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마흔 아홉 번째 강해) 제목: 바로 당신입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12:14-21 서론) 이사야 6장을 보면 제 1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구절 중에 저를 흔들어 놓았던 한 구절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이사야 6:8-9절입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우리는 이 구절을 통상 이렇게 이해하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성전으로 부르셔서 소명을 주시기에 앞서 이렇게 물으셨다고 말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그러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말했다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연세대학교 신과대학교 교수인 홍국평 교수가 대단히 의미 있는 해석을 한 것을 그의 주석을 통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소명자로 만드시기 위해 내가 누구를 보낼까를 질문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까?’는 하나님의 탄식이자 안타까운 독백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던 자가 이사야라고 홍 교수는 진단합니다. “이사야는 누구를 보내야 할지 고민하는 탄식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여 자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입술이 부정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불과한 이사야는 천상의 이상을 보고, 그의 부정함이 스랍의 손길에 의해 정화되더니, 급기야 천상회의 논의에 직접 참여하여, 자기 자신을 신의 대언자로 보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른다.” (홍국평, “연세신학백주년기념주석/이사야 1”, 대한기독교서회, 104.) 어떤 의미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요즈음 많이 쓰는 신조어를 빌린다면 엄청난 득템을 한 셈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는데 이사야에게서 심쿵 하는 고백과 요청을 받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신 뒤에 이사야가 반응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위해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신 것을 분명하지만 公은 公이고 私는 私라는 말대로 도무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명령을 내리셨다는 점입니다. 가기는 가는데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회복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외통수와 같은 사명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어지는 6:10절을 마저 읽겠습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 황당한 미션을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정이 이 정도가 되면 물리거나, 포기하는 것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심판을 선포하라는 말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자기 백성들이 회복되는 것을 막으라는 메시지를 전하라니 이런 황당무계함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물려도 하등의 이상이 없어 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포기하거나 물리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미션을 충실히 수행하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합니다. 비록 이사야의 길이 고난의 길이었지만 묵묵히 그 길을 걷습니다. 유다에게 닥칠 재앙을 알려주기 위해 3년을 벗은 몸으로 다니는 삶을 살고, 핍박자들에게 수염이 뜯기는 수모를 당하고 설에 의하면 톱으로 몸이 반으로 잘려 순교를 당했다고 전하지는 그 길을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사람들을 부르셔서 일하십니다. 바울도 그렇게 부름을 받은 자였습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는 자가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사도행전 9:15-16절이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삭되지 못한 자와 같은 나 같은 자를 부르셔서 동역자로 세워주심에 지극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주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자신도 주의 사역을 홀로 할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 알고 있었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세 번째로 방문하기에 앞서 본인의 심정을 다섯 번째 편지(제 개인적인 동의)에 적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두 번째 방문 시에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며 문전박대 당했던 경험이 있었던 바울이 세 번째 방문을 수신자들에게 전하면서 나름의 결기를 비칩니다. 그 내용이 대략 이렇습니다. ① 폐를 끼치지 않겠다. 본문 14절 전반절입니다.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여기에 기록된 ‘폐를 끼치지 않겠다’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나르카오’ 경제적인 부담을 지운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바울은 세 번째의 방문을 알리면서 나는 너희들에게 그 동안 해 온대로 일체의 생활비나 선교비를 지원 받을 생각이 없음을 다시 재 강조했습니다. 주지했다시피 바울은 적대자들에게 생활비도 지원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는 질 떨어지는 자든지 아니면 가짜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라는 폄훼와 공격을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본인이 계속 주장했던 대로 결코 경제적인 압박이나 부담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지 않겠다는 본인의 목회적인 고집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② 부모의 마음을 갖고 방문하겠다는 전언이었습니다. 다시 14절 후반절을 읽겠습니다.“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이 토로는 동서양이라는 공간, 고대와 현대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칙과도 같은 공식입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송호경 교수는 본인의 책에서 이렇게 베이비부머(55-63년생)들을 정의했습니다. “베이비부머들은 소위 말하는 낀 세대다. 그래서 그들만이 갖고 있는 나쁜 버릇이 있다.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모든 걸 다 해줘야 한다는 무모한 의무감이 있다. 어찌 보면 주제넘은 욕심이다.”(송호경, “그들은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이와우 간, 44) 그런데 이 무모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베이비부머들에 국한합니다. 이후 세대가 부모에게 무언가를 책임지고, 또 반대로 자식들에게 부모가 책임지는 생각은 이제 박물관에 박제해야 할 고리타분하고 고루한 생각이라고 치부되는 세대가 이미 도래되었습니다. 제가 너무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세대에 아마도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사는 경우는 10명 중 하나라고 평가하면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시대는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사는 것이 대의로 인정받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바울은 부모의 마음을 갖고 고린도교회에 방문할 것을 재차 천명했습니다. 아마도 본문 16-18절은 바울의 노파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이 바울뿐만 아니라 두 번째 편지를 갖고 방문했던 디도, 그리고 분실되었지만 분노의 편지라고 할 수 있는 세 번째 편지를 가지고 재방문했던 디도와 또 다른 익명의 형제까지 물질적인 착취를 위해 바울이 보냈다는 어처구니없는 흑색선전이 팽배해 있는 장소가 고린도교회임을 알았기에 이 점도 분명히 못을 박습니다. “내가 앞에서는 자급을 하는 척하고 뒤에서는 교묘하게 속여 빼앗았다고 험담을 하는 것이 들리는데 어찌 된 일입니까? 그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누군가를 보내서 여러분을 속이거나 여러분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습니까? 나는 디도에게 여러분을 방문하라고 권했고, 그와 함께 한 형제 몇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속여 무언가를 빼앗은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솔직하지 않거나 정직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까?” 유진 피터슨의 16-18절 메시지 번역입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자기와 동역자들이 실천해 왔던 물질적인 투명성과 정직함을 역설한 바울은 본문 19-21절에서 마지막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아리고 아린 마음을 전달합니다. 바울이 전한 마음은 두려움이 배태되어 있는 안타까운 전언이었습니다. 19-21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무려 4번에 걸쳐 바울은 두려워하다는 단어를 반복합니다. 바울의 두려움은 종합하면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으려는 자들의 완고함, 그리고 죄에 대하여 회개하지 않으려는 무감각 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어찌 보면 바로 이것입니다. 말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교만함과 죄를 죄라고 지적해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무감각한 완고함 말입니다. 적용해 볼 때 목회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 말씀 앞에 민감하게 하는 것 Ⓑ 죄에 대하여 돌이키게 하는 것 바울이 이 분명한 목적을 갖고 고린도에 세 번째 방문을 하겠다고 미리 천명한 셈입니다. 다음 주 설교에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지만, 이런 목적을 갖고 가는 바울은 세 번째 방문은 두 번째의 방문의 복사판이 되지 않을 것임을 밝힙니다. 다시 말하면 두 번째 방문처럼 문전박대를 하면 그때는 사도의 권위를 갖고 반항하는 자들을 치리할 것임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고린도후서 13:1-2절입니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다음 주에 다시 세밀하게 말씀을 드리겠지만 바울은 세 번째 방문을 했을 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대항하는 자들에 대한 징계를 위해 율법적으로 생성된 히브리 공동체의 준 사법적인 행동을 불사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폴 바네트) 톰 라이트는 이 사법적인 행동을 출교 및 성찬권 박탈 등등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후의 수단이자 방법이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런 강수를 최후의 수단이나 카드로 쓰겠다고 말한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한 답으로 본문 14절 중반절로 역설하려고 합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10-13장 즉 5번째 편지를 쓰고 있는 목적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일탈된 성도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목적한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무뎌지거나 무감각해지지 말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한 것이 목적입니다. 바울이 원하고 원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토대로 오늘 설교의 레마를 받겠습니다. ※ 하나님이 찾고 계신 하나님의 사람은 바로 말씀대로 사는 '나'라는 교훈입니다. 미가 6:6-8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찾고 찾는 사람은 일 년 된 송아지를 갖고 나오는 사람이 아닙니다. 천천의 숫양을 갖고 나오는 자도 아닙니다. 만만의 기름을 준비하고 오는 자도 아닙니다. 미가의 예언은 한층 더 강화됩니다. 맏아들을 드리는 최고의 강수를 두는 자도 아닙니다. 내 몸을 우상에게 드리는 버릇대로 인신 제물로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으실까? 꿈도 꾸지 말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하나님이 찾고 계신 사람은 헤쎄드(인자)와 미슈마트(정의)와 짜나(겸손)로 자신을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바로 당신임을 미가를 통해 선포합니다. 바울도 고린도교회 일체의 성도들을 향하여 피토하는 듯 외칩니다.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아, 내가 원하는 것은 한 줌의 재보다 못한 돈이 아니다. 내가 너무너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죄에서 돌아서는 돌이킴의 은혜로 사는 바로 너희들이다. 바로 너희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12년 전에 읽었던 글 하나 던지겠습니다. “예수님은 신부를 찾아오실 것이다. 그분은 병든 교회를 찾아오시지 않는다.”(레오나드 레이븐힐,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 규장,197) 2009년에 이 글을 접했는데 그때 생각이 납니다. 나는 신부인가? 그리고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 과연 신부는 얼마나 될까? 너무나도 명약관화한 메시지였지만 둔감했던 부분이었기에 다시 옷매를 가다듬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주님이 찾아오시는 신부가 누구입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입니까? 내가 매일 보는 가까운 지인입니까? 명심하십시오. 주님이 찾아오시는 신부는 바로 당신이어야 함을.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언제나 내 모습 너무나 부끄러워 무릎으로 주님께 기도로 가오니 나 홀로 서 있는 죽은 내 영 깨우사 주님만 나를 깨워 내 영 살게 하소서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내 안에 계시고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나를 세워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