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5.12.13 셀 사역2024-04-22 16:0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 지난 주에 나눈 신구약 말씀 암송하기.
● 혹시 살면서 캄캄한 곳에 있게 된 처지 때문에 난감했거나 두려웠던 경험담 나누어 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빛의 사자들이여 (찬송가 502장)
● 작은 불꽃 하나가(복음송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요한복음 1:9-13
● 제목 : 빛이 있었으나
1) 어둠의 속성을 설교에서 무엇이라고 갈파했습니까?


  

2) 1번 항목과 관련하여 어둠의 속성을 영적인 시각에서 해석한다면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3) 설교에서 선포된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는 방법인 주님과의 관계 맺기를 요시야 왕에 대한 성경적인 내증으로 풀어 설명해 봅시다. 동시에 대강절과 성탄의 절기에 관계 맺기의 구체적 실천 방안들을 모색해 봅시다.
● 요시야 왕과 관련하여 설명해 보기:
● 구체적인 실천 방안 모색하기(예: 구세군 자선냄비에 기부하기 등등)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교회의 기도 제목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② 환우들을 위하여
  ③ 대강절을 보내며 성탄의 기쁨을 전하기 위하여
  ④ 성탄 축하의 밤 예배를 위하여
  ⑤ 명품신앙으로 한 해를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5)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015년 12월 13일 주일 낮 예배 (대강절 세 번째 주일)
제목: 빛이 있었으나
본문: 요한복음 1:9-13

  성경에 기록된 아기 예수 초림 시의 정체성을 시의 적절하게 표현해주는 본문이 요한복음 1장입니다.
예수님은 빛 중의 빛으로 분명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기자는 예수님을 ‘참 빛’이라 했습니다. 참 빛으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어두움으로 인해 이 땅에 잠식된 불완전한 형국을 빛으로 완전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만드시는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5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직시하며 설파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그 답을 본문 10-11절에서 말씀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 구절에서 빛으로 오신 주님을 깨닫지 못한 어둠의 속성 두 가지를 발견하는 교훈을 받습니다.

1) 어둠은 항상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세상에 계셨다고 강력하게 선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존재하시던 영역은 저 멀리에 있는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셨습니다. ‘세상’으로 번역된 ‘코스모스’는 사탄의 영역입니다. 21세기 최고의 명설교가이자 성서해석자라고 지칭 받는 미국의 그레이스 커뮤니티의 존 맥아더 목사는 자신의 성경주석에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세상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악의 체계 그리고 사탄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모든 것이다.”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사탄에게 잠식당한 세상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에베소서 2;2) 그런데 왜 주님이 이런 세상에 오셨고 또 거기에 거주하셨는지 본문 10절 중반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사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세상을 지금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을 뿐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한시적으로 사탄에게 잠식된 것뿐입니다. 주님은 원래가 주님의 것이었던 세상을 되찾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빼앗긴 이 세상을 주님이 되찾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문제는 한시적으로 세상은 사탄의 지배 영역으로 잠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세상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0절 하반절). 그러므로 어둠은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어둠에 포로 된 자들은 당연히 빛을 거부하거나 싫어합니다.
  사도행전 3장, 4장의 기사를 보면, 앉은뱅이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낫게 한 베드로와 요한은 솔로몬 행각에 모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가 복음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었던 유대인들 중에 상당수가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일하심으로 인해 구원 받는 자의 수가 많아지는 그 현장에 갑자기 당시 종교기득권으로 갖고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던 산헤드린 공의회의 주요 인물들이 그 현장에 급습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고 구금하는 물리력을 자행합니다. 그 때의 상황을 누가는 사도행전 4;2절에서 이렇게 고발합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싫어하되’ 라고 번역된 ‘디아포네오’ 는 단순히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질적인 반응을 하며 못견뎌하는 싫어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적인 영역의 전문가라고 하던 자들인 제사장들, 사두개인, 성전 맡은 자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예수를 이토록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싫어했는가 살펴보면 이들은 하나님이라는 종교 이름으로 탈을 썼지만 이미 존 맥아더 목사가 말했던 그 ‘세상’에서 사탄의 권세에 짓눌려 있음으로 실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하여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탄의 지배함에 통치되고 있는 자들은 어둠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말은 결국 이렇게 사탄에게 지배되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사탄으로 인해 영적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무지할 수밖에 없도록 공격 받고 있는 셈이 된다는 말입니다. 복음에 대한 무관심, 예수가 나의 주군인 것에 대한 냉랭함, 복음의 능력 앞에 무력하여 주의 보혈이 1인칭으로 적용이 되지 않는다면 불행히도 그런 자신이 지금 어둠에 거하고 있음을 명심하시고 긴장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3:33절의 표준 새 번역이 원문에 충실한 번역입니다. “이 백성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이 너에게 와서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 있느냐고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여라.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느냐?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 그래서 내가 이제 너희를 버리겠다 말하였다고 하여라” 어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마땅히 무지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이 되든 부담스러워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도리어 하나님이 더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어둠은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게 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이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통치와 권세에 짓눌려 있는 어둠의 자식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현실적인 영의 상태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어둠들은 계속해서 어둠에 있기를 갈망했습니다. 어둠이 어둠으로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은 빛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의 이런 소망은 산산조각이 날 처지에 빠졌습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자기의 것을 되찾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빛이 오시는 순간 어둠은 자기들의 모든 것을 잃을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어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빛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싸움은 빛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싸움을 11절에서 이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다.’ 는 헬라어 ‘파라람바노’는 문자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주님을 신뢰한다는 의미에서 벗어나 한 개인이 전인격적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그 분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빛으로 자기의 세상에 오신 것을 극도로 거부하는 상태는 어둠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이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이 전쟁은 항상 진행형일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은 빛이 빛을 비추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이미 사탄의 영역에서 지배받고 있는 존재들로 하여금 그 빛을 받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적인 기상도 아래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자세는,
 *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 맺기입니다.
  본문 12-13절에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의미는 결코 형식적인 영접이 아닙니다. 본문 12절에서 말하는 참 빛이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주님을 받아들여 그 분과 하나 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맺기가 영접하는 것임을 전제할 때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예레미야 22장에서 살펴봅시다.
  유다 왕 요시야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망가뜨린 하나님의 신앙을 바로 세우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고 우상의 산당들을 척결하는 등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정치를 전개함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아들들이 다시 유다를 망쳐버립니다. 여호아하스는 삼 개월 만에 애굽의 바로인 느고에 의해서 폐위가 되고 또 다른 요시야의 아들인 엘리아김이 여호야김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개명되어 힘없는 꼭두각시 왕으로 등극하여 유다를 다스리게 됩니다. 나라의 사정은 바람 앞의 등불인데 여호야김은 자신의 궁전을 세우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각출하고 힘이 없는 서민들을 압제하여 노동력을 착취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런 기막힌 상태를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현현하셔서 여호야김 앞에서 설교를 통해 어떻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를 목숨을 걸고 선포하라고 명령하셔서 그 명령에 순종하여 왕에게 설교하는 어간에 여호야김의 아버지인 요시야의 선했던 행적 중의 하나를 인용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22:16절을 소개합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버지였던 요시야는 너 여호야김과는 달리 항상 가난한 자의 편에 있었다고 술회합니다. 요시야는 궁핍한 자의 변호인 역할을 했다는 역설을 선포합니다. 지금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아들인 너 여호야김과는 차원이 달랐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하나 던집니다.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주님을 안다는 것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인데 예레미야를 통해 요시야의 삶을 반추하고 있는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돌보는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빛이 있었던 그래서 온 세상이 밝았던 그 세계가 우리들이 목적하는 주님의 나라입니다. 이렇게 빛이 있었지만 어둠에 잠식당한 오늘, 잠깐 사탄의 세계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지 최종적인 결론이 아닙니다. 결론은 빛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 날이 머지않았기에 우리는 빛에 거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와 고통을 받는 자인 나의 이웃과 함께 하십시다. 그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알고 그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는 대강절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