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그냥 살아내자2024-03-07 14:54
작성자 Level 10

2021년 7월 18일 주일 오전 예배

 

제목그냥 살아내자

본문마태복음 27:39-44

 

서론)

 

지난 주간 방송되었던 tv.N에서 방영하는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에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두고 있는 구글의 디자인 분야에 수석 책임자인 김은주 디자이너가 게스트로 출연했습니다.

MC들과 대담하는 중에 그녀가 세계 최고의 IT 그룹인 구글에서 디자이너 분야의 최고의 디렉터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솔직 담백하게 나누는 방송을 보다가 한 컷에서 멈추었습니다.

구글에서 근무하던 한 시절극심한 슬럼프에 빠진 그녀는 회사 내의 카운셀러에게 자기의 고충을 털어놓기로 한 것입니다.

미국에 온 이유는 한국의 한 대기업에서 그런 데로 잘 나가는 직장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이유는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가는 자신이 싫어 그 우물 안에서 나와 그 넓은 바다인 미국으로 직장을 옮겼고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랐는데 거기에서 만족하지 못하고그 직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또 기를 쓰고 있는 자신을 보며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어 카운슬러를 찾았고 이 고충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김은주 수석 디자이너의 상담을 받은 카운슬러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답니다.

제 말로 해석해서 전언해 드리면 이런 말입니다.

은주지금 슬럼프에 빠져서 여러 가지 돌파구를 찾으려고 이것도 해보고저것도 해보는 당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다그러니 한 가지만 더 하자최선을 다하고 있는 당신에게 조금은 더 친절하게 대해 주자.”

이 말을 듣고 그녀가 다시 생각한 것이 있었음을 이렇게 부연했습니다.

그녀의 이 말에 제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개구리다그런데 내가 정말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우물 안에 개구리는 그냥 괜찮은 개구리였다문제는 내가 우물 안에 있다는 것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것이다나는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을 해서 바다 개구리가 되려고 했다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바다 개구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개구리가 바다에 가면 살지 못한다죽는다이제부터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 같은 나를 존중하며 살겠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나서 더 자유롭게 본인의 삶을 승리했고 지금은 구글 본사의 디자인 수석 책임자의 자리에 까지 올라서게 되었다고 술회했습니다.

지난 주간김기석 목사가 쓴 그리움을 품고 산다는 것이라는 김 목사의 목회서신을 읽고 서평을 써서 제 SNS에 게재했더니 제 글을 본 친구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사역의 패턴을 바꿔야 할 때다앞으로 이런 기후 변화로 일상에 엄청난 일들이 자주 일어날 것이고팬데믹 같은 일도 자주 일어날 것이니 심각하게 사역의 형태에 변화가 일어나야 하지 싶다비대면 시대어쩌면 하늘이 준 기회일 수도.”

친구가 진정성을 갖고 제게 충고해 준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너머의 것을 꿈꾸고 있는가나는 말도 안 되는 유토피아적인 이상향을 꿈꾸며 달려가는 목사인가이것을 이루기 위해 나는 나를 옥죄면서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나곱씹어 보았습니다.

친구의 글을 읽고성찰한 뒤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역의 형태를 바꾸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니다그냥 위탁해 주신 교회를 묵묵히 섬기련다나는 나의 능력이 어디까지인 줄 잘 알기에.”

 

본론)

 

오늘 본문에서 저는 짜릿한 주군이 주시는 감동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본문이 대단히 우울한 모드를 갖고 있는 주님이 당하신 치욕의 기사라고 평가하지만주어진 오늘 본문에서 저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선택한 주님만이 갖고 계신 엄청난 권위압도적인 영적 카리스마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본문이 제게는 대단히 은혜롭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주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본문 39-40절을 읽어보십시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이 본문을 보면 눈에 또렷이 보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나는 가는 자들’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시민들입니다.

이들은 불과 5일 전에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던 자들입니다.

대제사장서기관장로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주님을 이렇게 희롱했다고 했습니다.

성전을 사흘에 짓는 자여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또 한 부류들이 있습니다.

본문 44절에 등장하는 마지막 인물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그렇습니다강도들이었습니다그런데 그들도 초록이 동색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같은 편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단 한 부류도 주님의 십자가 지심을 이해하는 부류는 없습니다.

풀러 신학교 신약학 교수인 도널드 헤그너는 오늘 본문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던지는 불신과 비꼼과 비난이 곁들여져 있는 희롱이었다.” (도날드 해그너, “WBC 주석-마태복음”, 1260.)

심지어 헤그너는 혹시나 모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진 자들이 내뱉은 것처럼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을 이루었을 때도 종교인들을 비롯한 그들 모두가 이렇게 방어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마술을 부렸기 때문이다.” (위의 책같은 페이지)

소위가 매우 악합니다.

이렇게 예수에 대하여 극단적 적대 감정을 갖고 있는 자들은 예수에 대하여 조금의 신적 위상이나 여백을 남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런 극단의 반대자는 아니지만 예수를 신앙적 주군이 아닌 역사적 예수로 해석하는 오레곤 주립대학의 종교학 교수이자 유명한 역사적 예수주의자인 마커스 보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사건을 철저히 역사화 해서 해석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이유는 그가 사회적 예언자로 당시 지배체제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전하였기 때문이다다시 말해서 나는 예수가 단순한 신비가치유자지혜의 교사였다면 처형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그는 또한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종교적인 사회적 예언자로서 추종자들을 모을 수 인물이었을 것이다.” (마커스 보그 톰 라이트, “예수의 의미”, 한국기독교연구소,153)

정말로 그렇습니까?

예수께서 단순히 신비로운 보여주는 마술사입니까?

그 분은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났던 지혜가 많았던 선생이었습니까?

아니면 주님은 진짜 정치적인 선동가였습니까?

그럴 리가요.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예수의 적대자들은 물론예수를 역사적 예수로 해석하며 신앙적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조금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대단히 아이러니하지만 의미 있게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추종자들이 행한 말이 아니라 예수를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결심으로 뜻을 합한 총체적 무리들이 비꼬는 말로 내뱉은 그들의 토로를 단 1%의 이견 없이 믿습니다.

본문 4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그렇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를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그 분이 갖고 계시는 흔들리지 않는 성자의 영성입니다.

①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②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주께서 왜 수많은 자들의 조롱과 핍박 그리고 수치스러움을 주는 모욕을 당하셨는데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해그너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십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신다는 것은 그가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경험하고 극복했던 유혹인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었다동시에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당히 죽음에 맞서라고 말한 예수 자신의 권고에 모순되는 것이었다핵심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예수께서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뜻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도날드 해그너, “WBC 주석-마태복음”, 1261.)

우리는 이 해석을 통해 큰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가 오늘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대단히 중요한 주님이 행하셨던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위로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삶을 살아내신 것입니다.

 

주군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이 걸어야 했던 길을 묵묵히 걸으셨다는 말입니다.

수없이 많은 유혹의 잔을 비우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그냥 묵묵히 주님은 당신에게 맡겨진 길을 요동하지 않고 걸었다는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돌을 떡으로 만들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해 주겠다는 유혹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높은 데서 뛰어내릴 때천사들이 너를 보호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게 되어 여론전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유혹은 거절하기 쉽지 않은 더 큰 메리트가 있는 매력일 것입니다.

딱 한 번만 내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부와 권세와 영광을 다 네게 줄 것이라는 사탄의 유혹 역시 넘어가 볼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유혹들을 일거에 물리치셨습니다.

도리어 주님은 주께서 가야하는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다시 오늘 설교에 맞게 적용한다면 주님은 주께서 살아내야 하는 삶의 내용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주군이 이렇게 하셨다면 그 분의 팔로워들인 우리들이야 무슨 다른 변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마땅히 우리도 주님이 걸으셨던 이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의무이며미션 수행이지 않겠습니까?

그림 하나 보겠습니다

(홈페이지 겔러리 참고)

아제르바이젠에 거주하는 교포 중에 저와 인터넷으로 교제하는 김충석 집사 가정이 지난 주에 제천을 방문해서 교제했습니다.

그의 남동생인 김우석 안수집사가 지난 화요일 우리 교회에 방문하여 제게 준 선물 액자 그림입니다.

디자이너인 김우석 안수집사께서 작품 제목을 ‘by faith'로 정한 이유는 제 설교 중에 마태복음 14:25-31절을 근거로 증언한 말씀을 듣고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빠져갈 때 주님이 그를 건지시기 위해 손을 내미신 기사입니다.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다가 작품을 만든 집사님의 후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섬기는 교회를 참 많이 사랑하는 데설교를 경청하다가 한 가지 유감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음을 솔직히 토로했습니다,

그의 토로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 안에서 잘 되는 것만이 복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성도가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 그것은 뭔가 부족한 신앙의 이유 때문이라고 설교에서 치부하는지 모르겠습니다본인은 삶의 현장에서 계획했던 일이 잘 안 되고술술 풀리지 않을 때를 수없이 경험하는데 그렇다면 그때마다 나는 뭔가 하나님께 불충성하고잘못된 길로 이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적어도 제가 경험하는 은혜는 일이 잘 안 풀릴 때계획한 것이 틀어질 때내 마음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더 하나님의 소리가 잘 들린다는 것입니다저는 도리어 흔히 말하는 성공의 자리에 있을 때보다 실패를 경험하는 어려움의 자리에 있을 때 주님과 더 가까이 있습니다목사님이 언젠가 설교 중에 선포하셨던 베드로가 물에 빠진 이유는 주님을 바라보던 믿음의 무게보다 넘실거리는 물결의 두려움의 무게가 더 크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근래 들었던 평신도 사역자가 전한 메시지 중에 가장 큰 감동의 전언이었습니다.

제가 농 반 진 반으로 그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혹시 부산에서 이사할 일이 있으면 제천으로 이사하세요.”

제가 교제했던 집사님에게서 받은 감동은 이것입니다.

내게 닥치는 일체의 일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계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걸으라고 하신 제 삶임을 믿기에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내겠다는 고백이 감동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분위기는 모두가 주님을 비꼬고비난하고가볍게 여겨 치욕을 안겨주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주님에게는 하등의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삶에 요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맡겨진 길을 걸으셨습니다.

?

그것만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대업을 성취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했기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이렇게 선언하실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30절입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오늘 설교를 오늘의 언어로 적용하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 그리스도인으로 내게 주어진 삶의 내용을 묵묵히 살아내는 지체들입니다.

 

누가복음 14:15-24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해서 많은 사람들을 청하였는데 사람들이 거절한 기사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거절한 이유는 밭을 사서 일해야 하기 때문이었고어떤 사람은 소를 사서 그 소의 능력을 시험해야 하는 바쁜 일정이 있기 때문이었고또 어떤 이는 장가를 가서 집안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러자 환대를 거절당한 잔치 베푼 사람이 하인들을 시켜 더 악조건에 있는 불편한 자들을 초대했고강권하여 혼인잔치를 채운 자들로 인해 잔치가 끝났을 때 의미 있는 주인의 선언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초대된 자들은 다시는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입니다.

이 비유를 주께서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택함을 받은 자들의 것이 아니라 청함에 응답한 자들의 것임을 실로 알게 해주는 종말론적인 비유임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소개한 누가복음의 이 비유와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2:2-3절에서 잔치에서 청함을 받았지만 거절한 자들의 이유를 아주 명쾌하게 진단합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보여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적 반응이 있습니다.

그것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미션이고사명입니다.

그러기에 이 미션과 사명은 회피의 요소가 아니라 반드시 살아내야 하는 우리들의 의무입니다.

싫어하면 안 됩니다.

아니 싫어도 성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반드시 살아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주군의 삶을 조명 받아 그리스도인으로 내가 짊어져야 하는 내 영적 미션을 살아낼 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주간에 나사렛 신문사에 8월호 외고를 기고했습니다.

김기석 목사가 쓴 그리움을 품고 산다는 것에 대한 평론입니다.

그 중에 한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펜데믹이 시작되면서교회는 사지로 내쫓김을 당하는 것과 같은 무수한 언어폭력과 물리적 압박에 시달렸다교회 밖이라는 로컬에서 무신론적 가치로 무장한 자들에게는 교회가 백해무익한 집단으로 매도되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낙인찍히며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았다설상가상으로교회 안에 있는 무신론적인 종교인들에게는 교묘하게 포장된 갑각류적인 영성이라는 무기로 더 예리하게 난도질당하는 가중적인 고통을 당했던 것이 사실이다그리고 사정이 이러다보니 살아남기 위해 나 또한 공격적으로 변하고섬기는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전투적 체질로 변화시키려는 가르침에 올인 하였던 어리석음을 저지른 듯하다주군은 당신의 삶을 언제나 이타적 관계로 저인망을 넓혀 스프랑클니조마이’ 즉 불쌍히 여기심으로 드러내셨는데 말이다아직 멀었다주님 닮으려면.”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말장난이 아니라 제 4차 코로나바이러스의 대 유행에 들어선 오늘슬프고 아픈 소리에 시시비비하지 않고 주군께서 제가 주신 교회를 교회답게 섬기라는 미션을 그냥 살아내려고 합니다.

제 외고의 마지막 글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 낯선 방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소리들이 함께 있다.”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p,110.)

오래 전에 만난 나희덕 시인의 이 읊조림을 다시 끄집어내 주절거리는데 울컥했다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은 소리다나는 그 소리들과 함께 있다내가 쓰러지지 않는 이유는 이 소리들이 내 옆에서 연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그 소리를 세밀하게 들어야지그래서 나도 소리가 되어 주어야지그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명 하신 말씀의 레마를 붙들고 끝까지 우리들이 살아내야 하는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길 나도 따라 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