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6.05.15 셀 사역2024-04-22 16:1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참 이기기가 쉽지 않은 육체의 정욕은 무엇일까요?  

 
경배와 찬양 (WORSHOP)

●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찬송가 268장) 
● 내가 주인 삼은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거슬러 싸우고 있습니까?
● 본문 : 베드로전서 2:11-12
1) 베드로 사도가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성도가 거슬리고 있는 두 가지 삶은 어떤 삶인가?
● 설교를 되새김질 해보자.
1) 성도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삶:
2) 성도에게 있어서 긍정적인 삶:  

2) 1번 항목과 연관하여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공식은 무엇인가?
● 부정적인 거슬림에 따르는 공식:
● 긍정적인 거슬림에 따르는 공식:  

3) 나를 포함하여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뒤로 물러서지 말아야 할 영적인 마지노선들은 무엇이 있을까?
● 마지노선들을 열거하자.
● 물러서지 않도록 함께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춘계 대심방을 위하여(정은영 셀을 위하여)
  ② 환우들을 위하여(최정희 집사, 안동철 형제 등등)
  ③ 5월 사역 나누고 기도하기
3) 헌금
4) 광고:
5)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016. 5. 15 주일 오후 예배
제목: 거슬러 싸우고 있습니까?
본문: 베드로전서 2:11-12

  본문 1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향하여 ‘거류민’, ‘나그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 근거는 베드로전서를 시작하는 첫 장 첫 절에서 살폈습니다. 우리들은 이 땅이 영원한 본향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거주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파라비데모스’(거류민)는 그런 뜻이라 했습니다.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들이 바로 11절에 기록된 나그네요, 거류민의 특징입니다.
  본문 10절 다시 한 번 살펴 보면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의 이 선언에서 우리들의 영적 과거 이력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고향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이전 고향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사는 것이 편안하고, 당연하고, 그냥 그렇게 족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고향은 이 땅에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나니 눈이 떠졌습니다. 내 고향은 이 땅이 아니라 본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신앙적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어떻게 바뀌어야 합니까? 본문 11절 하반절이 이것을 알려주기에 중요한 구절입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 문장에 담겨 있는 두 가지의 교훈이 있습니다.
①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자들은 영혼을 거슬려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
②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자들은 육체를 거슬려 영혼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

1)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기에 영혼을 거슬리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백이면 백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는 삶을 삽니다. 영혼을 거슬리는 것과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는 것은 정비례하고, 영혼을 추구하는 것과 육체의 정욕을 거슬리는 것은 역시 정비례한다는 공식이 맞아 떨어집니다. 이 공식을 대입한다면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자들은 당연히 영적인 것과는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9-13절을 무겁게 다루어야 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 쫓으라”
  이 말씀은 바울이 세운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막힌 일들에 대한 영적 교통정리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자리 잡고 있는 치명적인 사탄의 궤계에 대하여 한 발의 양보함이 없이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선긋기를 한 것이 전술한 고린도전서 기사입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남쪽에 위치해 있는 당시에는 인구가 약 20만 명이 국가도시였고 유명한 해상 무역의 전진기지가 있는 항구도시였습니다. 지금도 이곳을 방문하면 당시 그 도시의 위용을 보여주는 고린도폴리스라는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헌데 그 고린도폴리스는 고대 국가도시의 형태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지만 당시 아프로디테 여신을 모시는 신전 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잘 아시는 것처럼 미의 여신입니다. 미의 여신이라는 말은 육체적인 미를 중요시하는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육체의미를 중시하는 세속의 경향은 반드시 성적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폴리스에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여 사제들이 수천 명이 있었습니다. 허나 그 여인들은 이름을 사제이지만 사실은 창녀들입니다. 이 말은 고린도가 얼마나 극한 성적 타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증명해 주는 좋은 실례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고린도라는 지역의 가정 윤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의 남성들이 여 사제와 동침하고, 아내를 육체의 탐닉 물건 즈음으로 대하고 이런 이유로 남성과 여성의 성윤리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는 극한 타락에 젖어 있었는데 문제는 이런 일들이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프리섹스가 죄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남편이 고린도폴리스에 올라가서 여 사제들과 음란한 일을 행하는 것은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행위로 보았기에 합법적으로 음란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문제를 삼는 여성은 매장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사람들 같다.’는 신조어가 ‘부도덕한 사람들 같다’라는 어휘로 쓰였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의 일상이었고,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고린도의 판을 뒤집어엎을 엄청난 파고가 몰려왔습니다.
  고린도교회의 탄생입니다.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을 통해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실루아노, 디모데와 함께 연합하여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믿음직한 주의 백성들이 마음을 합하여 고린도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의 태생적 정체성이 얼마나 귀하고 귀한 주님의 공동체였겠습니까? 마땅히 고린도 지역을 긴장하게 만드는 영적 군대이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심정은 마땅히 에베소교회가 그랬듯이 지역을 휘감고 있는 사탄의 궤계를 뒤집어놓기를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의 소망은 무너졌습니다. 고린도 뒤집기를 바랐던 바울의 영적 기대감은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고린도를 뒤집어엎은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안으로 고린도적인 세속의 정신이 침투한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적 타락입니다. 고린도에서 횡행했던 성적인 문란함, 그리고 방종함 등등이 그대로 스며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장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고린도 지역의 세속적인 경향들을 초토화시켜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정 반대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음행하는 자들과 같은 부류들을 사귀려면 교회에서 하지 말라” “그들을 동조하고 사귀려면 교회 밖으로 나가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니 그들을 너희 공동체에서 쫓아내라” 바울이 중간지대에 서지 않고 단호하게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거슬리는 자는 반드시 육체의 정욕을 추구할 것이지만 그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자는 육체의 정욕을 거슬리게 되는 것이 성경적인 원리라는 것과 교회가 양보할 것에는 분명한 마지노선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영혼을 거슬리는 일을 부추기는 일체의 것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이것을 양보하라고 합니다. 영혼을 거슬리는 것에 대하여 싸우는 교회를 향하여 폐쇄적인 집단이라고 공격합니다. 영혼을 거슬리는 것과 타협하지 않는 목사들을 향하여 개독 목사라고 공격합니다. 세속의 영역에서 저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를 향하여 자기들만의 리그에 빠져 있는 없어져야 할 집단이라고 독설을 뿜습니다. 가만히 보면 이제 이런 공격에 교회가 너무 무기력한 것은 아닐까하는 염려가 중해졌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공격합니다. 교회가 힘이 약해집니다. 힘이 약해진 교회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져 이제는 뒤로 물러서 방관하는 상태가 됩니다.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세상 사람들이 메스를 들이대지만 진짜로 교회가 그런 공격에 의해 코마 상태에 빠지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메스를 대시는 결정적인 시기가 오지 않을까 하는 적지 않은 긴장감 말입니다. 세상이 영혼을 거슬러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에 동조하거나, 방관하거나, 뒷짐 지고 있지 말고 영혼을 거슬리고 육체의 정욕을 추구한 것을 방관하고 있던 자들까지도 하나님은 심판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겸허히 받는 우리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자들은 육체를 거슬려 영혼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
  후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상들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전술했듯이 이들은 육체의 정욕을 거슬리고 영혼을 추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향하여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유대 출신의 형제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이 신앙인으로서 삶으로 본이 되는 삶을 살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마저도 여러분의 행실을 보고 돌이키게 하심으로 훗날 반드시 여러분을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은 베드로의 이 말씀에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거슬리고 영혼의 승리를 위해 집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반드시 승리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살아 하나님으로부터 궁극적인 승리를 맛보는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왜 영혼의 승리를 추구해야 합니까? 영혼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체의 정욕을 이기게 하심은 물론, 그것이 결국 영혼을 승리하게 하시는 원동력으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전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후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거슬리고 있습니까? 육체의 정욕입니까? 아니면 영혼의 삶입니까? 시대가 악합니다. 그러기에 경성하십시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세인 지체들이 되셔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별된 지체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