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타인에게 ‘너는 정말로 예수를 잘 믿는 신자 같다.’ 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면 나누어 보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 시온 성과 같은 교회 (찬송가 210장) ●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 본문: 사도행전 11:25-25 1) 수리아 안디옥 지방에 있던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간 노정과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설교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보자. 1) 路程(노정): 2) 理由(이유): |
2)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와서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한 결과 일어난 영적 승리는 무엇이었는가? *본문 26절을 참고하자. 1)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것: 2) 호칭의 변화: |
3) 오늘 설교를 통해 알게 된 크리스티아노스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삶의 전제는? *전제:
*로고스의 레마화 (실천적 삶에 대하여 나누기): | 사역하기 (WORK)1) 오순절 릴레이 기도회 ① 기간: 3월 28일(월)~ 5월 14일(토)까지 ② 시간: 오전 9시~ 오후 9시까지 (1시간씩 담당) (기도를 마친 후 다음 지체에게 문자 남기기) ③ 장소: 교회 혹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2) 중보기도 ① 춘계대심방을 위하여(이영미 셀을 위하여) ② 환우들을 위하여(최정희 집사, 안동철 형제 등등) ③ 5월 사역 나누고 기도하기 3) 헌금 4) 광고: 4월 표어 실천하기(재래시장에서 장보기) 5)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6년 4월 24일 주일 낮 예배 (창립 7주년 기념주일 설교) 제목: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본문: 사도행전 11:25-26
오늘 본문은 스데반 집사의 박해로부터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으로 인해 많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더 이상은 예루살렘에 머물 수 없게 되자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으로 흩어지게 되었음을 유추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본인들이 흩어진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았음을 본문이 분명히 합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이 이동하여 살고 있었던 그곳에서 힘 있게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주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선언하자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이러한 회심의 역사와 은혜가 수리아 안디옥에서 가장 강력하게 일어나자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나바를 그곳에 급파했습니다. 혹시나 모를 이단의 공격에서 형제들을 보호하려는 목적과 또 하나는 잘못된 신학으로 인해 바르지 못한 신앙의 길로 들어설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안디옥에서 회심한 형제들을 영적으로 돌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이런 임무를 안고 수리아 안디옥에 도착했는데 감사하게도 안디옥 형제들의 영적 상태는 생각보다 바른 길로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바나바는 그들의 은혜가 지속되고 사그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것을 독려하였습니다. 바나바의 이런 권면은 안디옥 교회를 더욱 든든하게 하는 주춧돌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믿는 자의 수가 더욱 많아지는 부흥의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음을 누가는 보고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사도행전 11:22-24절). 이렇게 안디옥 교회는 급속히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들자 가장 두려웠던 것은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권위의 아들이었기에 착한 사람이었고,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사람들을 양육하고 가르치고 교육하는 은사에 대해서는 합당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추측건대 그 정도의 지적인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헌데도 안디옥 지방에서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고 두려웠습니다. 그는 그렇게 몰려오는 안디옥의 형제들을 도저히 감당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민감한 고민을 하던 어간, 바나바는 일전에 다메섹에서 회심했던 사울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지적인 수재임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 핍박주의자에서 예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사울이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형제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이런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적극적으로 사울을 변호함으로 그를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형제가 되게 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바울이 옆에 있으면 안디옥 사역이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추적해 보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거주하다가 아라비아 광야로 내려가 3년 동안을 훈련 받고 이후 13년간 고향 다소로 내려가 은둔 아닌 은둔을 하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일하도록 만드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사울이라는 바울을 찾아 수리아 안디옥에서 다소까지 약 175KM나 떨어진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그 긴 거리를 도보로 이동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말로 하기에 아무런 느낌이 별로 없지만 안디옥에 있었던 바나바가 다소를 가려면 길이 잘 닦인 평지 175km가는 것이 아니라 험준하기로 정평이 난 아마누스 산맥을 반드시 넘어야 하는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당시에 도보로 이 길을 걸어 넘는다는 것은 실로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여행길의 각종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다소에 있는 사울을 만나 안디옥 목회를 제안하기 위해 175km를 이동하였다는 말은 이런 기막힌 고난을 전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고향 다소에 기거하고 있는 사울을 찾아간 바나바는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1년 동안을 안디옥에서 머물며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본문은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본문 마지막절인 26절을 봅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은 어원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안디옥에 있었던 세상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호칭된 단어요 명칭이었습니다. 왜 안디옥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습니까? 그것은 오늘날처럼 인격적으로 망가진 자들이 기독교인들을 ‘개독인’이라고 부르는 자들과 같이 예수쟁이들을 비아냥거리는 부정적인 호칭이 아니라 진심으로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의 신앙심을 높이 평가하여 진짜 예수를 잘 믿는 자들임을 언급한 존경의 의미였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수리아 안디옥은 당시 로마가 통치하는 속국이었습니다. 당연히 안디옥에서는 로마의 황제가 유일한 그리스도 즉 메시아이자 구원자입니다. 더욱이 이 당시에 로마의 시저는 글라우디오 황제입니다.(28절) 글라우디오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했던 황제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속국이었던 수리아 안디옥에서도 당연히 자기가 통치하는 식민들이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기를 강요했고 억제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글라우디오가 그리스도였다는 말입니다. 헌데 안디옥에 있었던 예수쟁이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글라우디오가 아니라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반역이요, 식민 통치를 거부하는 중죄였습니다.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없는 막중한 중죄였습니다.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에게서 이것을 보았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에게서 이 점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결단이요, 존경할 만한 신앙은 모습이었습니다. 해서 안디옥에 살던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과 함께 살고 있는 예수쟁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크리스티아누스’ 즉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이라고 복수로 호칭한 것입니다. 이상의 해석이 본문의 주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누가가 보고하고 있는 수리아 안디옥에서의 이 보고의 핵심 단어인 ‘크리스티아누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라는 명칭을 통해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란 과연 어떤 존재들인지에 대하여 거울을 삼을 만한 교훈에 도착합니다.
●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당신들이 만나고 있는 세상의 영역에서 당신들과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이 부정적인 의미로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긍정의 의미로 당신을 그렇게 부를 때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문장으로 표현하니까 수려한 표현으로 교훈을 담았지만 내가 만나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정을 받는 것은 그리 녹록한 게임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는 다른 성경의 다양한 내증들은 차치하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을 예로 이 직설을 선포하겠습니다. 당신이 세상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정을 받으려면 가장 중요한 자세는 자아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아 버리기’ 이것이 전제될 때만 당신은 크리스티아노스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마누스 산맥을 넘어 175km 라는 대장정에 나선 바나바를 소개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대장정임을 설명 드렸습니다. 그러면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십시다. 바나바가 이 험난한 길 떠나기를 결심하고 그렇게 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한 대가가 바나바에게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175km의 살인 일정을 소개하면 그만한 일을 행한 뒤의 대가가 바나바에게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그러면 설교하는 이 목사도 참 설교하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헌신했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왕창 복주셨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유감스럽게 성경은 단 한 줄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바나나는 이 여행을 통해 자신의 굳건하게 갖고 있었던 안디옥 교회에서의 제일 리더십을 바울에게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어느 모임이든 가르치는 자가 리더입니다. 바울은 안디옥에 바나바를 따라 와서 그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가르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바울의 사역은 훗날 사도행전 14장에 기록된 제 일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사역지인 루스드라 사역을 기점으로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리더십이 사도행전 15장부터는 ‘바울과 바나바’라는 리더십으로 역전됩니다. 그렇다면 바나바는 175km의 대장정을 통해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온 것은 시쳇말로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이 된 셈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지극히 세속적인 판단입니다. 바나바에 관련된 오늘 본문의 기록을 참고할 때 지성적 판단을 뛰어넘는 영성적 판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아 버리기’입니다. 바나바는 자기의 리더십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는 것을 결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누가 제일 상석에 앉아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자기를 제치고 리더가 되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나바의 ‘자아 버리기’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말처럼 쉽습니까? 바나바는 자아 버리기를 통해 안디옥 교회라는 공동체에 있었던 형제와 자매들에게 지극히 큰 선물을 안겼습니다. 그것은 그 공동체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칭을 얻게 하는 선물 말입니다. ‘비로소’ 의 번역인 헬라어 ‘프로톤’은 ‘최초’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참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바꾸어 읽어보겠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6절)
창립 7주년을 맞이한 세인교회, 제천에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감당했다고 인정받는 최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