 다르게 이런 변화된 삶의 주체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자아가 아니라 이것조차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그 분을 만난 자들을 그 분께서 그렇게 만들어주신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 그 이상 즉 meta-religion 이라는 것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이 상황을 직시하고 떠나는 여행은 반드시 가야 하는 여행이기는 하지만 위험한 여행임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여행을 한 끝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고 술회한다. 믿어야 할 대상이신 그 분 하나님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이셨다는 사실 말이다. 그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신 믿음의 대상이 직접 우리에게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놀라운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바로 진리인 성경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런 하나님이 일방적인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 사건을 설명하는 바로 이 성경이 예수님이 종교 그 이상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언임을 강조하고 있다.
② 노 마일리지
저자는 기독교가 종교 그 이상임을 제시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를 성경이 말하는 부인할 수 없는 세 가지의 은혜 때문임을 지적했다.
no mileage, no credit, no point
우리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백성이 되는 데에 필요한 충분조건으로 기독교는 일반적인 종교가 말하고 있는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는 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공로와 행위와 노력으로 인해 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충격이다. 마일리지가 필요하지 않다. 신용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획득한 점수도 필요 없다. 그러면 무엇인가? 예수님의 사랑이요 은혜라는 것이다. 저자는 일맥상통하게 계속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조건은 어떤 것도 필요 없음을 역설한다. 다만 내가 구원을 받기 전에 나에게 구원이 전해졌고 내가 믿겠다고 결심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믿게 하셨다는 전적인 은혜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하게 피력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진정으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no mileage, no credit, no point 의 인생으로 전환될 수 밖에 없고 또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더불어 그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인 교회는 당연히 세상과는 다른 방식을 따르는 공동체임을 기억하자고 말한다.
③ 자유
마일리지 없이, 크레디트 없이, 포인트 없이 구원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더불어’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무엇을? 죄에서 자유함을. 그러나 저자는 주님이 주신 자유함을 방종함으로 변질시키는 경우가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의심해야 함을 역설한다. 내가 만에 하나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어서 그 욕구를 풀려고 한다면 조심해야 한다. 왜 그런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은 이미 자유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던 성경적인 시대가 바로 사사 시대였다. 사람들이 왕이 없음으로 인해 자기의 소견에 좋은 대로 마음대로 살던 때를 저자는 방종의 시대라고 전한다. 하나님이 금기로 주신 것까지 차지하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까지 차지하려는 절대적 자유함의 욕망이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자유함의 전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이라는 공식 하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함이었다. 이것을 파기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최선을 저버리고 그들은 차선을 탐냈던 것이었다.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인간의 교만함 때문에. 저자는 이런 인간의 죄악을 회개하고 진정한 자유함을 얻기 위한 공식을 도식화한다.
"Escape from God 에서 Freedom to God"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에릭 프롬이 말한 "Escape from Freedom 에서 Freedom to God" 즉 하나님께로 가는 자유함을 얻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왜 그리스도 예수인가? 하나님께로 갈 때만 그 분이 진정한 자유함을 주시기 때문이다.
④ 기쁨
저는 ‘기쁨’을 말하는 영어단어 ‘joy'를 의미 있게 풀었다. "Jesus overflows you." (예수께서는 당신 안에 흘러넘치시는 분이다.) 저자는 크리스천을 정의하면서 이런 정의를 내린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가치를 갖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즉 크리스천은 60,80,100년을 살다가 가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시간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동의한다. 크리스천의 신앙생활 삶의 시간 기준을 영원으로 바꾸는 삶이라고 주장한다. 삶의 기준이 영원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이 땅의 시간의 연속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도리어 한 가지 면에서 동일하다. 무엇인가? 영적인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영적인 기쁨은 세상의 기쁨으로 해석되거나 재단되지 않는다. 세상의 기쁨은 순간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영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기쁨의 기준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를 잘못 믿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예수 믿는 자들은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제 1조에 해당하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한 이유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오늘날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지탄 받는 이유는 오직 단 한 가지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동일한 수준의 기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⑤ 사랑과 권력
예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생애의 전부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아마도 십자가 사랑으로 다 이루신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신의 몸으로 죄인들의 몸값을 십자가에서 지불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그 사랑 말이다. 저자는 강조한다. 주님이 이루신 ‘다 이루었다.’의 관건이 사랑의 길이었음을. 그러나 세속은 반대의 길에 있다. 권력으로의 길이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 자체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믿었기에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조차도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구원할 것을 믿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바람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셨다. 권력의 길이 죄악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주님의 길을 따르는 교회는 그러므로 세상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함이 마땅하다. 만일 교회 공동체에서도 대접을 받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다면 그는 여전히 세상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 중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나오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불행히도 권력의 길을 가는 또 하나의 수단을 얻기 위해 교회에 오고 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기독교 변증가로 알려진 체스터톤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 이후 기독교가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다.’는 말은 이 땅에 존재하는 많은 교회들이 허상의 기독교임을 지적하는 말에 아파해야 함을 또한 말한다. 죄의 의지가 권력의 의지라는 것, 인간의 본능으로 가는 길이 권력의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교회만 다녀도 십자가의 길을 나도 걷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데 상당히 위험한 발상임을 깨달아야 함을 말한다. 십자가상에서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주님을 만난 자는 더 이상의 권력의 길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 분을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사람들을 압박하고 다루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십자가에 걸린 시체가 내 시체임을 바라보며 뼛속 깊이 전율할 때까지 십자가를 묵상해야 한다. 사랑이 식은 곳에 권력이 자라고 사랑이 없는 곳에 죄가 자란다는 그의 일설은 가슴에 남는다. 저자는 이 대목에 심금을 울리는 한 마디를 적는 것을 사양하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사랑에 눈먼 상태가 좋다. 나는 우리 모두가 교회만 들어오면 눈물이 핑 돌았으면 좋겠다. 교회가 힘들게 살다가 온 사람들의 마음을 품어주었으면 좋겠다.”
⑥ 죄
저자는 자가 사랑이 죄라고 정의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분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죄의 냄새가 진동했다. 판단을 통한 정죄였다. 특히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제작되고 만들어진 율법의 조문화를 통해 사람을 판단하는 지독한 죄의 두께가 두꺼웠던 시대였다. 주님은 을 만난 자들은 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하여 판단하지 않는다. 그 판단에서 자유로워진다. 왜 그런가? 예수께서 끌어안고 죽은 죄의 본질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버릇, 습관, 사고체계, 삶의 방식 모두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가 더 옳고 그른 지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것이라고 저자는 역설했다. 또 하나 죄는 이기심이다. 이렇게 죄를 정의한 저자는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들은 용서 받은 죄인들이라는 인식이다. 왜 이기적인 잣대를 다는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용서 받은 죄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를 이롭게 하는 데에 촉각을 세울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관심을 갖고 성화의 길을 가야 한다, 성화의 과정을 살아가는 것이 곧 구원을 이루는 삶이다.
⑦ 은혜
저자는 구원의 핵심을 은혜로 보았다.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건조한 삶이 아니라 은혜 때문에 날마다 감동과 기쁨을 경험하는 삶이다. 은혜는 예수님 때문에 신앙의 본질로 각인된 단어이다. 은혜는 뜻밖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율법이 지배하는 곳에는 갈등이 있고 싸움이 있지만 은혜가 지배하는 곳에는 참다운 신앙의 감동과 감격이 있다. 그러므로 율법대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사는 자는 이른바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바울에게 들려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감격해 하는 사람이다. 은혜는 만나와 메추라기처럼 날마다 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구원의 단계를 실천하신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 이후의 시대를 은혜의 시대라고 정의하는 것은 정답이다. 십자가는 은혜의 사건이다. 십자가에 달려 있을 사람은 바로 나란 걸 볼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그 사람은 은혜의 사람이 된다. 은혜의 사람은 종교적인 사람이 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된다.
⑧ 고난
다른 종교는 고난을 피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기독교는 고난을 감당하라고 가르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고난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님이 주신다. 고난이 해석되면 고난은 이미 고난이 아니다. 고난이라는 것이 특권이라는 게 믿어지면 고난은 이미 더 이상의 고난이 아니다. 고난은 광야학교를 졸업하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감동의 이야기를 나눈다. “예수님은 멍에와 짐을 없애 줄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 멍에가 쉽고 가볍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얼마나 매력적이고 귀한가? 짐도 업고 멍에도 없다는 것은 사기이다.”
고난에 감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너무 안전한 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우리 스스로가 고난을 찾아서 떠나야 한다. 우리가 안 찾아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것이다.
⑨ 거듭남
저자는 거듭남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크리스천은 가장 악독한 위선자가 된다고 경고한다. 왜? 선한 구석이 없는 자기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장본인이 되기 때문이다. 거듭남이란 뿌리 깊은 나의 죗성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회개를 통하여 나를 돌이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에게 정직한 것이며 날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적어도 진정성을 갖고 거듭난 자만이 해로운 믿음으로 세상의 독을 전염시키지 않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특히 저자는 역설한다. 거듭난 자는 더 이상 나를 내세우지 않는다. 받은 것이 너무 많아 나눈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은 삶, 거듭난 우리들이 가야할 고지이다. 쉽지는 않지만 내 힘으로는 절대로 못 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거듭남의 축복이며 비결이기도 하다.
⑩ 제자
저자는 기독교를 선택하게 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사유 중에 하나를 다음이라고 표현했다.
“신이 인간을 찾아간다.”
적어도 이것이 진짜라고 믿는 자는 팬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팬이 아니라 팔로어가 되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팔로어보다 충성심이 한 차원이 더 높은 자를 팬이라고 부른다. 팬들은 기를 쓰고 유명스타를 따라다닌다. 호기심과 기호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족되지 않는 순간 곧바로 팬은 안티세력으로 돌변한다. 그 누구보다도 더 심한 돌팔매질을 한다. 하지만 팔로어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누리는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팔로어를 다른 말로 제자라고 부른다. 제자는 자기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자기가 따르는 그 분을 기준으로 삼는다. 예수님의 기준대로 따르는 자가 제자이다. 저자는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따라가고 있는가?
⑪ 십자가
기독교는 십자가가 중심이고 본질이다. 십자가가 없는 능력, 십자가가 없는 기적은 위험하다. 작금의 기독교가 위험에 빠진 이유는 십자가의 능력이 교회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대는 예수를 드러내고 살기가 참 쉽지 않은 시대이다. 그래서 교회가 피난처가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강하게 역설한다. 이 시대의 교회가 사람들을 세상으로 밀쳐내지 않으면 교회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고 세상도 소망을 점점 잃게 될 것이다. 주님은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을 준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교회를 주셨다고 강조한다. 기막힌 도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인 십자가를 세상에서 인정하도록 싸워야 한다. 교회가 인정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세상이 인정하는 십자가 말이다. 이것이 바로 찾아야 할 십자가의 능력이요 본질이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떠나서는 어딴 것도 복음적이지 않다. 십자가 곧 복음이다. 십자가를 사수하는 교회는 그래서 그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전염시키기 위해 반드시 흩어야 한다. 세상에서 십자가의 능력을 선포하라.
⑫ 부활
눈에 보이는 것만을 투자하고 추구한다면 그것은 곧 짐승 같은 삶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왜 예수인가? 또 하나의 키워드는 예수님의 부활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이기에 영원의 것을 사모할 수 있다는 은혜가 임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추구하는 자들은 영원을 사모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역사상 이렇게 말한 자는 예수님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믿음의 본질은 부활의 날 다시 만날 것이라는 부활생명이다.
조정민 목사는 늦깎이 목사이다. 그래서 그런지 책의 내용을 통해서 기존 교회의 목회자들이 나누기기 불편한 부분들이 즐비한 것도 사실이다. 목양의 현장은 항상 대중성을 참작하고 고려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는 예민한 공간이다. 조 목사가 지적한 전통적인 교회의 목양적인 패러다임은 철폐되어야 대상이고 특별히 교회 목회자가 성도들의 영성 훈련의 방법론을 이야기할 때 교회 내적인 훈련의 방향성은 지양해야 할 목양적 내용이고 본인이 이야기하고 있는 개혁적인 내용의 목양적 패러다임만이 정답인 것처럼 확신하는 일련의 일들을 조금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함을 보았다.(p179-181, 222)
그러나 이런 기록과 주장들조차도 서평자는 그를 비평하는 차원으로 말한다고 하기보다는 도리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한 뒤에 단언하는 것이 더 바람직함을 충고하는 에두름이다. 서평자는 그를 통해 많이 배웠다. 그리고 목양의 현장에서 조금 더 빨리 나와 목회를 하는 목사 선배로서 오늘 조국교회가 함께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할 테마와 교훈들을 가슴에 담았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예수 믿기 전과 이후가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는 것에 대한 교훈을 목사도 성도도 함께 그렇게 사는 것에 소홀히 여긴 직무유기를 깨달았다.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은 "Escape from Freedom 에서 Freedom to God"임에 도전을 받았다. “오늘날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지탄 받는 이유는 오직 단 한 가지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동일한 수준의 기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는 역설은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그리고 목양의 현장을 직시하게 했다. 체스터톤이 말한 ‘예수님 이후 기독교가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다.’는 촌철살인도 서슬이 시퍼렇게 교회를 향하여 나를 향하여 선포하는 말로 받는다. “고난이 해석되면 고난은 이미 고난이 아니다.” 감동이다. 이 시대의 교회가 사람들을 세상으로 밀쳐내지 않으면 교회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고 세상도 소망을 점점 잃게 될 것이다. 주님은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을 준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교회를 주셨다고 강조한 내용은 눈물로 담는다. 섬기는 교회의 교우들에게 4월 필독 도서로 추천했다. 그만한 감동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대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한 번은 꼭 읽었으면 하는 양서임에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