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레슬리 뉴비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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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SF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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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05-03 22:01: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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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뉴비긴의 ‘타당한 확신’ (proper confidence) 을 읽고 (SFC, 2013년) 이 책을 추천하고 있는 듀크 대학의 제프리 웨인라이트 (Geoffrey Wainwright)는 추천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자유주의자와 근본주의자 모두가 계몽주의적인 인식론적 전제들에 갇혀 있는 것을 보면서 레슬리 뉴비긴은 모든 인간의 지식이 지닌 신탁적 특성을 지적함으로서 그들 모두에게 자유를 제공한다.” 웨인라이트의 이 지적은 이 책 내내 지속적으로 주장된다. 개인적으로 레슬리 뉴비긴의 책들을 4월 중에 섭렵하기로 마음을 먹은 서평자의 결심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한 호의적 감흥 때문이었다. 소위 말하는 진보주의적인 색깔의 논평들이 짙게 깔린 책들을 접하다보면 이성적인 이해, 날카로운 지성, 해박한 해설들을 접하지만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아쉬움을 항상 느낀다. 반면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근본주의적 냄새가 지독한 책들을 접하면 빨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또 다른 유감스러운 감정이 솟구쳐 오를 때 힘이 빠진다. 이런 차제에 ‘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의 레슬리 뉴비긴의 입문서를 접하면서 앞서 설명한 양쪽을 통해 얻은 심리적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왠지 모를 대리만족의 기쁨 때문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두 번째의 책을 섭렵했다. 그리고 독서를 마치고 난 뒤의 소회는 ‘역시’였다. 3,4년 정도 되었나 싶다. 에드워드 윌슨의 대작 ‘CONSILIENCE' 를 만났다. 그리고 당시 이 책을 통하여 얻는 기막힌 도전은 지식의 대통합으로 얻어지는 엄청난 지적 내공들이었다. 윌슨은 ‘통섭’에서 이렇게 갈파했던 것이 기억에 있다. “나는 도덕적인 가치들의 독립성을 믿는다. 나는 도덕적 가치들이 오직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일 뿐임을 믿는다. 신은 별도의 문제이다.” 윌슨의 이 무모한 도전에 대하여 신학은 말해야 하고 유신론적인 철학과 윤리학은 말해야 하는데 그 담론의 전제는 역시 통섭을 기초로 한 대항이어야 함을 동의하기에 얼마나 많은 공부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한지는 재론의 여지가 없음을 느꼈다. 서평자 역시 통섭을 통한 노도와 같은 세속적 학문적 공격에 노출되어 무방비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인지 CS 루이스 이후 근래 들어 톰 라이트, 마크 놀에 대한 공부를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 편이다. 과정 중에 레슬리 뉴비긴을 만났는데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다. 레슬리는 ‘타당한 확신’에서 이주 중요한 논지를 끝까지 물고 나아간다. 기독교의 고유 명사와도 같이 사용되는 ‘믿음’에 대한 신학적, 이성적 재조명이다. 그는 믿음에 대한 개념 해석을 접근하면서 믿음이라는 것이 서구의 사상적 틀에서 지성적 고찰의 사생아처럼 여겨졌던 비지성적인 개념들로 몰고 가는 계몽주의적인 그리고 데카르트적인 공격에 대하여 방어한다. 축구에서 쓰는 말이던가? 최상의 공격이 최대의 수비라는 말처럼 상당히 능동적으로 믿음을 변호한다. 믿음에 대한 그의 공경적인 선언은 믿음이 지식에 이르는 최고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의 역설은 진리가 무엇인가? 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의미가 무엇인가? 에 더 많은 정력을 소비하는 이 시대에서 고독한 전쟁과도 같은 싸움이겠지만 회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를 하는 무모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 굴뚝이다. 단적인 예로 레슬리는 믿음에 대한 개념 재조명을 유럽의 지적 역사의 궤도에서 찾았다는 것은 놀랍고 경탄할 만하다. 어떤 이해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신적인 계시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거부하는 자들의 일반적인 기초 역시 그들이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pp.19-21) 다시 말해서 유럽의 사고를 형성하는 데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성경적 사고관이었다는 의미이다. 이 의미는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기독교적인 사상과는 물과 불과 같은 성격으로 규정될 수 있는 과학주의의 기초 역시 믿음으로 시작된다는 아이러니로 말이다. 과학의 기초가 믿음과 관계되어 있다면 마땅히 믿음은 이성적인 접근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일련의 행위에 있어서 한계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왜 그런가? 그것은 믿음이라는 것의 속성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의 확실성은 다만 그 이야기가 믿을만한가에 달려 있기 때문에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대로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고 믿는 자만이 순종한다.’는 것을 전제할 때 해석되는 것을 전제한다면 과학적인 지성으로 공격하는 믿음은 도리어 천박한 공격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레슬리는 이번에는 ‘의심’을 논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로 인해 발생된 유감을 하나 전한다. 지식과 신앙의 분리이다. 이 이원론적인 분석은 몹시 유감스럽다. 지 식은 신앙과 분리된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앙에 의존하지 않는 지식이 있는가 하면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있다고 구분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런 접근으로 인해 “믿음은 지식이 부족한 신념이고 확실성은 지식의 문제이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고 까지 규정하면서 그러므로 신앙은 확실한 지식을 갖지 못했을 때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것”뿐이라고 신앙을 폄하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아퀴나스적인 이런 이분법적인 지식과 믿음의 분리로 인해 하나님에 관한 틈을 만들어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철학적 논쟁의 방식으로 그 존재가 증명되는 그 하나님은 성경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처럼 쉽게 인식될 수 없다.”라고. 그러나 레슬리는 이러한 이원적 지식과 믿음에 대한 분리에 대하여 비평한다. 왜냐하면 이런 이원적인 논리는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진 가설에 불가하기 때문이다. 반면 교회는 이런 이원적인 지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기독교적 확신을 붙들어야 한다고 레슬리는 주장한다. 레슬리 특별히 뉴비긴은 타당한 확신에서 과학적 이원론의 탄생 배경과 그리고 공룡같은 모습으로 디가온 일련의 이원적인 과학주의의 폐해를 파헤침과 동시에 극복의 대안까지 제시한다. 계몽주의라는 특징을 갖고 배태된 과학적 사고의 틀에 기독교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강하게 저자는 역설한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복음이 진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과학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어 레슬리 뉴비긴은 헝가리 출신의 과학자인 폴라니의 이야기를 들어 과학주의에 대한 직시를 경고하는 대목에서는 비장함까지 느낀다. “우리 앞에 놓인 과학과 기술들이 우리 모두를 유익하게 할지에 대하여는 깊은 불안이 존재한다. 그 위험을 직시하는 것은 중요하다. (중략) 과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논쟁은 너무 오랫동안 과학으로 시대에 뒤쳐진 믿음을 대체하고 싶은 사람들에 의해 지나치게 각색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왜곡되었다. 이제는 과학자나 신학자들 모두가 과학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고민할 시점에 와 있다.” (p.103) 위의 주장을 전제할 때 교회가 기독교 진리에 대한 자긍심과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각인시킨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유럽이라는 영역에서 시작된 계몽주의 사조가 태동하기 전까지 믿음이라는 것은 지식에 이르는 절대적인 길이었음을 소개하고 있다. 2장은 그러나 믿음이 지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주장하던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회의주의가 탄생한다. 이 사상은 교회로 하여금 확실성을 붙들기 위해 의심하는 법을 배우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의 핵심적 담론은 확실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실성의 추구는 도리어 사상적인 측면에서 회의주의로 환원하게 된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되었음을 3장에서 보고한다. 4-5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임을 밝힌다. 레슬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사상적인 측면이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성경의 테제들을 만족하게 하는 비평의 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6장에서 주장되고 있다. 그러므로 레슬리는 이 책의 마지막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과학적 확실성이 아니라 믿음의 헌신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저자의 통쾌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 갈파를 통해 교회는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자신감을 가져야 함을 역설한다. 어떻게? 교회는 복음을 변증할 때 과학적 틀에 의존하기보다 성경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줌으로 말이다. 근래들어 보수적인 관점에서 본 성경적 이해의 냉철한 비평이나 해석학적인 틀을 만나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입문서인 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를 시작으로 타당한 확신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IVP) 까지의 여행을 통해 나름 대리만족과 신바람을 경험하고 있어 행복하다. 서평자는 ‘타당한 확신’의 독서를 통해 무지함을 전제한 과학주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과학적인 함정을 논리적으로 펼쳐가며 과학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믿음의 타당한 확신을 갖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정신인지를 다시 한 번 재다짐하도록 도와준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