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신앙적 포플리즘을 경계하십시다.
본문: 고린도후서 12:1-6
서론)
지난 주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의 글을 개인 SNS에 올려놓았더니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① 새로 부임한 전도사는 복을 받았다. 그렇게 세밀하게 지도해 주는 담임목사가 어디에 있나!
② 부임한 전도사 ‘스트레스 받아서 한 달 만에 도망간다.’에 한 표를 던짐. 어디 무서워서 사역하겠나!
상당히 많은 분들이 제 글에 이런 저런 반응들을 보여 주어서 감사했지만 데 세밀한 교역자 리더십의 근거한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하겠다고 다시 다잡이 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한 지인이 보내준 내용을 소개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대로 잘 따라간다면 목사다운 목사로 잘 성장할 것입니다.”
그의 글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잠간 멈춰 섰습니다.
목사다운 목사가 어떤 목사일까?
일전에 소개했던 아제르바이잔에 거하고 있는 지인 집사님께서 이번에 보낸 장문의 메일 내용 중에 88세 되신 모친께서 본인에게 해 준 말을 제게 전해 주었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모친께서는 요즘 교회가면 교회에서 예배당에서 조차도 세상의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자주 하소연하십니다.”
이 글을 읽다가 많이 아팠습니다.
예배당에서 들려야 하는 소리는 광야의 소리이어야 하고, 로고스가 전제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레마이어야 하는데 왜, 교회에서 세상의 소리가 들리고 있는가를 자문하다가 저를 강하게 타격한 것은 혹 목사가 레마를 전하지 않고 세상의 소리를 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싶어 두려워졌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아모스 7:12-13절을 오늘도 다시 한 번 복기해 보겠습니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궁정 예언자라는 레떼르는 있었지만 사실은 예언자가 아니라 정치적 종교인에 불과했던 아마샤가 자기의 밥줄을 위태롭게 하는 아모스를 향한 던진 독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단어가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라는 문장입니다.
벧엘이 어떤 곳이었나요?
야곱이 에서를 피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던 중에 피곤하여 돌을 베개 삼아 자다가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 고백한 그 유명한 토로가 창세기 28:17절이었습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하늘의 문 즉 성소였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의 북쪽 왕국의 벧엘이 어떻게 망가졌습니까?
하나님의 성소의 역할을 하던 벧엘이 왕의 성소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였던 중심지가 세상 가치의 중심지로 변질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변질된 지극히 세속적인 벧엘에는 아마샤와 같이 종교를 내세워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영적으로 도둑질하는 강도들이 득실 되는 소굴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기에 혹자가 말한 이 말은 정답입니다.
“교회가 타락하면 추한 정도가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왜 이런 기막힌 일이 벌어질까?
이 답을 찾아낸다면 오늘 우리 세인 지체들이 추적하고 거울삼을 반면교사의 내용을 건져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설교 메시지로 삼기가 대단히 불편한 텍스트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스스로 자랑하고 있는 내용의 진의(眞意)를 파악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제 개인 신약선생님이 되어주시기로 한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김판임 교수님과 설교 준비 전에 전화로 교제를 해서 힌트를 요청했습니다.
바울서신 전문가인 김 교수님도 12장에 대한 난해함에 동의하며 어려운 것은 넘어가고 쉬운 것만 택해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면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강해 설교의 고집과 방법론을 유지해 왔던 저로서는 교수님의 의견에 100% 동의하기가 녹록하지 않아, 조금은 더 치열하게 본문 연구를 해보기로 했고, 오늘 그 결과물을 교우들과 나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문 1절을 읽어 봅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제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공격하는 고린도교회 적대자들에게 방어이자 공격의 포인트 방향을 12장에서 바꾸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의 자랑이 환상과 계시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오프타시아’의 번역인 ‘환상’과 ‘아포칼립시스’의 번역인 ‘계시’에 대한 이해가 녹록하지 않기 때문에 설교자인 제게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김판임 교수는 이 단어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환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각적 현상을 가리키는 반면, 계시는 반드시 시각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표현에 별 다른 차이를 두거나 두 개의 다른 사건을 가리켜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경험한 한 가지의 신비로운 체험을 겸하여 말한 것처럼 여겨진다.”(김판임, “고린도후서 성서주석-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 주석 39”, 대한기독교서회,p,279.)
김 교수의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전제할 때 ‘한 가지 신비로운 체험’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증명해 내야 하는데 이것이 난제입니다.
김 교수는 이 신비로운 사건을 꼭 집어 말한 것은 아니지만 바울 서신에 나타난 바울이 말하는 계시 거의 대부분이 다메섹 사건을 의미하기에 이 계시와 환상도 다메섹 회심 사건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가 바울의 연대기가 맞지 않는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를 조금 더 부연하겠습니다.
본문 2절을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바울은 철저하게 본인을 제 3인칭화 시켜 자신의 신비적인 경험을 적대자들에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14년 전’이라는 시기 설정과 셋째 하늘에 대한 이해입니다.
① 14년 전에 대한 해석의 제 문제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내는 4번째의 편지인 고린도후서를 쓴 시기를 주후 54-56년으로 추측한다고 첫 설교를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계산하기 쉽게 54년이라고 가정할 때 바울이 본문 2절에서 14년이라고 설정한 것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그가 환상과 계시를 경험한 시기는 주후 40년이 됩니다.
이런 공식을 대입할 때 이 계시와 환상이 다메섹에서 경험한 회심사건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연대기적인 오류를 발생하게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바울이 다메섹 성에서 광주리에 담겨 빠져 나온 이유가 아레다 왕의 고관에게 핍박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살폈습니다.
아레다 왕은 다메섹을 포함한 나바티아 제국을 주전 9년부터 주후 39년까지 다스렸던 아레다 4세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회심은 적어도 주후 39년 이전이었음이 분명한데 14년을 유추한다면 AD 40년이라는 산술적 계산이 나오기 때문에 다메섹 회심으로 몰고 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② 셋째 하늘에 대한 해석입니다.
김판임 교수의 도움을 또 받아 보십시다.
“에녹서(위경에 속한 책)나 십이 족장의 유언(유대의 문헌)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하늘을 10층, 혹은 7층으로 생각하였는데 바울이 하늘을 몇 층으로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없다. 즉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이 일곱층으로 되어 있는 하늘의 세 번째 층을 가리킨 것인지, 모두가 세 층으로 되어 있는 하늘의 가장 높은 층을 말한 것인지 매우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위의 책,p,282)
무슨 말일까요?
셋째 하늘이 어떤 곳인지를 잘 모른다는 에두름입니다.
또 한 가지 난처한 것은 2절 후반절-3절의 내용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도대체 바울이 언급한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또 다른 고민입니다.
조금 진보적인 학자들은 이 구절을 바울이 갖고 있었던 육체적 나약함이 간질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자료로 삼기도 합니다.
뇌전증의 공격을 받을 때 이론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고통의 상태를 3절에서 바울이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을 저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리어 통상적으로 바울의 이 고백이 말 그대로 신비로운 영적 경험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복음적인 접근일 것입니다.
다만 이 경험이 어떤 경험인지를 또 셋째 하늘에 대한 정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적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기는 하지만 본문 2-3절의 해석을 복음적인 차원에서의 해석 밖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입장을 조율하는 것이 성도된 자의 자세임을 교우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 점을 전제하면서 본문 4-6절을 마지막으로 주석해 보겠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바울이 지금 본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를 자랑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는 대적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신비적인 경험들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었기에 바울 스스로도 그들이 말하고 있는 영적 경험이나 신비적 체험에 대하여 조금은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애틋한 모습이 본문 4절에 엿보입니다.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영적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즈음해서 조금만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은 적대자들이 고린도교회의 평범한 신자들을 현혹한 내용이었던 영적 체험을 내세웠기에 나도 그들에 비해 못지않은 영적 체험을 경험했다고 맞불을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맞불 작전은 여기까지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절제하고 있는 바울을 봅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보입니다.
‘그만두노라’
내가 자랑하는 영적 체험의 자랑이 혹시나 고린도교회의 약한 신자들에게 본질이 아닌데 본질처럼 착각할까봐, 그리고 그것만을 붙들까봐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그만 둔다고 선언합니다.
그런 뒤에 바울은 대단히 격조 높은 발언을 다시 반복합니다.
본문 5절만 다시 읽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바울의 자랑은 약한 것의 자랑이었습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서 바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레마를 받겠습니다.
※ 신앙인은 인기인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저는 ‘신앙적 포플리즘을 경계하십시다.’라고 정했습니다.
포플리즘이라는 단어는 사회 정치학적인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자면 ‘인기영합주의’라고 표현합니다.
정치인들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길기 때문입니다.
연예인들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장수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인기영합주의자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바울을 깊이 생각해 보면 본문 구절구절에서 매우 안타까워하는 영적 아픔이 보입니다.
인기영합주의자들의 선동질로 인해 교회가 무너지고, 고린도교회에서의 자신의 사도적인 리더십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얼마나 아프고 또 아파겠습니까?
그래서 영적인 실력 행사를 하고 싶기도 하며, 나도 너희들 못지않은 영적인 체험을 갖고 있다고 항변하며 대항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항과 항거는 잠시, 바울은 다시 영적인 옷매무새를 가다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신비적 체험의 자랑을 그만두노라. 그리고 정말로 자랑하고 싶은 것을 말한다. 그것은 바로 나의 연약함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인기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바울의 이 선포를 접하면서 전율하는 감동이 임했습니다.
마가복음 6:45절을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주군의 인기는 천정부지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같은 병행구절인 6:15절에서 조금은 더 리얼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기영합주의와는 결별하였습니다.
도리어 경계하였습니다.
‘재촉하사’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낭카조’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강제로 시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기영합주의에 슬며시 녹아들고 있는 제자들을 목을 비틀어서 강제로 그곳을 떠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주님도 앞서서 그 자리를 떠나셨다고 복음서 기자는 보고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영적 포플리즘의 자리에서 완전히 떠나는 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수없이 말씀드렸던 갈라디아서 1:10절의 실천적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어제 동기 목사의 부친께서 소천하셔서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조문을 마치고 같이 자리에 참석한 동기들과 잠시 담소했습니다.
마침 한국성결교회 연합회 윤리제정 분과에서 사역하는 친구가 마침 이번 달에 있을 예정인 교단 총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총회장 선거에 관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적하며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자리에 참석한 또 다른 동기 목사 한 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전에 총회장을 역임한 목사님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난 아마도 천국에 못 갈 것 같다.”
이렇게 말한 친구는 정말 내가 본받고 싶어 하는 동기 목사입니다.
그 친구는 교회의 크기와 여러 가지 면에서 교단 정치에 뛰어들면 나름 건강성을 갖고 있어서 교단을 위해서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는 친구인데도 불구하고 목사들의 정치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긋고 얼씬도 하지 않는 친구가 전언한 말을 듣다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친구의 말에 속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얼마 전, 유트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극우 계열의 신학교 후배가 일일이 이름을 열거하며 쏟아내는 소위 말하는 좌파 목사들의 명단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방송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지론은 한국교회에 스며든 좌파 목사들을 발본색원하여 발을 딛지 못하게 퇴출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피를 튀겼습니다.
긴장하면서 들은 이유는 혹시 내 이름도 있을까봐. (농담입니다.)
그 후배의 방송을 보다가 왠지 서글퍼졌습니다.
이유는 그가 목사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메시지 안에는 대단히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지만, 그도 역시 극단적 우파주의자들의 힘을 엮어내 본인의 위상을 견고하게 하려는 아주 질 나쁜 저의의 포플리즘이 담보되어 있는 포플리스트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인기인이 되기 위한 교두보가 아닙니다.
교회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자기의 기득권적인 유익을 추구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마태복음 16:16절의 고백이 있는 곳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교회는 고린도전서 2:2절이 고백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교회는 갈라디아서 6:17절이 공유되는 장소이어야 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교회는 갈라디아서 2:20절을 선포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교회는 인기인을 만들어내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제 첫 졸저에 쓴 글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느린 삶’에 대하여 강의해 달라는 방송국의 강의 요청을 거절한 이유가 느림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 바빠지는 것이 싫어서였다는 역설의 글을 접한 적이 있었다. 글을 읽다가 왜 이리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나는 목사로 산다. 세상 사람들이 저들만의 리그에 속했다고 비아냥거리는 개독교 먹사로 살고 있다. 허나 이 철학자의 성스러운 고집을 목사인 나도 갖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저들의 공격이 뭐 그리 대수롭겠는가 싶다. 아니, 정말로 전술한 철학자의 정신과 왕고집을 갖고만 살 수 있다면 어찌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이 비극의 사태가 초래될 수 있겠는가?” (이강덕,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 동연, p,284.)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인기인으로 살고 싶습니까?
그래서 바빠지고 싶습니까?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는 인물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영적 포플리즘의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 필드에서 완전히 이동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안으심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