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아린 목회
본문: 고린도후서 12:11-13
서론)
노숙자 섬김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노숙인이 식사를 하러 들어왔습니다.
건장한 체격인데 외모는 많이 허술해서 누가 보더라도 힘든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하는 중년 남자였습니다.
접시를 들고 친구들이 배식하는 음식을 담은 뒤에 식사를 돕는 스텝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가서 식사를 한 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 번 더 식사를 하겠다고 다시 배식 줄에 섰습니다.
친구들은 맛있게 드시라고 다시 음식을 채워주었습니다.
두 번째 식사를 하던 그는 반찬이 부족했는지 다시 친구들 앞에 서서 반찬 리필을 주문했습니다.
바로 그때 익숙한 솜씨로 남성 스텝 한명이 그를 제지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불편한 인상으로 뒤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그 중년의 노숙인이 전에도 계속 이렇게 습관적으로 했기에 그 스텝이 저지한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순간, 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밥상공동체인데 그냥 눈감아주지 하는 마음이 들어 조금은 유감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중년 남성의 뒤안길을 그냥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 서울 역 근처에서 노숙을 할 것이라고 꿈을 꾸며 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 또한 이전에는 꿈이 있었고, 미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는 몰라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그 어떤 이유로 집단에서 탈락했거나, 동화되지 못해 밀려났을 것이고, 또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그 밀려남은 가족 공동체에서까지 버틸 수 있는 여력이 없어 작금 길거리를 배회하며 노숙하는 기막힌 신세를 전락한 것은 아닐까 싶어 스텝의 저지에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아려왔습니다.
‘아리다.’라는 우리말을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① 혀끝을 찌를 듯이 알알한 느낌이 있다.
② 상처나 살갗 따위가 찌르는 듯이 아프다.
③ 마음이 몹시 고통스럽다.
아마도 저 역시 그 노숙인에게 느낀 감정이 바로 ②③번이 아닐까 싶습니다.
목사로 산지가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목사로 살면서 뼛속까지 체감했던 형용사가 있다면 바로 아린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앙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성도의 삶에 고난이 임하는 것을 볼 때, 목사의 마음은 아립니다.
대신 그 고난을 짊어지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마음이 아립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로 최선을 다해 섬기며 그리스도인으로 키우기 위해 열심을 다해 양육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비 그리스도인보다도 못한 무례함으로 등 뒤에 비수를 꽂는 신자들로 인해 아프고 아픈 상처를 움켜쥐고 아리게 울었던 순간들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목사는 평생을 아린 마음을 갖고 목회해야 하는 운명의 소유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마흔 여덟 번째 강해를 준비하다가 그 어느 설교 준비 시간보다 바울이 본문에서 토로한 글을 읽다가 그가 가졌던 아리고 아렸던 마음이 제 심장을 타격했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불과 세 절 밖에는 안 되는 짧은 구절이지만 바울이 강하게 사용한 반어법 문장이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오늘의 언어로 해석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로 본문 전체를 다시 한 번 읽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나는 이와 같이 말하면서 완전히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탓만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나를 부추긴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리석은 말을 하도록 놔두기보다는 나를 지지하고 칭찬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내가 보잘 것이 없고 하찮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여러분을 매료시킨 저 대단한 ‘사도들’과 견주어 내가 그들만 못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도 직접 겪어 보아서 알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으면서 복된 시기와 힘겨운 시기를 보내는 동안, 참 사도를 구별하는 온갖 표적들, 곧 놀라운 일과 이적과 능력의 표적들이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여러분이 나나 하나님께로부터 다른 교회에 비해 덜 받은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덜 받은 것이 한 가지 있기는 합니다. 바로 내 생활비를 책임지지 않은 것 말입니다. 참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서 그 책임을 빼앗은 것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메시지 고린도후서 12:11-13절)
바울이 반어법적인 표현으로 말했기에 대단히 예의 있는 표현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메시지의 내용은 엄중한 경고요, 선전포고와 같은 무게를 담고 있는 바울의 메시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메시지는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헐뜯고 있었던 적대자들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본문 메시지의 수신 대상은 그들의 부화뇌동에 속절없이 넘어가 바울의 등 뒤에 더 아픈 비수를 꽂은 고린도교회의 배교자들에게 던진 선전포고였습니다.
신약학자들은 오늘 본문을 종종 ‘바보 자랑’이라는 말로 정의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담임목사의 언어로 바울의 토로를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정말로 자랑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허나 내가 정말로 사랑하고 피 땀을 흘리며 고린도교회가 나를 험담하고 헐뜯고 심지어는 나의 사도권까지 매도하는 자들이 너무 심하게 나를 핍박하니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대항하고, 항변하여 무너지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죽기보다 싫은 바보 자랑을 했다. 나는 적대자들보다 영성에 있어서 뒤처지지 않는다. 나는 계시와 환상도 보았고, 들림도 받아 보았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신비로운 영적 경험도 해보았다. 나는 적대자들이 매도하는 것처럼 무기력하고, 무능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보다 나는 더 영적이다. 그런데 자랑을 하다 보니 기가 막히게 비참하다. 내가 왜 자랑을 할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해 보니 마음이 아리고 아렸다. 그래서 나는 바보 자랑을 중단했다. 진짜로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것은 내가 약할 때 곧 강하다는 자랑이다. 그런데 한 마디만 오늘은 적대자들에게 매수되어 넘어간 고린도교회의 일부 한심하기 그지없는 너희들에게 덧붙인다. 다시 강조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한심하기 그지없는 자랑을 했다. 진짜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책임은 너희들에게도 있다. 너희들은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고린도교회를 세웠을 때의 그 수고를 깡그리 무시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 있나? 내가 너희들에게 치명적으로 실수를 한 것이 하나 있다. 적대자들이 내가 가짜인 증거는 고린도교회에서 마땅한 사례비를 받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선동질을 했고, 너희들은 그 말도 안 되는 트집 잡기에 넘어갔는데 내가 지금 생각해 보니 통탄 할 실수였다. 나는 그 때 너희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내가 자비량을 사역하는 것을 들어 사례비를 포기했는데, 결정적인 실수였다. 너희들에게 마땅한 사례비를 받았어야 했는데 그 책임을 지지 않게 한 것이 후회막급이다.”
왜 바울은 이렇게 격정을 토했을까요?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네 번째 편지 혹은 다섯 번째 편지 (네 번째 편지라함은 1-13장 전체의 고린도후서를 지칭함이고, 다섯 번째 편지라함은 고린도후서를 1-9장을 네 번째 편지로 보고, 10-13장을 그 후에 다시 쓴 다섯 번째 편지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한 것입니다.)를 썼던 바울은 이윽고 오늘 본문 다음 구절인 12:14절과 앞으로 살피게 될 13:1절에서 세 번째 방문을 시사합니다.
먼저 12:1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또 한 구절은 13:1절입니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바울은 12:14절과 고린도후서를 마감하는 13:1절에서 본인의 계획을 밝힙니다.
고린도교회에 조만간 세 번째로 방문하겠다는 스케줄이었습니다.
첫 번째 방문은 말할 것도 없이 고린도교회를 세우기 위한 방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문전박대를 당했던 방문이었습니다.
복습해 보겠습니다.
에베소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측되던 바울이 디도와 또 한 명의 익명의 동역자를 고린도교회에 보냅니다.
이 때 가지고 간 편지가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입니다.
왜 이 편지를 갔고 갔습니까?
글로에의 전갈에 의하면 고린도교회가 4파로 분열되어 반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바울은 아픈 마음으로 그 분쟁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가를 고발하고 합력하여 하나가 되라는 권면을 담은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전서를 디도에게 건네주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다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바울의 사도권을 거부하는 자들이 일어나 바울을 공격하는 것은 물론 본인들도 상당한 핍박을 당하고 우울하게 에베소로 귀환합니다.
이 결과에 아파하던 바울은 급한 나머지 아주 짧은 기간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였는데 바로 이 방문이 바울의 슬픈 방문인 두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방문의 시기에 이론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문전박대를 받았습니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고린도교회 적대자들의 거침없는 폄훼와 공격보다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자들이 배교하며 바울을 공격하는 일선에 섰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때의 정황을 에스라성경대학교대학원 교수인 조석민 교수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에 머물렀던 바울은 급하게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였으나, 성도들이 대부분 그를 멀리했다. 심지어 어떤 남자 성도는 그를 공개적으로 모욕했다. 고린도교회를 두 번째로 방문한 이후에 바울은 에베소로 돌아와서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으로 편지를 쓰고 있다. 편지에 고린도교회를 세 번째 방문했을 때 죄지은 자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경고의 내용이 들어 있다. 이 경고와 함께 고린도교회 모든 성도가 스스로 자기 믿음을 검증할 것을 요구한다.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래서 불순종하는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기대한다.” (조석민, “이해와 설교를 위한 고린도후서 주석”, 이레서원, pp,265-266.)
이상이 오늘 본문에 얽힌 해석입니다.
해석을 듣고 난 뒤의 교우들의 소회가 궁금해졌습니다.
바울의 선포에 진정성이 느껴지십니까?
어떤 진정성입니까?
고린도교회 공동체와 자신에게 비수를 꽂은 배교자들을 향한 아리고 아린 진정성이 느껴지십니까?
정말로 가슴 아픈 공격을 당했지만 고린도교회라는 주님의 교회가 무너지는 것만은 막아야 하겠다는 그 진정성이 실로 느껴지십니까?
바울은 본인에게 쏟아졌던 수없이 많은 공격, 태클, 폄훼, 그리고 물리적인 상처까지 모두 다 참았습니다.
특히 본문 12절의 한 단어가 눈에 크게 들어옵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무슨 말입니까?
내가 사도로서 살아가는 ‘세메이온’ 즉 ‘표적’ 혹은 ‘증거’를 바울이 밝히고 있는데 기막힌 나열입니다.
앞에서 자랑했던 내용들은 후 순위로 밀려나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나의 사도됨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준 것은 표적이 일 순위가 아니고, 기사와 능력도 일순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본인의 사도됨의 가장 강력한 근거 즉 일 순위는 ‘모든 참음’이었습니다.
‘참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휘포모네’는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변하지 않는 기다림’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적대자들의 일체의 공격과 핍박을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견뎠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소위와 주장이 옳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수모를 견디고 참아냈던 한 가지 유일한 이유는 교회를 되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리고 또 아렸지만 바울이 세 번째의 고린도교회 방문을 앞두고 최후의 선전포고를 한 것은 내가 방문하기 전에 너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빠져 나와 회개함으로 교회가 다시 설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절절한 메시지였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 교우들과 나누고 싶은 아리고 아린 목회의 목적을 밝히고 싶습니다.
정상적인 목회자들의 목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 한가지입니다.
※ 교회 다시 바로 세우기입니다.
몇 주 전에 아주 의미 있게 읽었던 팀 켈러 목사의 ‘부활을 입다’에서 저자의 단호하다 못해 서슬이 시퍼런 느낌이 들 정도의 인용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지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팀 켈러는 보수적인 복음주의자입니다.
팀 켈러는 그렇다고 해서 보수성이 극으로 갈 때 자칫 잘못하면 빠지기 쉬운 수구적인 근본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대단히 건강한 복음주의적인 보수주의자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는 지금 췌장암으로 투병하기에 생사가 불투명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와 목사의 무덤이라고 말하는 자본주의 괴물의 총 집합체인 뉴욕에서 가장 강력한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지성적으로 증언함으로 수많은 맘몬주의에 빠져 있는 뉴욕의 불신 젊은이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한 강력한 주의 종입니다.
그에게 어떤 힘이 있었기에 이런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가 앞에서 소개한 그의 책에 인용한 한 석학의 글을 접하면 기 이유는 알게 됩니다.
“자유주의 기독교와 원래 역사적 기독교의 극명한 차이에 대해서 리처드 니버가 한 말이 유명하다. 그는 자유주의를 ‘진노 없는 하나님이 죄 없는 인간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심판 없는 나라로 인도하셨다.’고 표현했다.”(팀 켈러, “부활을 입다.”, 두란노, p,36.)
저 역시 니버의 글을 팀 켈러의 인용문으로 읽다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전율했습니다.
펜데믹 이후, 사실상 많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갈 명목적 신자 플러스 반쪽 그리스도인들의 탈락을 염려하여 영적 기상도가 천천히 그리고 급격히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 보입니다.
어떻게?
니버의 말대로 이렇게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제발 떨어져 나가지 마세요. 교회는 위험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기에 죄 없는 여러분에게 십자가라는 무거운 짐을 지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심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그러니 제발 교회를 떠나지 마세요.”
저는 중세 천주교의 타락한 사제들처럼 면죄부를 사지 않는 자들에게 지옥 그림을 걸개로 만들어 보여주며 성경에 대하여 알지도 읽지 못하는 그들을 겁박함으로 현실적으로 지옥을 공포의 수단으로 악용했던 그런 야바위꾼적인 종교 장사치로 목사가 변질되는 것을 목숨 걸고 막고 싶은 목사입니다.
저는 교회의 재정을 늘리기 위해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성공의 도구로 이용하는 그런 엔터테인먼트식의 프로그램 MC목사가 되는 것을 눈 크게 부릅뜨고 경계하는 목사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 한국교회에서 일부 발생하고 있는 전 아무개를 중심으로 한 극단적 근본주의의 행태에 대하여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다고 해서 앞에서 언급한 니버의 일침대로 교회를 하나의 종교 만족의 도구나, 사회적 구제 집단의 하나 정도로 몰고 가는 극단적인 진보주의적 자유주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더 많이 경계합니다.
죄와는 상관이 없다는 그래서 안심시키는 신자 만들기, 심판은 존재하지 않으니 안심하고 이 땅에서 안락하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부추기는 이상한 진보주의적 기독교를 경계합니다.
또 하나의 부류들은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로버트 슐러를 닮아 교회는 절대로 십자가를 강요하지 말아야 하며, 십자가를 진 예수는 패배자의 모습을 주기에 결코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거나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엘 오스틴과 같은 정신병자를 추종하는 그런 자유로운 교회로 변질되는 것은 무섭도록 내치는 목사입니다.
2020년에 시작된 펜데믹 상황에 맞물려 교회는 몸서리쳐지도록 약해졌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앞으로 교회는 더 비 복음적인 상태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칠 것입니다.
바울 시대의 고린도교회 뿐만 아니라 오늘 21세기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도 무너진 교회, 무너지고 있는 교회라는 레떼르 앞에서 속수무책인 양 무기력합니다.
거기에 결부하여 올바른 교회 세우기와 복음 증언을 선언하는 목사는 고린도교회에 생생하게 버티고 있었던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을 공격한 것처럼 오늘 이 땅의 교회에서 마찬가지로 공격당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공격당할 것이 자명합니다.
이 공격은 교회 밖에만 국한 되지 않습니다.
이 공격의 백미는 도리어 교회 안에 있는 불신적 신자들에게 의해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래서 무시무시한 정글이자 영적 전쟁터가 바로 지금 교회의 상황입니다.
저는 오늘 이런 정황에 세인교회도 예외없이 노출되어 있음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인교회를 섬기고 있는 저를 공격하는 것은 힘들지만 저는 바울이 갖고 있었던 휘포모네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제가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은 교회가 무너지게 하는 일체의 것들과의 영적 싸움입니다.
교회는 사람에 의해서 무너지는 나약한 사회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이 말하고 목숨을 거는 쓸데없는 비 본질로 세워지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본질로 세워지는 영적 유기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도 않고 무너져서도 안 되는 유일한 이 땅의 영적 보루이자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교두보입니다.
저는 마태복음 16:18절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다시 세워져야 합니다.
더글라스 존 홀이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 정신은 자연과 역사의 흐름을 넘어설 정도로 자유롭다. 이는 우리의 진리를 진리로 여기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더글라스 존 홀, “그리스도교를 다시 묻다”, 비아, p,266.)
무슨 말입니까?
인간이 신이 된 오늘의 시대에 인간이 갖고 있는 정신은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성경적 내증으로 답해봅니다.
요한복음 18:38절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진리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이런 질문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네가 진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께서는 이미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교회가 무너질 수 없는 이유는 진리이신 예수께서 교회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 세인교회는 교회를 바로 세워나가는 선두적인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30년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과 희로애락을 느끼며 부대껴왔습니다.
제 목회는 아린 목회였습니다.
마치 바울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목회의 남은 여정도 교회 세우기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어떤 교회?
바른 교회입니다.
교회가 많이 아픕니다.
교회가 많이 아픈 이 시대, 세인교회가 그 아픔을 아리고 아린 마음으로 체휼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교회의 아픔을 아리고 아린 마음으로 심비에 새겼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를 바로 다시 세우기 위해 남은 목회의 여정, 분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하나님 앞에 설 때, 나 무엇 하다가 왔냐? 를 물으시면 다른 것을 말씀드릴 수 있는 건더기가 하나도 없는 죄인이지만 하나는 말씀드리고 싶은 거룩한 욕심이 있습니다.
“주님, 아픈 교회를 부둥켜안고 울다 왔습니다.”는 보고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강덕 목사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면 아리고 또 아립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나 주님과 함께
상한 맘을 드리며 주님 앞에 나가리
나의 의로움이 되신 주 그 이름 예수
나의 길이 되신 이름 예수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