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기승전교회2024-03-07 14:04
작성자 Level 10

2021년 5월 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마흔 네 번째 강해)

 

제목기승전교회

본문: 고린도후서 11:22-29

 

서론)

 

2015년 터키 성지순례를 다녀왔을 때많은 사람이 질문했습니다.

터키의 어디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느냐고.

그때마다 제가 대답한 말은 데린구유라는 지하도시라고 답했습니다.

로마의 핍박을 피해 지하로 들어간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눈으로 보면서 오늘 내가 사는 삶이 너무나 부끄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터키 성지순례를 하는 동안 제가 눈물을 흘렸던 지역은 다른 곳이었습니다.

타우르스 산맥을 넘을 때였습니다.

지금의 콘야(성서상의 지명은 이고니온비시디아 안디옥이 있는 땅지역을 방문하고 경유하여 안탈리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넘어야 했던 타우르스 산맥이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탈리아까지는 해발 3,500미터의 타우르스(지금의 명칭 토로스산맥으로 막혀 있기에 반드시 그 산을 넘어야 갈 수 있는 여정입니다.

저는 그 날 이 지역을 에어컨 시스템이 너무 잘 되어 있는 35인승 리무진 버스를 타고 넘었습니다.

이 지역을 넘으면서 생각했던 성경구절이 바로 오늘 우리가 다룰 본문 중에 하나였습니다.

26절입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이 구절 중에 눈에 띠는 문장이 강도의 위험입니다.

혹자는 항구였던 안탈리야에 살고 있었던 불량배들이 어업에 종사하다가 실직을 하면 몰려드는 곳이 타우르스 산맥이었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의기투합하여 호모나데시안이라는 산적 집단을 형성했다고 증언합니다.

그곳은 그만큼 위험지역이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넘기 두려워하는 곳이 타우르스였습니다.

2000년 전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그의 일행들이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사이프러스 섬의 항구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밤빌리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버가(지금 이곳은 유명한 터키 남부의 관광도시인 안탈리아)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선교의 동선을 옮겼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렇게 동선을 옮기려면 반드시 그 문제의 타우르스 산맥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설사가상으로 이들의 이동 수단은 도보였습니다.

제 이야기로 잠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타우르스 산맥을 리무진으로 이동할 때 보고 있던 책을 잠시 접었습니다.

너무 심한 S자 코스의 길이었기에 잘못하면 멀미를 할 수 가능성 100%였기 때문입니다.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타우르스 산맥은 말 그대로 험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마치 곡예 운전을 하는 것처럼 산을 깎아 만든 도로는 정말로 난코스 중의 난코스였습니다.

이 산을 넘는 차 안에서 왈칵 눈물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울었습니다.

바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50세 정도였습니다.바울은 40을 넘긴 상태였기에 말 그대로 초로에 들어선 노인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재강조하지만 주목할 것은 바울이 이 산맥을 도보로 넘었다는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신약학자들의 이론에 의하면 이때 바울은 버가(안탈리야)가 습기기 많은 곳이었기에 풍토병(말라리아로 추측)에 걸려 육체적으로 심한 고통에 있었다고 보고해 줍니다.

이 당시는 말라리아 치료제백신 전무의 상태였기에 그는 기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일한 치료법은 말라리아가 없는 장소로 이동하여 자연적 치료를 기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건조한 장소였던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바울의 일행은 동선을 정했고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참 위험한 길이었지만 타우르스 산맥을 넘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전 지식으로 알고 있는 저는 그날 안락한 리무진 버스를 타고 산맥을 넘어가는데 너무 부끄럽고 죄송해서 소리 죽여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론)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세 가지의 단어가 눈에 띕니다.

히브리인이스라엘인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① 히브리인유대인의 언어적 차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 언어에 익숙했을 것입니다첫째는 고린도지역의 언어인 헬라어둘째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언어였던 아람어그리고 세 번째가 그들의 종교적 언어로 사용했던 히브리어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거룩한 언어인 히브리어를 쓰는 특별 그룹이라는 자랑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② 이스라엘인야웨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의 의미입니다특히 에서가 아닌 야곱이라는 선택된 민족의 후손이라는 자존감 및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룹임을 자랑한 것입니다.

③ 아브라함의 후손이 단어도 이스라엘인이라는 말과 맥을 같이 합니다할례 받은 구원 받은 선민에 대한 자랑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의 이런 지역적혈통적 근본을 강조하며 바울을 압박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압박에 바울이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본인의 정체성을 더 강조하며 이들의 공격에 대항합니다.

어떻게?

23절 전반절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자라는 정체성에 대해서는 더욱 강력한 어조로 적대자들을 몰아세웁니다.

오늘의 언어로 풀면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일군임을 자랑한다고 하는데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나는 너희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헌신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께 내 삶을 온전히 드렸다.”

그러면서 선포한 바울의 메시지가 그 유명한 오늘 본문 23절 후반절부터 27절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예수님을 위해 했던 수고가 무엇이었습니까?

Ⓐ 옥에 갇혔다에베소에 구금되어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 매도 수없이 맞았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 즉 39번의 매질과 태장이라고 하는 이 형벌은 로마인들에게는 면제된 태형인데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을 밝히기 이전이었기에 사회적인 소요를 일으켰다는 의미로 바울에게 가해진 물리적 폭력이었을 것입니다.

Ⓒ 한 번 돌로 맞았다.

사도행전 14:19절에 기록되어 있는 루스드라에서 당했던 봉변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 세 번 파선했다.

아마도 바울이 바다 여행을 자주했기에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여러 번의 여행에 만난 강의 위험동족과 이방인의 위험시내의 위험광야의 위험바다의 위험거짓 형제의 위험은 전도 여행 때문에 당한 고난일 것입니다.

Ⓕ 일체적 육체의 고통수고고생잠을 못자는 것굶주림목마름불가피한 금식추위헐 벗음 등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까지의 고난을 왜 적대자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23절 전반절에서 고린도교회 적대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적반하장의 열심에 대해 기가 막힌 상태에 항변을 해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구절들을 보다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한 바울의 일설이 눈물겹게 다가왔습니다.

빌립보서 1: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바울은 주님을 위해 이런 고난을 당했다고 이제는 숨기지 않고 적대자들을 향해 공격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고통수고는 바울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아픔이 아니었다는 고백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위에 열거한 이런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염려가 있었음을 토로 합니다.

본문 28절을 봅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바울의 목양 정신이 바로 이 대목에서 보입니다.

자기가 강한 육체적 고난은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수없이 견뎠고 앞으로 이런 고난이 임해도 또 잘 견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있습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로 인해 염려하는 고통들입니다.

본문 29절에서 바울이 전하고 있는 교회로 인해 당하는 고통과 염려를 이렇게 보고합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교회 공동체 지체 중에 어떤 이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약해진다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실족하면 나도 똑같이 넘어진 것 같은 애탐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보입니다.

애타다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퓌로오의 번역입니다.

직역하면 불을 태우다인두로 지진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지금 거짓 사도들로 인하여 무너지고 있는 상태 때문에 본인의 심장을 불로 태우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있고마치 자기의 생살에 인두로 지지는 듯한 극한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선언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기승전교회라고 정했습니다.

누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바울이 그랬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애를 태웠습니다.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본인의 생명과도 같은 가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담지 되어 있는 본인의 서신이 13개입니다.

그 중에 9개가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가 행한 사역의 핵심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이 세운 교회 공동체 바로 세우기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정의합니다.

고린도전서 12:27절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3:15절을 소개합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바울은 이렇게 교회를 본인 사역의 핵심적 가치라고 생각할 정도로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사랑한 교회인 고린도교회가 유린되고 있는 데 어찌 바울이 그냥 침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마침표를 찍는 듯한 강력한 의미를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은 물론그 안에 있는 일체의 지체들에게 선언한 것입니다.

본문 28-29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지난 주간에 아제르바이젠에 거주하는 집사님 한 분이 제게 메일을 보내 주셨습니다.

본인에게 허락을 받았기에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목사님!! 안녕하십니까저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살고 있는 ○○○ 집사입니다.

목사님께 신앙적 도움과 나눔을 하고 싶어 글을 씁니다목사님의 블로그를 둘러 보다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는 글을 읽었고 코로나 펜데믹 속에서 한국 교회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시는 그 절박함이 크게 느껴졌고 그 글에 공감했습니다원래 저는 월터 브루그만의 '안식일은 저항이다'라는 책을 공감하며 읽고 이 분의 다른 책을 찾아서 읽어보고자 이름으로 검색하다 우연히 목사님의 블로그를 방문하게 되었고 블로그의 대문에 적혀있는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외치는 교회의 비극 속에서 세상이 교회에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는 주님의 철저한 노예"라는 소개 글을 접하는 순간 뭔가 특별함으로 제게 다가 왔습니다넘쳐나는 수많은 말씀과 책 중에 무엇을 듣고 읽으며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야 하나지금 드러나는 한국 교회의 모습은 왜 이럴까아마도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아픔의 일부를 동일하게 느끼고 고민하면서 살아가다 동질감(?) 아니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끌림이 있었습니다.

이후 한 달 여 기간 동안 블로글의 글을 꾸준히 읽고 있으며 이재철 목사의 '목사그리고 목사직'이라는 책을 쓰신 서평을 제 지인들과 공유하며 읽었고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는 글은 복사가 되지 않아 그 글 전체를 캡쳐하여 사진 파일로 보내며 그 절박함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또 수년전의 북 콘서트 영상을 보며 참 특이한 교회이고 정말 책을 많이 읽으시는 목사님이시구나 라고 생각했고 그런 목사님의 말씀은 어떠할까 생각하며 세인교회의 최근 예배 동영상을 대부분 들으며 지내오고 있습니다.

저는 59년생으로 모태신앙이었지만 오랜 기간 방황하다 47세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33년 다닌 직장을 퇴직한 후 지난 10년 전부터 아제르바이잔에서 살고 있습니다.

회심 후 출석한 교회에서 제자 훈련을 받았고 그 때 이후 지금까지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그 주신 생각과 감동으로 나름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하지만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현실 속에서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니 분별하기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양해해 주신다면 그 동안 제가 생각해왔던 신앙적 판단과 의문들에 대해 나눔을 가져 보고 싶습니다마음에 주시는 감동대로 나누어 주시면 감사하겠지만 혹시 그런 마음이 없으시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그 마음 또한 흔쾌히 받을 수 있습니다애초에 제가 무리한 무례한 부탁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질문내용입니다.

한자로 복()자의 의미는 술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그린 그림 문자에서 출발한 글로서 '가득하다'라는 뜻이다. God bless you!!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길'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로 번역한다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길 간구하는 말이다술이 가득 담긴 항아리와 같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가득하게 되길 간구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성장과 세속화는 애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번역하면서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성장도 기복 신앙에 기초한 (물질)의 주시는 종교로 주신(?) 물질에 의한 세속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지금 모습으로만약 '하나님께서 평강주시길'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길'로 번역되고 전해져 왔다면 과연 구약의 인물을 예로 들어 물질의 부요함도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평강)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까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전하는 기독교는 구약의 인물들이 누린(?) 삶을 나도 믿고 기도해서 현실에서 누리고자 하는 종교가 아니다구약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진 재물이 지금 나에게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허락해 주셨으면 하는 것인가?

히브리 민족이 출 애굽할 때 홍해가 갈려져 애굽 바로의 군대가 수장되어 전멸한 기록이 기독교가 승리한 역사인가요셉과 다윗과 같이 성경 속 인물처럼 그들의 파란 만장한 인생 역정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고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된 성공(?)의 삶을 나도 믿음으로 살고 싶은 것인가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삶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신약 어디에도 세상의 것을 구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결국 물질도 홍해를 가르는 이적도 왕이 되고 총리가 된 성공(?)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존재하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는 과정일 뿐이지 않을까?”

이렇게 질문한 성도님은 이렇게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기독교는 쉽게 사는 길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이규현 목사님의 지난 주 설교 말씀이 큰 도전의 말씀으로 큰 울림이 되어 다가 왔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그 길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온전히 받아 누리며 사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라 이해했고 부족하지만 더욱 기도하면서 그 길을 따라 가리라 다짐합니다.

 

집사님의 글을 읽다가 두 가지 생각이 제게 임했습니다.

아직도 한국교회에서 양육 되어 전 세계에 파송되어 있는 한국인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 중에는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몸부림치며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남은 자들이 생생히 살아 있구나!의 감동이 첫째요둘째는 적어도 그 동안 세뇌 되다시피 한 번영신학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성도에게 바른 성경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습니다그러려면 이런 몸부림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더 철저하고 올바른 신학적 기초에 목숨 걸어 말씀을 준비하고 전해야 하겠다는 또 다른 결심이 제가 강하게 임했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저런 생각과 대화를 나누시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생각의 끝이 어디에서 종결됩니까?

한 줌의 재도 안 되는 기승전물질입니까기승전자녀들입니까기승전헤게모니입니까기승전권력입니까?

바울은 그의 전 인생을 예수께 걸었습니다.

해서 그는 그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머리되신 예수께서 세우셨던 교회에 올인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무엇입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의 아파하심으로

주님이 흘린 눈물은 십자가의 무거움이 아니라오

우리의 무지함을 아파하시며 흘리신 눈물이었소

골고다 그 언덕길을 우리 위해 걸어야했던 주님

비난과 손가락질에 물과 피를 흘려야 했건만

험난한 주님의 십자가 몹시도 무거웠건만

우리의 비난과 채찍에 제물 돼야 했던

주님의 아파하심으로 나 구원 얻었으니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이 한 몸 바치리다

당신은 알고 있나요 죽음으로 사랑하신 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자기 몸 다하여 죄인을 사랑하신 것을 (x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