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은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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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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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05-12 22: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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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 (문학동네)을 읽고 대학 학부 시절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퀸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읽었다. 글을 접하면서 난해한 책으로 기억되었지만 나름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분명한다. “독일의 한 가정에 오스카라는 아이가 탄생을 한다. 그가 태어날 시대적인 배경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모든 관심이 군사문화에만 집착되어 있었지 윤리, 도덕, 사회적 질서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시기였다. 오스카가 3살이 되는 해에 어른들의 난잡한 그리고 추잡한 성적인 일탈을 발견한 그는 고의적으로 사다리에서 떨어져 성장을 멈춘다. 그 이유는 스스로 성장을 멈추면 자기 역시 그러한 일탈의 죄악에 빠지지 않을 것을 나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를 낳아준 엄마의 적절하지 못한 외도를 비롯하여 당시 천주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무능력, 전쟁에만 몰두해 있는 독일이라는 국가 등등이 일련의 사회 구조적인 악임을 인식하고 초능력을 갖고 있는 오스카는 생일 선물로 받은 양철북을 두드릴 때 나타나는 힘으로 사회적인 모순들을 고발해 나아가는 교훈을 지금도 아주 선명하지는 않지만 기억한다.” 오스카가 일부러 본인의 성장판을 멈춘 것은 속물근성과 대항하여 싸워야 함을 표현해 주는 퀸터 글라스의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시사이기도 하다. 2014년 4월 하순, 나는 은희경 작가의 장편 소설인 ‘새의 선물’을 손에 들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작가는 그 이유에 대하여 소설의 내용으로 이렇게 자답한다. 주인공 진희는 12세의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다. 일반적으로 논하자면 12세의 초등학교 5학년생은 아직은 어리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열두 살의 진희는 이미 성장한 성인의 감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설정은 작가의 탁월한 소설의 주제로 이끌어가는 고도의 기법이다. 진희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결코 녹록하지 않은 태생의 아픔 속에서도 아주 시니컬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도무지 12세라고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통찰력으로 말이다. 진희는 자살로 인한 엄마의 부재 그리고 아빠의 행방불명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할머니와 이모 그리고 삼촌의 슬하에서 자란다. 예기치 않은 가정의 깨짐으로 인해 혼자 남은 진희를 할머니는 또 다른 상처를 받지 않도록 애지중지 키운다. 오히려 소설의 감초 같은 역할을 하는 이모보다도 더 끔찍이. 그러나 진희는 이런 할머니의 의도까지도 이미 알아버릴 정도로 조숙하고 성숙했다. 진희는 이모의 사랑과 배신이라는 경험을 보면서 사람을 배운다. 삼촌을 아끼는 할머니의 편애를 보면서 성적 편향의 장단점을 배운다. 동시에 할머니의 집에 세 들어 사는 평범한 아니 너무 평범한 인생 하류의 극장의 배우들과 같은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경험하면서 미워하고 싫어하고 반대로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의 인생의 드라마를 똑바로 직시하는 삶을 배우며 경험한다. 더 놀라운 것은 진희가 이미 그런 막장 배우 같은 삶을 경험하고 있는 어른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코 긍정의 의미가 아니다. 전술했듯이 12살에 이미 다 성장해 버린 진희만의 아픔이다. 왜 그런가? 상처를 통한 가면 씌우기 때문이다. 진희는 또 다른 상처를 당하지 않기 위한 몇 겹의 자기의식의 막을 치기 위해 다른 사람 즉 어른들의 심리를 알아버리는 비정상적 성장판이 자리를 잡았다. 그 성장판은 항상 ‘바라보는 나’와 ‘보여 지는 나’에 대한 갈등으로 민감해졌다. 아마도 진희에게 있어서 이 성장판의 클라이막스적인 갈등을 보여주는 압권은 삼촌의 친구인 허석에 대한 치밀한 사랑 숨기기에서 나타난다.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그 사랑 들키기에 노출되지 않기 위하여 치밀하게 가면을 쓰는 진희의 과정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래서 진희의 은밀한 사랑은 꺼풀 벗기와 같다. 작가 은희경은 주인공 소녀 진희가 경험하는 사랑앓이를 그리면서 철저하게 ‘바라보는 나’와 ‘보여 지는 나’에 대한 투쟁을 그린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며 독서를 했다. 소설 내내 보여 지는 진희 이 투쟁이 독자인 나로 하여금 지난 세월 목사로 살아오면서 스쳐 지났던 자국들을 진하게 회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목사인 나는 ‘바라보는 나’로 살았는가? 아니면 ‘보여 지는 나’로 살았는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너무 진하게 각색되고 훈련된 ‘보여 지는 나’에 함몰되어 살았다는 점이다. ‘나는 목사이니까’가 항상 자위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합리화에 안심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은 두려움과 회한이었다. 그 두려움과 회한은 독서를 하는 동안 내내 잠복되어 마치 뱀이 담쟁이를 기어오르는 스멀스멀함으로 나를 포위한 것은 목사라는 신분으로 살아오면서 ‘보여지는 나’에 견제당한 나의 자아에 대한 성찰이었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어찌 보면 가장 아름다운 것일 수 있는데 사람은 성장하면서 수없이 많은 가면들을 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마치 진희처럼. 나는 진희가 갖고 있었던 트라우마(미쳐서 자살을 선택한 엄마, 그 누이를 사랑했던 삼촌, 그리고 아이를 버리고 가출한 아버지)의 무의식 속에서 항상 어린 소녀를 짓눌렀던 삶의 굴곡들이 소녀 같지 않은 어른의 모습으로 성장한 기형의 아픔을 배태해 낸 놈이 아닐까 하는 아픔으로 진희를 바라보며 진희에게 동정표를 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던진 질문은 이렇게 성장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이었다. 독자 제위의 답에 맡긴다. 또 하나 소설을 통해 간직할 수 있었던 진수가 있었다. 소설의 말미에 터진 유지공장의 화재 사건으로 인한 지인들의 죽음 말이다. 우물을 가운데에 외곽에 변소를 두고 아침마다 어깨를 부딪치며 살던 나의 사람들이 끝까지 나의 사람으로 함께 있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작가는 말해준다. 그래서 ‘지금 그리고 오늘 나와 함께 있는’ 이라는 화두에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책을 통하여 진하게 다잡이 해본다. 애증의 관계라 할지라도 누군가와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는 것은 축복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바람과 소망이 있다면 그래도 같은 공간과 시간 안에서 같은 목적을 담고 달릴 수 있다면 그것은 행운이요 복이 아닐까 싶다. 책의 말미에 우화 하나가 잔잔하다. “숲속에 마른 열매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무 밑에 있던 여우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멀리서 호랑이가 그 여우를 보았다. 꾀보 여우가 저렇게 다급하게 뛸 때에는 분명히 굉장히 위험한 일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도 뛰기 시작했다. 호랑이가 뛰는 것을 숲속의 동물들이 보았다. 산중호걸 호랑이가 저렇게 뛰며 도망치는 것을 보니 굉장한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외계인이 출현했을 것이다. 그래서 숲속의 모든 동물들이 다 뛰기 시작했다. 그래서 숲이 생긴 이래로 숲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목적이 없는 달림은 본인은 물론 다른 이에게도 비극이다. 나는 지난 주일 낮 설교 시간에 이 대목을 교우들에게 예화로 전했다. 그리고 이렇게 교훈으로 각색했다. 정체성을 가지고 함께 부대끼는 삶고 그렇지 못한 삶이 얼마나 엄청난 차이를 갖고 있는가를 말이다. 올바른 성장은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성장의 동력을 갖고 함께 부대낌은 행복하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독서 후 사족을 달았다. “그렇다. 상처를 덮어가는 것을 통하여 삶은 일구어진다는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덮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보듬음이 아닐까 싶었다. 그 보듬음은 쓴 뿌리 자체를 제거할 수 있는 힘이 되기에. 소망이 있다면 남은여생 쓴 뿌리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고즈넉한 삶을 나누었으면 하는 소박함이다. 은희경 작가의 선물에 감사한다.” 2014년 5월 8일 오후 4시 23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