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치우치지 않기2024-03-07 14:52
작성자 Level 10

2021년 6월 1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쉰 번째 강해)

 

제목치우치지 않기

본문고린도후서 13:1-4

 

서론)

 

지난 주간에 동기 교수들이 쓴 책 두 권을 완독하고 서평을 써서 동기회 단체 톡에 기고했습니다.

서울신학대학교 이용호 교수가 쓴 성서 통독을 위한 텔레트() 1: 모세오경과 한세대학교 차준희 교수가 쓴 시인의 영성 1’이라는 책입니다.

친한 친구들이 쓴 책을 독서하다가 조금은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친구 모두보수적인 신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는 선생들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한세대학교는 순복음 교단 신학교이고서울신학대학교는 성결교 교단 신학교이기에 태생 자체가 보수적입니다.

사정이 이런 데 두 친구 모두 성향이 보수적이지 않다는 데에 적지 않은 미묘함이 있습니다.

이용호 교수는 성향으로 보면 대단히 진보적인 신학자이고차준희 교수는 진보적인 성향이기는 하지만 중도적 기질을 갖고 있는 신학자입니다.

그러다보니 본인들이 목을 걸고 있는 신학교의 성향과는 전혀 다른 입장의 노선에 있기에 아주 가끔은 신학적으로 충돌 아닌 충돌을 하곤 합니다.

둘 다 지금까지 본인들이 재직하고 있는 신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 이번에 앞에서 잠시 언급한 각각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차 교수는 그의 다작에 나타난 글을 읽다 보면 그가 책을 통해 나누려고 하는 메시지는 성향과는 달리 대단히 온건하게 글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이에 비해 이용호 교수는 본인이 출간한 책들의 행간 속에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진보적인 색채를 띠었던 경우가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친구들이 낸 책은 둘 다 대단히 은혜로운(?) 책들이었습니다.

특히 이용호 교수가 낸 책은 전혀 본인의 색깔과는 이질적인 아주 보수적이자 말 그대로 은혜로운 성경통독을 위한 안내서를 출간한 것을 보고 제가 이런 조크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드디어 이 교수가 거듭났다.”

설교 시작 전에 딱딱할 것 같아 조크로 설교를 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조크 속에서도 교우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기에 예로 들었습니다.

사실은 본인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분명히 인지하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적절한 균형 잡기입니다.

섣부르고성숙하지 못한 미완의 조잡한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 치우치기입니다.

반면 성숙의 단계에 도달한 자들은 철저하게 관조하고 성찰해서 분명한 자기의 입장은 있지만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려는 완숙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바로 이런 기울지 않는 균형 잡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공언했던 고린도교회 3차 방문에 앞서 분명한 본인의 입장을 글로 써서 먼저 보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글로 쓴 내용은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초대 목회자이자 사도로서 나름 비장한 선전포고이자 확정적인 결단과도 같은 마무리 글입니다.

본문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바울은 12:21절에서 언급한 대로 끝내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역설하면서 본인이 갖고 있는 생각이 결코 감정적인 것이 아니고 분명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일임을 고지하기 위해 신명기 19:15절을 예로 듭니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신명기 19장은 소위 말하는 신명기 법전(12-26)에 속해 있는 율법인데 특히 도피성에 대한 율례를 지정하신 하나님께서 살인죄를 비롯하여 일체의 죄에 판결할 때 반드시 2-3명의 증인을 세움으로 위증을 근원적으로 막음으로 법정 심판이 잘못되지 않고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 법 내용입니다.

2-3명의 증인을 세운 뒤에 합법적인 판결을 내리라는 것은 히브리 공동체가 지켜야 하는 대단히 엄중한 율법 명령이었습니다.

해서 바울은 율법을 들먹이며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유대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던 적대자들과 그들의 부화뇌동에 넘어간 회개하지 않는 배신자들을 향해 본인의 출신 배경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출신이고 율법 교육의 한 축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사사받은 경력을 내세워 그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 신명기 법전을 들고 나오며 기막힌 승부수를 던진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가서 법적인 재판을 열 것임을 시사한 셈입니다.

반드시 사도권 시비를 걸었던 자들과 한 판 승부를 벌일 것인데 율법적인 조항에 의거하여 2-3명의 증인들을 내세울 것이고그래서 법적으로 아주 타당하게 본인의 사도권을 변호하여 승리할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본문 2절을 읽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지난 주 설교를 통해 말씀드렸던 것처럼 바울의 이 공격적 선전포고는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과는 궁극적인 목적이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존재했던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을 공격한 이유가 교회 무너뜨리기라는 목적이 있었던 것에 반해바울의 이 공격적 선포는 교회 다시 바로 세우기라는 목적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해서 바울은 끝내 회심하지 않고 저항하는 고린도교회 내의 실제적 무신론자들이라고 볼 수 있는 대적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고두 번째 방문했을 때처럼 절대로 무기력하게 수모를 당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본문 3-4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이 구절을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증거를 요구해 온 여러분은 생각보다 많은 증거를 얻게 될 것입니다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그 분은 더없이 약하고 굴욕적이었지만지금은 강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십니다우리도 볼품없어서 여러분에게 굴욕을 당했지만이번에 여러분을 대할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 살아 계실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바울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온 문동환 목사가 쓴 예수냐 바울이냐라는 책을 밑줄 그어가며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문익환 목사의 동생이기도 한 문동환 목사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교육학을 전공한 교육학자이자 한신 대학교에서 공부한 대단히 진보적인 학자입니다.

그가 해석한 바울의 이해를 읽다가 신앙적 그리스도에는 점수를 많이 주지 않고 역사적 예수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학자들의 전형을 다시 한 번 확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바울 신학을 평가하면서 바울을 심각하게 폄훼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그의 관점을 목도하면서 진보적인 신학자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이 정도로 곡해를 할 수 있지를 생각하니 대단히 유감스러웠고 심지어는 참담한 마음이 들 정도로 편파적인 성경 해석에 경악했습니다.

짧은 주일 설교를 통해 그가 왜 바울을 비판했는지를 자세히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를 교우들에게 두 가지로 요약해서 소개합니다.

그는 책을 시작하면서 두 가지 문제제기를 합니다.

하나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이고또 하나는 바울에 대한 문제제기 차원의 글입니다.

① 예수 십자가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대속이라기보다는 마지막 각성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② 바울의 신학은 삶의 경험에 바탕을 둔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사고에 뿌리를 둔 관념(각성교육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문동환, “예수냐 바울이냐”, 삼인, 12-13)

저는 문동환 목사가 갖고 있는 성향으로 볼 때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신학적 메시지를 나름 이해합니다.

그만이 갖고 있는 진보성 성향을 알기에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와 동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바울에 대한 문 목사의 주장에 대해 이해는 하지만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말한 글 안에서 도무지 설득이 안 되는 심각한 오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류가 무엇인지를 증명해 보겠습니다.

문 목사는 십자가의 사건이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그의 제자들이 만들어낸 교육을 위한 인위적 작품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헌데 바울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합니다.

그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정체는 실제적인 사건을 경험한 메시지가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관념의 결과물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에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를 실제적 사건이 아니라고 한 사람이 실제적인 사건이 아닌 자신의 관념에 불과한 십자가를 전하고 있는 바울을 비난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런 논리적 오류와 모순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이런 억지가 생겼습니까?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극단에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치우침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균형은 물 건너간 이야기가 됩니다.

저는 본문 3-4절을 통해 자기 소회를 밝힌 바울을 보다가 문동환 목사와는 정반대로 그가 얼마나 철저하고 아름다운 주의 사도인가를 다시 한 번 절감했습니다.

주장했다시피 1-2절에서 바울은 이번 세 번째 방문의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거침없이 선언했습니다.

이번 방문은 두 번째 방문과는 격이 다를 것이라고 했고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음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쉼표였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3-4절에서 밝힌 내용이 치리와 징계가 목적이 아닌 이유를 밝힙니다.

3-4절을 풀어 이 목사의 문장으로 만들어 읽어드립니다.

이번 방문을 통해 고린도교회 형제들이 나를 의심했던 사도에 대한 권위를 반드시 증언할 것이다현재 나는 너희들과 너희들을 이렇게 만든 적대자들로 인해 심한 모욕과 폄훼를 당했지만 예수께서도 십자가를 지실 때 굴욕 당하심을 역전하시고 지금은 강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신 것처럼 나와 디도 그리고 또 다른 동역자는 이번 방문에 여러분을 대할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 다시 살아나 그 권위를 되찾고 무너져 버린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울 것이다.”

그렇습니다.

결국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세 번째 고린도교회를 가는 목적이 너무나도 분명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48번째 강해 시간에 나누었던 바로 그 레마교회 바로 세우기가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강해를 통해서는 교회 바로 세우기라는 목회 신학이 바울에게서 탄생하게 된 배경이 설교의 레마입니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던 사도였습니다.

다시 말해 균형 잡힌 사도였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배워야 하는 레마가 있습니다.

 

※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대명사입니다.

그는 목회적으로 대단히 보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신학적으로는 대단히 파격적인 진보적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물론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쓴 이유가 교회 바로 세우기라는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에 천착하는 것을 보면 지극히 평범한 보수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사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일성을 들어보십시다.

갈라디아서 3:28절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구절은 AD 1세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헬라 지역이라는 공간적인 배경을 염두 해 볼 때 쿠바 혁명의 산실이었던 체 게바라가 말했던 일체의 어록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는 파격적이자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같다니종과 주인이 같다니남자와 여자가 같다니이게 어디 될 법한 발언입니까?

대단히 진보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성경적 내증으로 한 예를 더 들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33-34절입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고린도교회 예배 공동체에서 통상적으로 행하던 식탁공동체가 부자들을 위한 편법으로 이루어지자 바울이 추상같이 명령한 메시지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식사 시간을 같이 공유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부자들은 예배 공동체 식사를 자기 입맛에 맞게 몰고 가지 말고 차라리 집에서 식사하라고 다그친 것입니다.

당시 계층별로 이야기를 할 때 절대로 무시하지 못하는 부유층을 향하여 그들의 경고망동을 무섭게 질책한 것입니다.

공의 행함을 좌시하지 않은 진보성을 바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무섭게 몰아치는 것만 했습니까?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7절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울은 결코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앙인이 보여주어야 한 영적 균형 잡기의 롤 모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3:23절을 소개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 강조하던 십일조에 대한 자랑을 주께서 박살내는 장면입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는 대가로 정의긍휼믿음은 과감히 버렸습니다.

분노하신 주님은 이렇게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합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대단한 균형 잡기입니다.

주님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에 크로스웨이 8기반에 있는 지체가 보낸 과제 보고서 중에 적혀 있는 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은혜 또는 행위 중 하나의 조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그들은 언약의 조문들 중에서 단지 은혜’ 부분에만 중점을 두고규정들을 무시한 채 자유스럽게 행동한다그들은 규정들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과의 구원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도덕적인 성취에 중점을 두기도 한다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태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사람은 행위에 의해 구원을 받지 않는다그가 구원받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 때문이다동시에 사람은 행위에 의해 구원을 받지는 않지만 행위를 위해서 구원을 받는다즉 은혜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은 규정대로 살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여 모든 백성들을 그 자신의 주위에 연합된 공동체로 모으려고 계획하셨지만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 시대의 말기에 이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지 못하였다예수 그리스도는 신앙적 메시아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사역을 감당하셨고메시아 시대는 오늘날까지도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지금은 불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지속되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크로스웨이 8기생 이미화 집사의 과제물에서)

 

지체가 보고한 대로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극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천착하는 자는 행위에 대한 삶을 가볍게 여겨 잘못하면 방종할 수 있는 실수를 범하기 쉽습니다.

반면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에 천착하는 자는 율법의 조문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공로가 아닌 은혜로 구원 받은 것에 대해 그리 놀랍게 생각하지 않는 배은망덕을 범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위험천만입니다.

그러기에 보고서를 낸 지체의 고백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가 구원받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 때문이다동시에 사람은 행위에 의해 구원을 받지는 않지만 행위를 위해서 구원을 받는다즉 은혜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은 규정대로 살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엇이 보입니까?

이게 바로 균형 잡힌 그리스도의 삶이요 신앙고백임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극으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극단은 위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주께서 모세가 죽어 불안에 떨고 있는 여호수아를 불러 무슨 말씀을 주셨습니까?

여호수아 1:7-9절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날 세우시네

 

나 지치고 내 영혼 연약할 때/근심 속에 내 마음 무거워/주 오셔서 함께 하실 때까지

나 잠잠히 주님을 기다려

 

열망 없는 그런 삶은 없으리/끊임없이 고동치는 가슴/주 오셔서 경이로 날 채우고

영원한 삶 나에게 주시네

 

후렴)

 

날 세우사 저 산에 우뚝 서리/날 세우사 풍랑 가운데도/함께 하심 날 강하게 하네

날 세우사 모든 것 할 수 있네/날 세우사 모든 것 할 수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