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전쟁 같은 사랑2024-03-07 14:52
작성자 Level 10

2021년 6월 2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쉰 한 번째 강해)

 

제목전쟁 같은 사랑

본문고린도후서 13:5-10

 

서론)

 

제가 말하는 변화에 대한 이 거친 생각들그걸 바라보는 전통적 당원들의 불안한 눈빛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우리의 변화에 대한 도전은 전쟁과도 같은 치열함으로 비춰질 것이고이 변화를 통해 우리는 바뀌어서 승리할 것입니다.”

이번에 제 1야당인 국민의 힘 당 대표로 취임하게 된 36세의 이준석씨가 수락한 연설문 중에 일부입니다.

제가 국민의 힘 당 대표를 설교에서 거론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요즈음 그를 통하여 세대교체라든지 혹은 20,30세대의 정치 변화 등등의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어 저 역시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것이 조금 많아졌는데 그 중에 하나가 지금 소개한 수락연설문입니다.

소개한 그의 연설문을 듣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익숙한 글말들이 있어 솔깃했는데 바로 이 대목입니다.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전쟁 같은 치열함’ 등등이었습니다.

바로 대중가수로 유명한 임재범씨가 부른 너를 위해라는 노래에 나오는 다음의 가사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너를 위해의 가사 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그걸 지켜보는 너/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가수는 노랫말에서 통속적이기는 하지만 아주 의미 있는 가사를 노래합니다.

사랑을 정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 같은 사랑

노랫말이 의미 충만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사랑인데 전쟁 같은 사랑이라는 서로 맞지 않는 단어가 절묘하게 조합을 이루어 기가 막힌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중가수가 노래한 노랫말이 정답인 것 같습니다.

사랑이 치열하지 않으면 어찌 그게 진정한 사랑일 수 있겠습니까?

디베랴 호숫가로 낙향하여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주님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주님배알도 없으십니까그런 나쁜 놈에게 아직도 무슨 미련이 남으셨다고 거기를 찾아가십니까?

이래야 정상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진짜로 배알도 없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찾아가신 것도 속이 뒤틀리는 일인데 찾아가셔서 마치 베드로에게 사랑구걸을 하는 듯한 인상의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시니 말입니다.

요한복음 21:15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이어 16-17절에도 다시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 내용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입니다.

왜 주님이 배신한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이렇게 세 번이나 질문하셨을까요?

베드로를 사랑한 사랑이 치열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전쟁 같은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은 정말로 전쟁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본론)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4번째 내지 5번째의 편지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글에서 그가 갖고 있었던 치열한 사랑의 속내를 드러냅니다.

5-7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우리가 버림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이 구절을 톰 라이트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해 보십시오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여러분은 메시아 예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줄을 깨닫지 못합니까그렇다면 여러분은 시험에 낙제한 것입니다내 바람은 우리가 시험에서 낙제하지 않았음을 여러분이 발견하는 것입니다하지만 우리는 여러분이 결코 어떤 악도 저지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그것은 우리가 합격자임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우리가 낙제한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여러분이 옳은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고린도후서”, IVP, p,190.)

쉽게 번역된 버전으로 접하니 의미가 들어오십니까?

이 구절에서 아슬아슬하지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상존하고 있었던 두 종류의 사람 즉 적대자와 그에게 넘어간 배신자들에게 공히 질문하고 있는 내용이 의미심장합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단호하게 묻습니다.

너희들이 믿음이 있는 자들인지에 대하여 분명히 자문하라고 교훈합니다.

그 자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희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하라고 다그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일갈합니다.

만에 하나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면 너희들은 옳은 자들이다하지만 만에 하나 계시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버림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바울의 집요함입니다.

어떻게 집요합니까?

나는 너희들이 버림을 받은 자가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버림을 받은 자라고 하더라도 결코 너희들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지금까지 당신들이 우리들(바울디도또 다른 동역자)을 마뜩치 않게 여겼어도 우리는 당신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

여러분도 결국에는 옳은 일(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하게 될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옳은 일을 하는 자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이어지는 8-9절에서 천명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바울이 본인뿐만 아니라 편지의 수신자들인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배신자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게 되는 일 즉 옳은 자가 되는 구체적인 내용을 전해 줍니다.

① 진리에 거슬리지 않는 자

② 온전하게 되는 것.

바울이 이렇게 편지의 말미에 전언하고 있는 이 두 가지의 메시지는 고린도교회 안에서 음행을 하고 있는 자들의 전향적인 회개를 촉구한 것이고 돌이킴이 있을 때 이렇게 될 것을 시사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의견을 개진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온전하게 된다는 말이 그래서 설득력이 있습니다.

9절에 기록된 온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단어 카탈티시스의 문자적인 의미는 성()을 만드는 데 빈틈이 없이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카탈티시스를 빈틈이 보이지 않는 완전함(perfection)’이라고 NIV 성경은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9절까지의 본문 이해와 더불어 주제 절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10절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글로 쓴 고린도후서 1-13장까지의 메시지는 치열함의 연속이었습니다.

때로는 분노의 분노를 일으켜 바울은 대노하기도 했습니다.

해서 다시는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분명한 리더십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진짜로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은 한 줌의 재보다도 못한 몇 푼의 물질(사례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선 너희들이라는 격정의 심정을 토해내기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14절 중반절을 다시 읽어 볼까요.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보면서 희로애락 했던 바울이기에 본문 10절에서 그 치열했던 과정의 결론을 이렇게 적시한 것입니다.

다시 만날 때(세 번째의 방문으로 여겨짐내가 진짜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은 넘어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세우려 함이라고 결론을 맺은 것입니다.

넘어뜨림이 아닌 세움이라는 바울의 정점 찍기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경험했던 전쟁 같았던 사랑의 결론은 넘어뜨림이 아닌 세움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설교의 레마를 받겠습니다.

※ 성도는 무너지게 하는 자가 아니라 세워가는 자입니다.

 

베다니에 거주하던 한센 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주께서 거주하실 때 한 여자가 급습했습니다.

그 여자는 옥합을 깨뜨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나드를 주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가는 이 나드의 가격이 300데나리온이라고 설명하고 있을 만큼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 집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화를 내기 시작한 이유는 그 값진 것을 한 사람에게 허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시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자를 무너뜨리며 몰아치기를 한 것입니다.

허나 예수님은 그녀를 보호하시면서 이렇게 세우셨습니다.

마가복음 14:6-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6절에 기록된 괴롭게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코포스는 문자적인 뜻이 때리다는 뜻입니다.

시몬의 집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주님의 죽음을 장사하기 위해 향유를 드린 여인을 정서적으로 몰아붙이며 공격했습니다.

곧 그녀를 타격한 셈입니다.

다시 그녀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아침에 서재를 나가면 조간신문을 세밀히 읽는 편입니다.

읽으며 느낀 소회는 진보적인 성향의 경향신문이나 보수적인 계통의 국민일보나 오십보백보의 느낌을 주는 것이 있는데 정치경제사회문화심지어 종교까지 깎아 내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기사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특히 대통령 출마를 하고 있는 자들을 보면 가관입니다.

서로를 무자비하게 타격하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마치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향하여 비난과 조소로 일관하던 시몬의 집에 있었던 있으나마나 했던 좀비들처럼 지금 이 땅에도 남을 죽이려는 좀비들로 넘쳐나는 듯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이나 배신자들이 치사한 행동을 접할 때마다 정말로 그들을 치리할 대상이라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극적인 반전이 본문 10절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치리였습니까?

깎아내리기였습니까?

그렇다면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존재하던 적대자와 초록이 동색이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감동적으로 바울의 결론은 그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울은 무너뜨림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세우기였습니다.

다시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마치 주님이 핍박 받던 향유를 드린 여인을 보호하시며 그녀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며 그녀를 세워주셨던 것처럼 바울도 교회와 성도 세우기를 궁극의 목적으로 삼았다는 것은 감동의 레마입니다.

지난주간에 이정화전도사께서 제게 책을 한 권 선물했습니다.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응교 교수가 코로나 19로 인해 아파하는 자들을 위해 시평한 질병과 슬픔 앞에서 손 모아라는 책입니다.

51개의 명시들을 소개하면서 이 시들을 해제한 저자가 아픔을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메시지를 감동적인 수필 형식으로 기록한 참 좋은 책이었습니다.

그 중에 어린이동화작가이자 충주의 한 교회의 종지기로 평생을 살았던 강아지 똥의 작가인 권정생 선생의 시를 한 편 소개합니다.

 

하느님안녕이 주무셨습니까?

 

하느님안녕히 주무셨습니까밤에는 소나기가 쏟아져 우리 방에 동지들이 여나믄 마리나 들어왔습니다동지라면 잘 모르실 테고정말은 개구리올시다개구리를 동지라 불러도 하느님은 노하시지 않으실는지요하지만 하느님저는 지금 동지들이 아쉽습니다동지가 많아야 통일도 속히 이루어지고온 세계는 한 형제가 될 것입니다하느님이 지으신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지자면 우리가 모두 동지가 되어야 합니다개구리는 물론 파리도모기도미꾸라지도메추라기도산돼지도노루도강아지도원숭이도 모두 동지가 되어야 합니다하느님의 뜻이라면 저의 기도를 속히 이루어 주십시오.” (김응교, “질병과 슬픔 앞에서 손 모아”, 비아토르, 210)

이렇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들을 사랑했던 생태 평화주의자 권정생 선생은 강아지똥과 몽실 언니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그의 작품들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던 2007년 5월 17일에 그에게 남겨진 인세가 1억 5천만 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가까스로 누울 수 있는 토담 방 하나가 재산의 전부였는데 엄청난 인세가 남아 있었습니다.

권정생 선생은 물질이 사람을 얼마나 타락시키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미리 써둔 유언장에 그 인세 사용을 명해놓았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제발 이 세상너무나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요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에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제발 그만 싸우고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중동아프리카티벳어린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기도 많이 해 주세요.” (위의 책, 213)

글을 읽다가 깨달았습니다.

왜 그가 조지 부시가 이라크의 바그다드 시내로 토마호크 미사일을 쏴서 바그다드에 살고 있었던 천진남만 한 아이들이 이유 없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맥박이 100이상이 뛰고열이 40도까지 치솟았는지를 알게 해주는 전쟁 같은 어린이 사랑을 했는지.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그렇습니다.

전쟁 같은 사랑은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것이며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당리당략에 따라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움직이는 정치인들이 들먹이는 것이 전쟁 같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되고 있다는 점에 심히 유감스럽고 불쾌하기 까지 합니다.

전쟁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이 땅의 존재들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뿐입니다.

우리 세인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전쟁 같은 사랑을 하는 진원지입니까?

세인 교회 지체들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자들이 아니라 사람을 세워가는 전쟁 같은 사랑을 치르는 주의 백성입니까?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전쟁 같은 사랑을 치르는 나를 응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났도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우리를 살리게 하시려 화목제로 보내셨도다.

화목제로 보냈도다.

사랑하는 자들아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서로 사랑하면 서로 사랑하면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리로다.

이전해피엔딩 Level 102024-03-07
-전쟁 같은 사랑 Level 102024-03-07
다음치우치지 않기 Level 102024-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