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약하십니까?
본문: 고린도후서 11:30-33
서론)
오늘은 2021년 어비이주일입니다.
세인 교회의 어버이들은 물론 이 땅의 모든 어버이들이 건강하기를 화살기도 해 봅니다.
손택수 시인의 시 한 편 읽으며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손택수의 “아버지의 등을 밀면서” (나희덕, “유리병 편지”, 나라말, pp,38-39에서 재인용)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이 대목의 시구를 읽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소천하신 아버지 생각 때문에.
기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아버지들은 무뚝뚝하고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무서움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상상되는 것이 다반사이지만, 보릿고개 시절, 아니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렵고 어렵던 시절, 무거운 가장의 책임을 지고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인생의 무게 짐 때문에 더욱 강해지려고 의도적으로 내색하지 않았던 것뿐이지 어찌 보면 가장 여리고 여린 존재들이 아버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혼자 짊어져야 하는 짐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들키지 않기 위해 강하지 않은 존재인데 주변 상황으로 인해 강한 척 해야 하는 그 사람은 한편으로 보면 대단히 외롭고 고독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주인공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이런 열악한 상황을 반전시켜 승리했음을 보여 주는 영적 교훈을 우리들에게 줍니다.
본론)
신약학자들은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경험했던 고난의 형극에 짜 맞추기식의 논리로 바울의 고난 논리를 정형화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지를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설교인데 내 가슴을 울렸기에 제 뇌에 각인되어 있는 설교가 하나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가장 눈물 나게 하는 장면이 있는데 요한복음 8:59절이라고 그 설교자는 명시했습니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한복음 8장은 예수께서 공생애의 절정기를 보내실 때이었기에 유대인들과의 갈등도 극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는 그 유명한 장면도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갈등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은 8장에서 당신이 빛이심을 말씀하셨고, 나는 위에서 낳았으며, 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선언을 하십니다.
결국은 주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력하게 선포한 셈입니다.
그러자 가뜩이나 눈엣 가시 같은 존재인 예수가 행한 말을 트집 잡아 그를 신성모독으로 몰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함을 요한복음 저자가 전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극도로 느끼게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위기에 대하여 아주 단출하지만 대단히 선명한 문체로 이렇게 주께서 위기를 모면했음을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8:59절입니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이 구절을 성찰하기에 앞서 잘 생각해 보십시다.
주께서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마치시자 가야바의 일당이 파송한 일련의 무리들에게 체포를 당하십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을 신호로 예수를 체포하려는 순간,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베드로가 그 일당 중에 한 명인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리는 방어적 공격을 합니다.
그때 떨어진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6:52-53절에서 적나라하게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정말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능력으로 자신에게 돌을 들어 치려는 자들을 일거에 물리칠 능력이 주께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요한복음 8장에서 주님은 그들의 물리적 폭력에 무기력하게 보일 정도로 그들의 위협을 피해 숨어서 성을 빠져 나갔다고 요한기자는 보고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아직은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정면 승부를 걸지 않으시고, 때를 기다리시기 위해 위험한 장소를 피해 거처를 옮기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요한복음 8:59절의 스토리를 바울이 본문에서 병행시켰다고 신약학자들이 주장합니다.
읽어 보십시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교우들에게 32-33절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석하고 설명하겠습니다.
아레다 왕이란 주전 9년부터 주후 39년까지 요르단의 중심 도시였던 페트라에서 동쪽에 위치해 있었던 나바테아 왕국을 통치하던 아레다 4세를 말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에 있었을 때, 왕의 총독이 바울을 잡으려고 성의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바울의 동역자들이 바울이 성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광주리를 만들어 그 안에 바울을 숨겨 성 밖으로 매달아 내림으로 그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게 해주었음을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들을 수없이 당했다고 간증하며 본인의 열심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왜 이토록 바울이 민감하게 자신의 고난까지도 밝히며 자신의 사역을 밝히고 있습니까?
지난주일에 보았던 11:23절 전반절에 대한 강력한 항변이자 적극적 변호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그렇다면 바울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자신의 열심을 표현한 이유가 단순히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적대자들의 기를 죽이기 위한 필살기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일까요?
만에 하나 그렇다면 표현의 방법만 달랐지 적대자들이나 바울이나 도토리 키 재기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진짜로 이렇게 자신의 경험까지 낱낱이 들춰내며 본문에서 강하게 자신을 자랑한 것은 강대 강으로 맞선 것이 아니라 적대자들은 도저히 꿈꿀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선포하기 위함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그 근거가 본문 30-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 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그렇습니다.
바울의 엄청난 영성입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나는 약한 것이 너무 많은 자이지만 괜찮다는 말입니다.
왜?
내가 약하기에 주님이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심을 믿기 때문이라고 반전의 은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일에 주시는 영적 레마를 붙드십시다.
※ 내가 약한 존재임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춘향이 어디에 있냐고 반문하는 교우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 아니 그러겠습니까?
세속의 논리로 보면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약한 데 감사할 수 있냐는 말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약함은 분명히 감사할 조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1) 약한 나이기에 주님에게 붙들려야 한다는 믿음의 진보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31절을 다시 읽습니다.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 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바울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있습니까?
다시 복기해 보십시다.
우리는 지난주일 설교에서 바울이 당한 고난의 종류를 살펴보았습니다.
옥에 갇혔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와 태장도 맞아 보았고, 돌로도 맞아 보았고,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도 당해 보았고, 여행에 만난 강의 위험, 동족과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수고, 고생, 잠을 못자는 것, 굶주림, 목마름, 불가피한 금식, 추위, 헐벗음 등등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을 바울이 겪어야 했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예수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원망의 대상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본문 31절에서 그 예수를 영원한 찬양한다니 이게 어디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말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영원히 찬양한다고.
바울의 선언은 그만한 영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2장 강해 시간에 더 세밀하게 나누겠지만 12:9-10절을 미리 한 번 맛보겠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는 말을 심비에 새기십시다.
리젠트 칼리지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쳤던 제임스 패커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머리로 아는 것이고, 그 은혜의 능력은 가슴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제임스 패커, “약함이 곧 길이다.” 디모데,p,95.)
마태복음 26:38절을 읽어 드립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이 구절을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주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이 요청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 목요일 저녁에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예수께서 겟세마네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함께 올라갔던 베드로, 안드레, 요한에게 돌 던질 만큼 가시기에 앞서 당부하신 구절이 바로 마태복음 26:38절입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중보 요청인 셈이었습니다.
이게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죽게 되었다고 제자들에게 중보 요청을 하다니!
이런 나약한 존재를 주군으로 어떻게 섬긴단 말인가의 자탄이 나오게 하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결정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피땀 흘리는 기도를 드린 것이지 않겠습니까?
이어지는 마태복음 26:39절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런데 이 구절이 조금은 더 성숙한 목회자로 성장한 뒤에 접하면서 얼마나 큰 감동과 은혜로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주님도 인성을 갖고 계시던 공생애의 막바지 즉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는 연약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주님도 아버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교제하셨던 순간이었다.”
지난주 토요일과 주일은 제게는 악몽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어지러움 증세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토요일이 월삭예배를 드리는 날이었고, 주일은 헌아식이 사역이 있는 날이었기에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걸을 수가 없으니 사역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러자니 교우들이 너무 큰 실망을 할 것 같고 정말로 목회 30년 성상을 지냈지만 지난 주일처럼 힘들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 월삭예배는 정신력으로 버티며 드렸고, 주일 사역 1부는 부교역자가 설교 원고를 대독하는 것으로, 2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강대상을 붙들고 사역했는데 마침 캐리그마를 선포하는 시간에 힘을 주셔서 무사히 예배를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부터 이틀 동안 병원 두 곳을 다녀왔는데 진료의사가 둘 다 이석증(耳石症) 초기 단계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석증 치료는 지금의 의학으로는 완치가 불가능한 질병이고, 사람의 신체가 노화하는 과정에서 오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방법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전문의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몇 년 전, 비문증이 시작되었고, 이제는 이석증까지 제게 임하는 것을 보며 나름 우울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약함을 경험하면서 제게 임한 또 하나의 영적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붙들리지 않고는 목회의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는 재확인의 은혜가 그 어느 주간보다 강하게 임했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저는 나름 자기관리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목회를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육체적인 건강에 대한 관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미션이라고 생각하며 몸 관리에 나름 할 수 있는 만전을 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내가 나를 관리하면 된다는 의식의 일로로 각인하며 그렇게 했다는 생각이 이번 육체의 나약함을 경험하며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주님께 붙들리는 것이 능력이라는 가장 원본적인 진리를 다시 한 번 각인하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없이 찬양하며 노래한 가사이자 성경 말씀이 삶의 전 영역에서 온전히 새겨지는 영적 감동이 제게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지난 주간 읽었던 김기석 목사의 글이 참 위로가 되었습니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은 쓰라림과 아픔이 있지만, 그것이 은총의 계기일 수도 있음을 어렴풋이라도 알아차린다면 다행입니다.” (김기석, “그리움을 품고 산다는 것은”, 비아토르, p,112.)
내가 약할 때 주님을 붙들게 되는구나! 를 알게 해주시는 것은 분명 감사의 조건입니다.
나는 이런 인지함이 우리 교우들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 주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왜 32-33절의 기사 즉 아레다 왕의 고관으로 인해 엄습한 위기를 소개하기에 앞서 30-31절을 먼저 배열했을까요?
분명한 의도가 엿 보이는 바울의 배열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내가 약한 것을 고백했더니 주님이 나를 위해 일하셨다는 것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인식은 이미 로마서에서 발휘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로마서 5:6절을 되뇌어 보십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 구절의 백미가 무엇입니까?
“For in our being still ailing,”입니다.
즉 우리들은 여전히 병들어 있음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문장입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정말로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온전할 때가 있었습니까?
과거나 현재나 앞으로 올 미래에 저나 여러분이 온전할 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런 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온전할 수 있는 때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당신과 내가 두 손을 들고 항복을 할 때, 하나님이 비로소 일하신다는 점이 신비요, 은혜입니다.
로마서 1:28절을 주목해서 들으십시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항복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습니다.
내버려두십니다.
최고의 저주이자 재앙이자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자에게는 그때부터 그를 위해 일하십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마도 누가복음 5:8절일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는 자신의 배에 올라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반신반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윽고 그가 행동한 것이 바로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 노하우, 스킬들을 다 동원하여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다는 자기 드러냄이자 뽐냄이 이 구절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아직은 당신이 말한 것을 100%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자가의 의지의 표현이 담보된 것입니다.
그런데 남은 50%로 그물을 던진 결과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경험한 베드로는 두 손을 들고 주님께 항복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주님은 이 항복을 수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베드로를 통해 일하십시다.
누가복음 5:10절 후반절입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NOT A FAN’ 으로 우리 세인교회 지체들에게 잘 알려진 카일 아이들먼 목사가 이렇게 역설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닌 그 분의 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실패할 때, 너무 약할 때, 우리 자신의 끝에 이르렀을 때, 그 때는 그 분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카일 아이들먼, “나의 끝, 예수의 시작”, 두란노,p,210.)
그래서 카일 아이들먼은 확신을 갖고 이렇게 독자들에게 선포합니다.
“The end of me is the beginning of Jesus.” (내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가 주님이 일하시는 시작의 때다.)
그렇습니다.
나의 끝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항복할 때, 비로소 주님은 나를 위해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어버이주일이지만 강해 설교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우리들이 잘 부르는 찬양 중에 ‘시선’이라는 복음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내게로 부터 눈을 들어/주를 보기 시작할 때/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하늘의 꿈꾸게 하네/주님을 볼 때
내게로 부터 눈을 들어/주를 보기 시작할 때/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하늘의 꿈꾸게 하네/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약하십니까?
괜찮습니다.
내 약함을 인정하고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십시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나를 위해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찬양의 후렴 부분의 가사가 설교를 듣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세인지체들이 절절한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한 주간, 주님께 올인 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