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마흔 일곱 번째 강해) 제목: 역설(逆說)을 역설(力說)하다. 본문: 고린도후서 12:7-10 서론) 역설(逆說)-paradox 이라는 단어를 풀면 거스를 逆자와 말씀 說자의 합성어입니다. 그러기에 국어사전에 이렇게 이 단어를 풀었습니다. “대중의 예기(豫期)에 반하여 일반적으로 진리라고 인정되는 것에 반하는 설, 혹은 진리에 반대하고 있는 듯하나, 잘 음미해 보면 진리인 설을 의미한다.” 제가 일전에 언급했던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에 카이스트 총장이 게스트로 초청되어 진행된 방송을 보다가 그의 발언에 감동의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총장으로 피선된 이광형 총장의 집무실에 조직도가 있는데 그 조직도의 그림이 거꾸로 되어 있다는 인터뷰를 보다가 그의 기괴한 이유에 무릎을 쳤습니다. 대체적으로 모든 조직도는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 있는 삼각형 구도입니다. 허나 이광형 총장은 그 조직을 역삼각형 구도로 만들어 총장인 본인이 맨 밑에서 조직을 떠받드는 형상으로 조직도를 세팅했는데 그 이유는 총장인 내가 모든 교수님들과 직원들을 섬겨야 세계 일류 대학 (10위 권 안으로의 진입이 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변(辯)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땅에 참 많은 괜찮은 사람들이 역설적인 진리로 가뜩이나 흐려져 있는 세상을 그나마 밝게 하는 것 같아 나름 위안이 됩니다. 목사로 사는 제가 감사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이렇게 역설적인 메시지와 감동을 주신 분이 나의 주군이신 예수님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이런 역설의 메시지가 무궁무진합니다.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선언하셨던 역설의 메시지 중에 가장 대표적인 메시지를 취사선택해서 소개하라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가복음 10:43-44절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역설의 절정을 알리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세속의 가치는 남을 이겨야 정상에 섭니다. 조금 더 거칠게 표현한다면 타인을 짓밟아야 본인이 살아남는다고 부추기는 정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주 단호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종이 되지 않는 자는 으뜸이 되지 않는다고. 그래서 역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역설적 진리의 정점을 찍으신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가장 발 빠른 본(휘포그람모스)을 보인 주인공인 바울의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바울 서신에서 바울이 말한 여럿 촌철살인과도 같은 귀한 보물 같은 메시지 중의 압권이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는 구절입니다. 먼저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지난 주일에 설교를 통해 언급했던 대로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로 끌려 올라가 하나님의 신비한 환상과 계시를 보았던 그 체험이 너무 엄청난 것이었기에 자랑을 하던 어간, 그 자랑을 중단하고 다시 본인이 진짜로 자랑해야 할 중요한 내용을 7절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갖고 있었던 고질적인 육체의 질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갖고 있는 육체의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사탄의 사자’라고까지 표현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쨘 해집니다. 바울이 말했던 가시는 무엇이었을까요? 폴 바네트는 가시를 다음과 같이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스콜롭스’의 번역인 ‘가시’는 문자적으로 땅바닥에 대고 박는 ‘말뚝’ 이나 끊임없이 짜증나게 하는 가시를 의미한다.” (폴 바네트, “BST 주석-고린도후서”, IVP,p,245)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게 했던 가시를 학자들은 그래서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이해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핍박, 감각적인 유혹, 언어 장애, 안과 질환, 간질 등등”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폴 바네트는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다고 적시하고 있는데 저도 그의 의견을 따르고 싶어 소개합니다. “이 특정한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 자체가 그 장애의 구체적인 본질을 판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을 낳는다.” (위의 책, p,246) 무슨 말입니까? 병명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분명한 것은 바울이 갖고 있었던 육체의 가시가 바울을 바울 되게 했던 중요한 요인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이 당했던 고통이 너무 커서 그는 이 고통이 없어지기를 세 번이나 기도했음을 토로합니다. 본문 8절입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설교를 준비하면서 세 번이라는 기도의 숫자에 대해 조금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말 그대로 세 번의 기도를 바울이 드렸다는 말인가를 확인하게 위해 여러 책들을 보다가 고린도후서의 전문가인 스캇 하프만이 쓴 ‘NIV 적용주석 고린도후서’를 읽다가 속이 펑 뚫리는 듯한 명쾌한 해석을 접하고 행복했습니다. 교우들에게 소개하겠습니다. 하프만은 바울의 세 번의 기도를 예수께서 행하셨던 겟세마네의 기도와 연결하여 주석했습니다. 마가복음 14:41-42절을 읽어드립니다.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 구절입니까? 예수께서 겟세마네에 가셔서 십자가를 피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는 피를 쏟는 듯한 간절한 기도를 하신 것이 세 번이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죽게 되었으니 나를 위해 중보 해 달라는 기도 부탁을 두 번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제자들은 피곤하여 졸고 있었습니다.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세 번의 기도를 드리고 오신 주님은 더 이상은 기도하시지 않고 이제 나를 파는 자들에게로 가자는 말씀을 하시고 그들에게 가서 체포당하셨습니다. 주님이 왜 세 번만의 기도 부탁을 중단하셨을까요? 하프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고난의 잔이 남아 있었을지라도, 그 기도가 응답(십자가의 짐이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기도)되었다고 확신한데에서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스캇 하프만, “NIV 적용주석 고린도후서”, 솔로몬,p,538) 바울도 주님의 이 겟세마네 기도처럼 세 번 만에 주님이 가시를 주신 것에 대한 응답을 받았기에 세 번이라는 기도의 수를 밝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주님이 세 번 만에 응답하신 육체의 가시를 주신 의미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9절에서 바울은 분명히 밝힙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주님의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네게 준 육체의 가시로 인해 바울 네가 약해지는 바로 그때에 너에게 역사하는 나의 능력이 커짐을 네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입장에서 바울이 말한 설명인데 이 구절은 본문 8절에서 바울은 자기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7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보다 더 명확한 주님의 응답이 더 있겠습니까? 바울을 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품이 육체의 가시요 육체의 연약함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이 명확한 뜻을 안 바울은 오늘 설교의 제목과 관련한 엄청난 역설의 은혜를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에게 선포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약한 자가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자 발악하는 듯한 궤변입니까? 그렇다면 성경을 잘못 보아도 한참을 잘못 본 것입니다. 본문 10절은 온전한 신앙인만이 경험하고 느끼고 체휼할 수 있는 逆說的 은혜의 절정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인해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능욕과 박해와 곤고와 궁핍 때문에 도리어 기뻐한다고 이번에는 역설(力說)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게 어디 세속적 가치의 측면에서 가당하기나 한 일입니까? 가당하지 않은 일이기에 이것을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역설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하는 레마는 바로 이것입니다. ※ 기독교는 철저한 역설적인 은혜를 말하는 유일한 영적 보루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읽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저자인 카잔차키스는 이 책을 저술함으로 그리스정교회에서 파문을 당할 정도의 이 책은 출판 당시 불온한 책으로 낙인이 찍힌 책입니다. 수호천사로 가장한 사탄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비아냥거리는 자들을 위해 죽을 가치가 없다고 부추기면서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합니다. 이 책의 절정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그리고 못과 고통 어두워진 태양 모두가 꿈이었나요? 그래요 꿈이었어요. (중략) 갑시다. 천사가 말하더니 꽃이 만발한 풀밭을 유연하게 사뿐사뿐 걸어가기 시작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고려원, 1982, p,492) 심지어는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았음을 연출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댄 브라운이 쓴 ‘다빈치 코드’가 바로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속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은혜라는 역설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를 실패자로 묘사한 대단히 인본주의적인 색깔이 농후한 소설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이제는 앞에서 말한 예수의 구속사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들의 광기가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바른 역설의 은혜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주간, 리처드 보컴과 트레버 하트가 공동으로 쓴 ‘십자가에서’라는 책을 마무리했습니다. 이 책에 맨 마지막에 기록된 글을 하나 소개하기 전에 먼저 교우들에게 마태복음 27:40절을 소개합니다.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비아냥이었습니다. 주님에게는 모욕의 모욕이었습니다. 이 모욕을 소개한 저자는 이렇게 이들의 비아냥과 모욕을 이겼다고 갈무리를 합니다. 제게는 대단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기적(십자가에서 내려오심)을 원치 않으셨다. 십자가 위의 이 사람이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전한 모든 기적들이 순식간에 무의미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풍 병에서 온전하게 된 사람은 다시 침상에 눕게 되고, 혈루 병에서 치유 받은 여인은 다시 피를 흘리게 될 것이고, 여리고의 소경은 다시 어둠 속에 빠지게 될 것이며,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다시 나병의 고통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나사로와 같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다시 그들이 나왔던 무덤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급작스럽게 말라버린 거대한 바다의 물고기처럼 사람들은 조용한 대학살 속으로 고통 속에 몸부림칠 것이다.” (pp,235-236) 이 글을 읽다가 섬뜩했습니다. 다시 겟세마네 동산의 처절한 주님의 기도로 돌아가 보십시다. 누가복음 22:42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주님의 이 기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의 전자기도(이 잔을 옮겨주십시오)에 응답하셨다면,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다행스럽게 하나님은 아들의 후자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결과의 역설이 무엇이었습니까? 모두를 살리는 구속사의 실천을 이루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죽으신 역설은 모두를 살린 역설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이 걸으셨던 길처럼 나도 역설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다시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2021년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성령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런 교회이기를 원합니다.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역설의 은혜를 믿고 따라가는 교회입니다. 1981년에 회심을 하고 신학을 하겠다고 결심한 1982년에 고향 교회 지하 기도실에서 한없이 울며 불렀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이 찬양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나는 연약하오나 주의 권능 크시니 모든 환난 시험을 물리쳐 주옵소서 주께 더욱 가까이 동행하게 합소서 아무 때나 어디든지 주와 함께 있기 원하네 세상 유혹당할 때 자주 넘어지오나 주님 외에 그 누가 내 짐 대신 지실까 주께 더욱 가까이 동행하게 합소서 아무 때나 어디든지 주와 함께 있기 원하네 아침 안개와 같이 나의 생명 걷힐 때 주의 인도함 받아 하늘나라 가겠네 주께 더욱 가까이 동행하게 합소서 아무 때나 어디든지 주와 함께 있기 원하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그렇습니다. 나는 연약해서 자주 넘어집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주님의 권능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새벽에 교우들과 함께 나누었던 큐티 본문 중에 애급에서 나온 지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주님이 재 확인시키셨던 구절이 저를 울컥하게 했습니다. 출애굽기 19:4절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그렇게 업어 인도하신 하나님은 40년이 지난 날 모세가 행한 두 번째 광야 생활 복기 설교를 통해 또 하나를 알려주셨습니다. 신명기 1:31절입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내가 약하고, 넘어지고 쓰러질 때 좌절하지 마십시다. 바로 그때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업고 안으셔서 인도하시는 때입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바울은 오늘 바로 이 약할 때 강해진다는 역설을 역설합니다. 바울이 믿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앞에 소개한 찬양을 드리고 기도합니다. 나는 연약하오나 주의 권능 크시니 모든 환난 시험을 물리쳐 주옵소서 주께 더욱 가까이 동행하게 합소서 아무 때나 어디든지 주와 함께 있기 원하네 세상 유혹당할 때 자주 넘어지오나 주님 외에 그 누가 내 짐 대신 지실까 주께 더욱 가까이 동행하게 합소서 아무 때나 어디든지 주와 함께 있기 원하네 아침 안개와 같이 나의 생명 걷힐 때 주의 인도함 받아 하늘나라 가겠네 주께 더욱 가까이 동행하게 합소서 아무 때나 어디든지 주와 함께 있기 원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