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가 생각하는 권위 중에 지켜져야 하고 지속되었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나누어 보십시다. (권위주의가 아님) | 경배와 찬양 (WORSHOP)●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가 585장) ● 우리 오늘 눈물로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바른 권위라면 ● 본문 : 베드로전서 2:13-17 1) 로마서 13:1절과 본문 13절을 비교하면서 공통분모와 차이점을 찾아보자. ● 로마서 13:1 ● 베드로전서 2:13 ●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 차이점은 무엇인가? |
2) 베드로가 정의한 바른 권위는 어떠한 것들이었나? ● 14절 전반절: ● 14절 하반절: ● 15절: |
3) 바른 권위에 순종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정의했나? ● 16절-17절을 읽고 말해보자. 1) 2) 3) ● 1,2,3번의 항목을 지키기 위하여 합십하여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춘계 대심방을 위하여(강지숙 셀을 위하여) ② 환우들을 위하여(최정희 집사, 안동철 형제 등등) ③ 5월 사역 나누고 기도하기 3) 헌금 4) 광고: 5)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5월 22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베드로전서 17번째 강해) 제목: 바른 권위라면 본문: 베드로전서 2:13-17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로마서 13:1-2절).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그 이유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만약에 권세에 대항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심판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는 바울의 선포입니다. 바울의 선포를 해석학적인 입장에서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권세’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엑수시아’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육체적인 힘’과 ‘영적인 힘’ 두 가지를 다 의미하는 통치력의 힘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정치적인 권세와 영적 권세를 다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바울이 말하는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고 할 때의 의미는 합법적인 권세이든 비합법적인 권세이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굴복하라는 의미가 강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에게 오해를 불러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참 많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권세라는 의미를 ‘엑수시아’ 라는 단어로 표현했지만 13:1절 하반절에서 그가 선포한 단어의 뉘앙스를 해석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세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세는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세가 일시적으로 허락된 세속적 권력이고, 그 권세가 하나님께 반대되는 권력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뒤집어 업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도구로 그 권세를 사용하시는 것이기에 그 권세는 결국 하나님의 통치 권 안에 있다는 것을 강하게 역설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 전반절을 보면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이 선언은 앞에서 말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권이 탄생해도 그들이 행하는 제도나 정치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여겨지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울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제도를 순종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를 위하여’입니다. 우리들이 순종해야 하는 제도는 그 제도가 주를 위한 제도일 때라는 전제입니다. 이어지는 13절 하반절과 14절을 연관하여 읽어 살펴 봅시다.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선명한 전제가 보입니다. 우리들이 순종해야 하는 대상은 왕이나 총독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반드시 이런 왕과 총독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는 왕과 총독입니다. 또 선을 행하는 자에게 상을 주는 왕과 총독입니다. 이들에게 순복하고 순종할 것을 베드로는 역설했습니다. 누군가가 선행을 할 때 그를 왕이나 총독이 상을 베풀게 되면 당연히 이런 일들은 어리석은 자들이 행하는 무식한 일들을 막는 사유가 됨을 베드로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3-15절을 해석해 보니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 바른 권위라면 순종하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왕과 총독이 바르게 리더십을 발휘하면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바른 리더십에 순종하라는 역설을 반대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선포하겠습니다. 사무엘상 8장을 보면 사사시대를 거쳐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활동을 할 때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사무엘상 8:4-9절).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나이가 많아 열조에게로 돌아갈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안 이스라엘 공동체가 사무엘에게 사사를 세우지 말고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에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묻습니다.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왕을 요구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왕으로 삼기를 싫어하는 까닭인데 백성들의 말을 들어주어 왕을 세우라고 여호와께서 허락을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이루신 왕정정치가 개막이 되었습니다. 결과는 자기들이 세운 왕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왕에게 복종했습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하나님이 이 일에 눈감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통치 수단인 국가와 왕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사실을 사무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불의한 왕에게도 굴복하는 것을 수용하셨습니까? 그 불의한 왕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의 통치 권력을 자신의 손으로 제어하실 수 있음을 자신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으로 돌아가 바르지 않은 세속적 권력에게도 하나님은 순종하라고 하는 쪽에 손을 들어주신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권위, 바른 통치 권력에 대한 순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우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불의한 권위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을 때 일시적인 순종을 허락하셨다면 바른 권위에 대한 순종은 재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른 권위에 순종합시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바른 권위에 순종하는 구체적인 삶을 살펴 봅시다.
1) 철저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본문 16절). 순교할 자유, 배교할 자유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아마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배교자의 삶으로 선택하려는 자유를 선호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역설하기를 바른 권위에 순종하는 삶은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임을 선포합니다. 로마에 살고 있었던 당대 최고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볼품없는 바울이 이렇게 선언한 것은 감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로마서 1:1절). 바른 권위에 순종하는 삶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신분으로 사는 것이며, 동시에 그 종 됨에 대하여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가 바른 권위에 순복하는 것은 바른 권위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기에 나는 거기에 붙들린 종임을 온 세계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6-17절)고 선포했습니다.
2) 이타적인 삶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17절 전반절). 바른 권위에 순종하는 삶은 그 바른 복음의 내용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뭇사람을 공경하는 것이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삶의 농축된 메시지인 이타적 삶을 살면서 그것들을 회복할 때만 교회의 선한 영향력 하에서 이타적 삶이 회복되고 그 때 비로소 작금의 사회적인 그리고 엽기적인 사건들이 잠잠해 질 수 있습니다. 바른 권위는 이것을 종용하는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권위입니다. 나에 대하여 집중되어 있는 삶이 타인을 위한 삶으로 전이되려면 바른 권위에 대한 중심된 메시지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17절 중반절). 하나님을 마음으로 높이고 두려워하는 자는 바른 권위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잠언의 기자는 이렇게까지 핵심적인 가치를 주문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 1:7).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는 죽어야 하는 시대적인 상황이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보호하셨습니다. 바로는 히브리인들 중에 남자가 태어나면 다 죽이고, 딸이면 살려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바로의 명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도리어 살렸습니다. 산파들이 목숨을 건 이러한 행위를 한 것을 출애굽기 1:20-21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산파들은 바른 권위에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의 밑받침에는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바른 권위에 순종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였다고 보고합니다. 바른 권위의 순종은 나와 내 가족을 흥왕하게 하는 원동력임을 잊지 맙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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