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 태신자 섬김에 대하여 간증하고 나누며 협력하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찬송가 569장) ●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데살로니가후서 3:13-15 ● 제목 : 힘은 선하게 쓰십시다. 1) 데살로니가 지체들이 낙심할 수 있었던 상황을 본문의 배경과 오늘의 상태로 설명해 보자. ● 본문의 배경을 중심으로 ● 오늘의 상태에 적용한다면 |
2) 바울이 결코 낙심하지 말라고 권한 이유는 무엇인가? 설교의 테마를 중심으로 말해보자. ● 선이 하나님의 올바른 뜻이라는 전제 속에서 설명해 보자. ● 참고 요한일서 5:14절, 요일 5:4-5, 누가복음 22:35절 |
3) 그리스도인들이 힘과 물리력을 선하게 사용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 본문 14-15절을 마태복음 13:24-30절에 나오는 가라지 비유에 연관하여 설명해 보자. (설교와 차정식 교수의 글 참고) ●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연약한 자에 대하여 올바른 그리스도인들이 대하여야 할 태도는? (설교를 참고하여 말해 보자.)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② 가을 열린 모임 6차 사역을 위하여 ③ 추계 셀 대 심방을 위하여 - 한명복 셀(금) ④ 대입 준비를 위한 수능생들을 위하여(11/12) (곽보람, 서혜린, 섭현우, 이주원, 정승민, 차수빈) ⑤ 중보가 필요한 지체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5)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5년 11월 8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제목: 힘은 선하게 쓰십시다.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3:13-15
오늘날 현대인들의 자화상은 첨단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나약한 소외’를 경험하게 되면서 진리가 아님에도, 올바름이 아님에도 물리력이 센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물리력이 바르게 사용되지 않으면 그것은 폭력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득권 유지를 위한 물리력이 아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보여주는 진정성 있는 고민을 우리도 사유해야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진의는 영적인 곤비함에 노출되어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절대로 열심히 일하는 선을 행하다가 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흔들리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의 공격과 술수에 넘어가지 말 것을 권면하면서 자기의 일을 부단히 감당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것을 재차 데살로니가 교회의 정상적인 형제들에게 당부하였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상식의 도를 살고 있었던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믿고 달려가려면 악한 자들이 부화뇌동을 하고 시비를 걸고 어리석은 노동을 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주후 1세기 데살로니가 지역에서만 일어난 정황만이 아닙니다. 나는 주 안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최선을 다해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식이라고 믿고 달려가지만 편법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 그러고도 끄떡없이 세상에서 큰 소리치고 살아가는 자들을 보면 우리도 역시 갸우뚱하며 흔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진단이 심해지고 또 심해지면 흔들리며 넘어지고 결국엔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바울이 본문 13절에서 역설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한 선은 바로 열심히 일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노동이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소명으로 믿고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삶입니다. 이 삶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 전부에게 AD 1세기부터 21세기를 아울러 바울은 절대로 열심히 일하는 선을 행하다가 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흔들리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똑같은 흐름으로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에게 선포했던 권면에서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오늘 설교의 첫 번째 은혜는, 1) 선은 반드시 이기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둔다는 바울의 외침은 “선은 반드시 이긴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단어 ‘선’은 본문 맥락에 의하면 게으른 자들과는 같이 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선’을 해석한다면 그 선은 ‘하나님의 올바른 뜻’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해야할 믿음의 정수입니다. 사도요한은 자기의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요일 5:4-5) 이렇게 선포한 요한은 곧이어 또 다시 이렇게 강하게 외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 5:14) 그렇다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신다는 은혜를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이전 전도 사역을 내보냈을 때를 추억하는 내용이 최후의 만찬을 기록한 누가복음 22:35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날 저녁, 이제 얼마 있으면 홀로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누가복음 22:35절 전반절). 이 질문에 직접적인 현장에서 승리를 경험했던 제자들이 “이르되 없었나이다”(누가복은 22:35절 하반절)라고 답변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라는 방향성 하나면 승리한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문제는 이 고백을 한 제자들의 고백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한 것을 재차 확인하셨던 주님이셨지만 제자들은 그 다음 날, 모두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한심함을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선을 행하면 반드시 거두게 하신다는 주님의 은혜와 약속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절에서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가의 다락방으로 통상 이해되는 오순절 성령이 임했던 이 장소에 모여 있었던 신도의 수가 120명 정도였습니다. 자세히 살필 것은 이 120명의 신도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입니다. 초대교회는 가정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락방은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추측되는 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임에 참석했던 인원을 120명 정도로 보고하고 있는데 이들이 모임에 앉아 있었다고 기술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전심으로 기도할 때는 서서 기도하든지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당시 상황을 놓치지 않고 ‘앉아’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다락방 안에 들어와 앉아 있었던 120명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듣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를 주목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380명 정도의 무리들은 다락방 밖에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희비의 쌍곡선이 그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배우고 그 뜻을 실천하는 자들에게는 궁극적인 이김이 있습니다. 웬만해서는 쓰러지지 않으며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길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되 결코 낙심하지 맙시다.
2) 힘을 선하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본문 14-15절). 바울은 이 편지를 읽는 자 중에서 게으른 자들은 분명히 순종하지 않을 것임을 예견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암적 존재들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교회에서 사라져야 마땅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사라져 준다면 교회가 평안해 질 것 같은 것이 통상적인 마음입니다. 누구보다도 바울은 눈물과 땀과 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기에 게으른 자들은 눈에 가시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게을러서 교회를 힘들게 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 지를 알려주는 권면이 본문에 보입니다. ①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② 그로 하여금 자신의 소위가 부끄럽다고 인정하도록 노력하되, ③ 원수로 여기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를 종합하면 힘으로, 물리력으로 그들을 제거하지 말고 사랑으로 권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권면은 힘을 선하게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라지 비유(마태복음 13:24-30절)를 한일 장신대학교의 차정식 교수가 쓴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에서 그는 이 비유를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농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는 제자들에 해당되는 자들이다. 그들은 공동체의 지도자들이다. 그들이 통제하고 케어 해야 할 대상자들 중에는 가라지와 같은 허접한 인생이 있고 또 어떤 자는 튼실한 알곡 같은 신자도 있을 것이다.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알곡은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협력하게 하는 동역자로 쓸모가 있어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요긴한 존재이고, 가라지는 노력이 많이 들어가고 효용의 가치에 있어서도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별로 중요시 여김을 당하는 존재가 아니지만 그것은 인간의 시각으로 본 주관적 판단이다. 해서 이런 흑백논리와 같은 평가로 알곡과 가라지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훗날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함수관계를 인정한다면 가라지가 알곡이 되고 알곡이 가라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판단은 신중의 신중을 기해야 한다.” 분명히 게으른 자는 문제투성이의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돌아설 여지까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영국이 낳은 유대인 신학자로 유명한 조너선 색스가 ‘차이의 존중’에서 “차이가 전쟁으로 이어질 때는 쌍방 모두가 패배했다. 거꾸로 차이가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할 때는 양쪽 모두 승리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세인 공동체는 다름에 대해 물리력을 동원하여 압제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힘을 사용할 때는 선하게 사용합시다. 왜냐하면 그 힘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고 주신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선교 초창기에 기독교를 가리켜 예수 도(道)라고 지칭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도를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의 도를 믿고 순종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힘을 막 사용하는 자는 도를 믿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힘을 선하게 사용하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서 일탈하면 목을 걸 각오로 힘을 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악하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힘을 선하게 사용하여 반드시 궁극적으로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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