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본문: 고린도후서 11:16-21 서론)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제가 흠뻑 빠졌던 스승은 당시 학장으로 계셨던 이상훈 교수님이었습 니다. 일주일에 두 번의 채플이 있었는데 강사로 선 분들의 설교보다 제가 더 사모했던 것은 선생님의 축도였습니다. 그 축도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언어들이 담겨 있는 빼어난 수작문과도 같았습니다. 그 축도를 받으면 천국에 막 입성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황홀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선생님은 유학 시절에 수사학을 전공하신 분이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서 수사학이라는 단어가 대단히 낭만적으로 들릴 것 같아 조금은 조심스럽습니다. 수사학은 문자 그대로 언어의 표현을 극대화시키는 학문입니다. 그렇다고 수사학이 시적이고, 문학적이고, 화려하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에만 머물면 대단히 위험해 집니다. 수사학의 범위는 상당히 포괄적입니다. 아름다운 언어를 무대 중앙 올릴 수도 있겠지만, 반면 수사학은 대단히 거친 공격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사학적인 표현은 칼날의 양면과도 같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런 정황을 아주 잘 보여 주는 텍스트입니다. 본론)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보면 수사학적인 메타포(은유)가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0:13절에서 바울이 선언했던 말씀을 복기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무슨 말이었습니까? 고린도교회에 존재했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이미 견고하게 세워 놓았던 고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목회적인 상황들을 자기들의 수고인양 탈취해 버렸다고 했습니다. 영적인 도적질을 한 셈입니다. 그러면서도 적대자들은 고린도교회의 견고함이 마치 자기들 사역의 분복인양 자랑을 한 것입니다. 이 일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바울이 반응한 것이 앞서 소개한 고린도후서 10:13절로 방어한 것입니다. 나는 분수 이상으로 자랑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만에 하나 내가 자랑을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행하는 자랑임을 밝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의외입니다. 16-18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다소 어리석은 말을 계속하더라도 나를 비난하지 말아주십시오. 비난하려거든 차라리 나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서, 내가 큰소리를 치게 좀 해주십시오. 이러한 말투는 그리스도에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오,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요즈음 인기 있는 현란한 설교자들에게서 찾아낸 못된 버릇입니다. (중략) 여러분이 설교단에서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자들에게 감탄을 금치 못하니, 나도 자랑해 보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 곧 옛 친구가 하는 말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분명히 자랑하지 않겠다고 했던 바울인데, 오늘은 자기자랑을 하겠다는 말인 셈입니다. 이율배반의 바울이라서 그런 겁니까?그럴 리가요. 앞서 설명 드린 대로 오늘 본문의 메시지 안에는 바울만이 선포할 수 있었던 바울만의 강한 언어적 메타포가 담겨 있습니다. ① 주께서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자랑을 하겠다는 것. ② 거짓 사도들의 자랑에 쉽게 넘어간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이니 나도 복음을 위해 너희들에게 자랑을 할 테니 나에게 넘어오라는 것 본문의 정황만 보면 바울은 자신은 결코 자랑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번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어리석은 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랑을 한 번 해보겠다고 선언한 것이 오늘 본문 16-18절의 말씀입니다. 듣고 나니 우리 교우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바울도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다. 바울도 상황에 따라 변질된 존재다. 바울이 이렇게 변질 된 것을 보니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과 오십보백보다.’ 이것이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십시오. 다시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적대자들과 그들에게 속절없이 무너진 나약한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향한 강력한 은유의 메시지를 남긴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 교회 바로 세우기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갖고 있는 영적 강점이었습니다. 도무지 적대자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바울의 사도적인 권위를 증명하는 바울의 자랑 이유였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20절을 봅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이 구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는 거짓 사도들의 행태를 4가지로 열거합니다. Ⓐ 종으로 삼았다.(카타둘로이): 아마도 고린도교회를 무너뜨리던 거짓 사도들의 영향력이 이 정도로 막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잡아먹었다.(카테스테에이): 이 단어는 우리 말 중에 아주 부정적인 단어인 ‘등쳐먹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학자들은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은 자기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아내들까지 교회에서 보조비를 받도록 했던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는데 첨가하여 대단히 무거운 사례를 요구했다고 보는 해석입니다. Ⓒ 사로잡았다. (람바네이): 이 단어는 오늘의 의미로 해석하기 좋은 실례가 있습니다. 마치 번영신학과도 같은 의미로 전혀 복음적이지 않은 승리, 영광, 능력 행함, 축복으로 현혹시키는 비신학적 행위들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 자고하게 하다.(에파이레타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교만하다고 윽박지름으로 그들에게 사기를 떨어뜨리는 악행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네 가지의 내용을 묶어 해석한다면 이런 결론이 도출됩니다.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존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적대자들의 안중에는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으로 세워져 가는 것에 대해서는 1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교회를 이용하여 본인들의 재산을 축적하고, 기득권적인 권력을 쟁취함으로 황제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 말고는 교회에 대하여 일체의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형적으로 오늘을 사는 현대적 그리스도인들의 이기성과 닮아도 너무 닮았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바울은 어떤 자세를 취했습니까?본문 21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서 목회자로 30년 이상의 인생을 살아온 저로서는 뭉클한 동변상련의 감동이 임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톰 라이트가 번역한 21절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그럴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감히 내가 무엇에 대해 자랑한다면(내가 지금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나도 자랑해 보겠습니다.” (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고린도후서”, IVP, 163,168.) 바울은 분명히 했습니다. 나는 그리고 나의 동역자들은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만큼 뻔뻔하거나 담대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부득불 자랑을 하나 한다면 (이것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라고 역설합니다. 다음 주 강해 시간에 더 자세히 살피겠지만 이것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30절이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담임목사는 이것을 이렇게 묵상합니다. 바울이 보고 있었던 것은 교회를 위해 나 같은 것이 약해지는 것, 작아지는 것,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도리어 나는 그렇게 되는 것을 자랑한다고 한 것입니다. 왜 이런 어리석은 자랑을 합니까? 바울이 보았던 것은 교회 바로 세우기였기 때문입니다. . 바울은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의 약함, 그리고 약해짐을 적대자들을 향하여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는 본인에게는 큰 손해이며, 해로운 일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적대자들이 걸었던 강함과는 정 반대로 약함을 자랑한 것입니다. 바울의 교회론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에베소서 2:20-22절이 증언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바울이 보았던 궁극적 관심은 교회가 세워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질서하고 리더십이 없는 엉망진창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분명하고 바른 질서 즉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이 되시고, 성령께서 통치하시고 거하시는 아름다운 교회를 꿈꾸었습니다. 바울이 본 것은 교회 세우기였습니다. 10년 전에 하버드대학교의 사회철학 교수인 마이클 센델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 정의라는 의미는 단순하게 해석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고 역설한 부분에서 큰 교훈을 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2020년 그는 또 다른 지성적인 화두를 하나 던졌습니다. 그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 사회적 구조를 갖고 있다. 전 세계가 학력주의와 능력주의라는 테두리 안에서 거기에 걸 맞는 자격조건을 갖춘 자가 득세하고, 부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세상으로 자리를 잡았고, 또 하나 불행한 것은 이것이 너무 마땅한 구조라고 인식되고 있는데 그 인식마저도 특정 엘리트 집단에서 학습시킨 효과다.” (마이클 센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pp,162-199 - 설교자 요약) 그러면서 센델은 이런 차별적 구조를 갖게 한 것은 신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상위 계층자들이 조작한 일이기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의 영역은 태생적으로 공정하지 않음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읽다가 이런 생각을 교회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교회가 어떤 곳이어야 합니까? 특정한 직분자, 특정한 지식인, 특정한 부유층에 속한 자들만의 교회로 존재한다면 그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부류의 교회들은 교회라는 이름을 내 걸었지만, 실상은 세속적 마인드가 뿌리가 된 집단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런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전혀 신학적이지 않은 자들의 본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학습적인 행태로 만들어진 기형적 산물입니다. 교회는 누구만을 위한 교회로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지난달에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유명세를 탄 정세랑 작가가 쓴 ‘시선으로부터’라는 장편 소설을 읽었습니다. 읽다가 작가의 의도는 이해를 하겠는데 큰 그림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테제가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 에필로그에 기록된 작가의 논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p,334.) 그도 그럴 것이 정세랑 작가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심시선은 가장 굴곡이 심했던 20세기 대한민국을 살아낸 여성의 심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익히 일고 있듯이 그 시대는 여자라는 인권이 지금보다 훨씬 존중받지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국 대한민국에서 피울 수 없었던 무게의 짐을 벗어던지기 위해 자의적, 타의적인 이방의 땅에서 나그네 삶을 살며 겪어야 했던 질곡들이 있었습니다. 소설은 그녀의 사후, 모계적 가계도로 구성된 후손들에 의해 섬세한 보상받는 추도식 상황을 그립니다. 자손들에 의해 심시선에게 바쳐진 추도식 선물들은 여성의 인권적인 승화를 위해 드리는 것들이었습니다. 작가는 많이 향상 되었다고는 하나 여성의 삶이 아직도 ‘을’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합니다. 그러기에 작가는 이것을 극복하려고 모계중심의 한 가정사를 무대의 중앙에 올려놓고 주인공을 위로하고 여성적인 삶을 주도하려고 애쓴 글을 소설로 남겼습니다. 충분히 정서적으로 작가의 분노를 이해했지만 읽다가 왠지 모르게 불편해 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설에서는 여성이 배제된 것에 대한 분노의 대가로 철저히 남성의 위치가 묵살되고 있음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립니까? 혹시 이런 교회가 있습니까? 여성만으로 구성된 교회, 남성만으로 구성된 교회, 백인들만, 흑인들만 위한 교회, 가난한 자들만을 위한 교회, 부유한 자들만을 위한 교회, 스포츠 스타들만을 위한 교회, 연예인들만 모이는 교회 등등. 혹시 보셨습니까? 이해하고 들으십시오. 그렇다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를 세워가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론의 ‘敎’자도 모르고 세운 교회입니다. 몇 주 전에, 다음 회기 지방 선거에 국민의 힘 공천을 받고 제천시장에 출마 예정인 어느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명분은 독서와 글 나눔을 통해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이면에는 정치역학적인 이해타산이 있는 방문이었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방문한 분이 무언가를 제게 요청하고 지지해 달라는 의견개진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거리를 두었습니다. 만에 하나, 교회 공동체에 국민의 힘, 혹은 더불어 민주당의 의견을 지지하는 자들만의 교회라면 그게 어찌 교회입니까? 교회의 이름으로 변장한 정당이지 그게 어찌 교회이겠습니까?. 갈라디아서 강해를 했을 때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바울이 단호하게 선언한 사자후를 토했음을 살핀 적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8절을 읽어드립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교회가 세워져간다는 것은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사회적, 계층적인 구분을 두지 않고, 성적인 분리를 하지 않고 다 같이 모여 사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딱 한 가지만 보았습니다. 다음 주일에 더 자세히 살피겠지만 많은 핍박, 고난, 누명, 헐뜯기, 폄훼 등등의 억울함도 당했고, 육체적인 린치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런 모든 아픔들조차도 교회를 세우는 일이라는 한 가지를 보았기에 자랑마저도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나희덕 시인이 쓴 ‘쓰러진 나무’를 읊조리고 설교를 맺겠습니다.(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 pp,98-99.) 저 아카시아 나무는 쓰러진 채로 십 년을 살았다 몇 번은 쓰러지면서 잡목 숲에 돌아온 나는 이제 쓰러진 나무의 향기와 살아있는 나무의 향기를 함께 맡는다 쓰러진 아카시아를 제 몸으로 받아낸 떡갈나무 사람이 사람을 그처럼 오래 껴안을 수 있으랴 잡목 숲이 아름다운 건 두 나무가 기대어선 각도 때문이다 아카시아의 죽음과 떡갈나무의 삶이 함께 피워낸 저 연초록 소름 십 년 전처럼 내 앞에도 소름이 돋는다 교회가 아픕니다. 요즈음 제가 많이 사용하고 발언하는 문구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저도 이 문장을 많이 썼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좀처럼 쓰지 않을 작정입니다. 왜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공동체인데 내 시각으로 교회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선언하면 월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가 아픈 것은 사실입니다. 이렇게 아픈 교회를 치유하는 것은 떡갈나무와 아카시아 나무처럼 대각선으로 서로 기대어 있는 성도들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의 지체들이 교회를 아파 쓰러지고 있는 교회를 서로 붙들고 세워가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와 함께 라면 주와 함께라면 가난해도 좋아 참된 부요함이 내 맘에 가득하니까 때로는 날 유혹하려고 세상바람 휘몰아쳐 와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어 자비로운 주의 음성을 주와 함께라면 병들어도 좋아 참된 강건함이 내 맘에 가득하니까 때로는 날 넘어뜨리려 거친 파도 휘몰아쳐 와도 나는 결코 놓을 수 없어 따사로운 주의 손길을 내 맘 아시는 주 항상 함께 계셔 약한 내 영혼에 위로와 능력주시네 가난해도 병이 들어도 시련의 밤 어둡고 깊어도 나는 결코 떠날 수 없어 아름다운 주의 나라를 주의나라를 주의 나라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