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8일 종려주일 설교 제목: 도대체 왜? 본문: 마태복음 27:20-26 서론) 우리 개신교회는 주후 750년 공인된 신앙고백을 합니다.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의 고백 중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입으로 소리 내어 고백하는 문장 중에 다음이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그렇다면 매 예배 때마다, 미사 때마다 이름이 거론되는 ‘본디오 빌라도’는 가롯 유다와 함께 가장 치욕적인 모욕을 당하는 인사가 되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치욕의 대상이었던 본디오 빌라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허호익 교수의 설명을 소개합니다. “서기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의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특별히 감각이 둔한 사람이었다. 예루살렘 내의 로마의 주둔지였던 안토니아 요새(헤롯 성전 안에 있음)에 로마 황제의 초상화가 그려진 군기를 걸어둠으로 민중 봉기를 자초하였고, 솔로몬 연못에서 예루살렘까지 수로 공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성전 금고를 요구했고, 유대인의 반기가 거세지자 무장한 로마 군인들을 민간인 복장으로 변장시켜 민중들을 제압함으로써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도 했다. 예루살렘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려는 갈릴리 순례자들을 학살했고, 혁명 활동이 의심되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민란을 꾸미는 자들이라 하여 예수와 함께 처형했다.” (허호익, “예수 그리스도Ⅰ”, 동연,71-72.) 사정이 이렇다보니 본디오 빌라도는 언제나 유대인들에게는 불만의 제일 원인이었던 적대자로 인식되던 인물입니다. 이렇게 지배국 로마와 식민지 국가 유대라는 두 국가 사이에 펼쳐진 정치역학적인 구도 안에서 언제나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는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본문은 본디오 빌라도가 이런 정치역학적인 스펙트럼이 아닌 철저히 신앙적인 안목에서 볼 때 실패한 장본인이기에 2,000년 지나는 세월동안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고백되는 신앙고백으로 인해 치욕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로 여지없이 성토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디오 빌라도는 분명 비극적 주인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안에는 빌리도에 비해 더 영적인 안목으로 볼 때 비극적인 인물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주목할 만합니다. 저는 오늘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 아침에 이렇게 비난의 화살을 날리는 타깃이 된 본디오 빌라도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던 또 다른 비극의 공범자들을 추적해서 그들이 추구했던 심각한 오류를 발췌하고 반면교사를 삼으려고 합니다. 본론) 예수께서 목요일 저녁, 제자들과 만찬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의 동쪽이자 감람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자리를 옮기셔서 아버지 하나님께 최후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열심당원이었던 가롯 유다에 인도를 따라 예수를 체포하러 온 일련의 산헤드린 소속 유대 열심분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붙들려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었던 가야바에게로 끌려갔고, 그에게 심문을 당한 뒤, 사법적 권한이 없었던 가야바는 예수를 죽이기 위해 최종 심문자인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를 인계합니다. 예수를 유대인들이 인계하며 고발한 죄목은 신성모독, 반란 도모와 민중들을 혹세무민하여 봉기를 꾀한다는 죄목이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정서적으로 유대 종교 집단이 계획적인 예수 죽이기에 나섰다는 것을 알고 예수의 활동 지역이 갈릴리 지역임을 들어 이 송사에 휘둘리기 싫어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에게 보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를 보고 그의 소문을 들었기에 그가 어떤 기적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고 기뻐했지만 반응하지 않는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조롱은 했지만 그도 역시 예수에게 어떤 불이익을 주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고 다시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무지한 유대인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주무르고 있었던 가야바를 중심으로 한 종교지도자들의 사주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이런 민중들의 심리를 알고 있는 빌라도는 그들의 여론과 맞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침 유월절 절기였던 터라 절기가 되면 중죄인 한 명을 사면해 주는 관례에 따라 민중들에게 바라바와 예수 중에 누구를 사면할까를 묻자 이미 약속된 플랜에 따라 움직이는 유대인들은 일사분란하게 바라바를 요구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본문 20-23절을 소개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 큰소리를 들은 빌라도는 여론에 굴복하고 결국 자기에게는 죄가 없음을 상징하는 퍼포먼스인 손을 씻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판결로 재판을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해석을 통해 예수를 죽였던 공신들인 두 종류의 인간 群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에 대해 아주 냉정하게 성찰하며 살펴야 합니다. 1) 산헤드린의 기득권 세력들이라는 인간군입니다. 본문 20절을 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여기에 기록된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대제사장입니다. 산헤드린이라고 이름이 지어진 유대교의 예루살렘의 최고 의결기관은 통상적으로 71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 1명과 백성의 지도자들, 장로들, 율법학자들을 포함하여 총 71명으로 조직된 단체입니다.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주권은 없었고, 신앙적 공동체로 그 명맥이 유지되어 왔기에 유대인들은 로마의 정치적 탄압에 맞서는 대리적 조직으로 산헤드린 공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따랐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산헤드린에 속해 있는 의원들은 상당한 기득권적인 명예와 권력과 부를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산헤드린은 유대 종교회의 최고의 의결회라는 명목은 있었지만 순전히 정치적인 집단으로 변질하여 당시 유대인들 중에 상당수였던 민중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악의 집단이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들과 전쟁을 선포하신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막고 있는 원흉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이런 세속적 정치집단화 되어 있는 산헤드린의 수장이 예수님 당시에는 사두개파 출신의 가야바였습니다. 가야바의 일당들은 당시 합법화되어 있는 여러 율법적인 조항을 빌미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는데 바로 예수께서 이들 수뇌부의 뿌리를 흔드는 사역을 행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들의 위선을 강력하게 성토하고, 이들이 부를 쌓게 만들어주는 성전에 대하여 허물라고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만민이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인데 강도의 소굴로 전락시켰다고 선포하며 성전을 정화하는 혁명적 선언과 행위를 감행하기까지 한 예수는 눈에 가시거리로 제거 대상 일순위였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발한 죄목 중에 신성모독이 첨가되었고 성전파괴자라는 죄목이 포함된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도대체 왜 이들은 예수를 죽여야만 했을까요? ※ 예수를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이 말했습니다. “성서적 종교의 핵심은 인간에게 쏟으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부여되어 있는 책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헤셀, “누가 사람이냐”, 한국기독교연구소, 96.) 정말로 이것보다 더 소중한 종교의 목적이 있겠습니까? 조금 쉬운 말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여행을 기쁨으로 가는 이유는 왜 나를 하나님이 이토록 사랑하셨지! 에 감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집중하셔서 쏟으신 그 사랑에 감격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추구하는 신앙의 요소는 하나님이 나의 목적이심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목적이라는 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나는 도리어 그 반대급부인 하나님이 내 삶의 수단이 되어버리는 최악의 종교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앞에서 소개한 허호익 교수의 설명을 조금 더 참고해 보십시다. 허 교수는 예수님 당신 산헤드린 공의회에 대하여 월터 브루그만이 지적한 내용을 소개합니다.(위의 책, 398-403) ① 성전이 경제적 착취의 중심이었다. 헤롯에 의해 재건된 성전은 금으로 도배되었고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더불어 대제사장이 입었던 에봇은 금실, 청실로 수놓은 12가지의 보석으로 장식한 황소 100마리에 해당하는 가격인 10,000-20,000데나리온 정도의 값비싼 옷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호화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경제적인 수탈을 도모했는데 성전 자릿세, 제물을 신선한 것으로 바꾸어주는 데 들어가는 프리미엄, 세겔로만 드려야 하는 헌금이었기에 환전상을 성전에 두고 그들에게서 거둬들이는 세금까지 포함하면 가히 천문학적인 경제적인 이득을 얻곤 하였다. ② 성전이 정치권력의 중심이었다. 국가권력은 왕의 권력과 경제적 착취를 폭력과 종교적 제의를 수단으로 하여 보장된다. 성전의 최 우두머리인 대제사장은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의 의장이 되었다. 종교적인 수장은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政敎를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였고, 성전은 그 장소였다. ③ 성전이 지배이데올로기의 중심이었다. 성전 종교의 키워드는 제의의 중앙화였다. 단일 성소 예배라는 신명기적인 율법을 악용하여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만 야웨가 받는 제사라고 율법화 하여 성전을 지배이데올로기의 본거지가 되게 하였다. 세 가지를 인용했는데 공통분모가 무엇입니까? 전혀 하나님 신앙과는 관계없는 종교를 수단으로 삼은 극단적 폐해를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종교가 수단이 되면 이렇게 변질되고 타락합니다. 아모스 7:12절을 주목하십시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궁정 예언자이자 길 예언자인 아마샤가 흉 예언자이자 진실한 하나님의 예언자인 아모스를 공격하며 성토할 때 내뱉었던 윽박지름이었습니다. 아모스는 그의 예언적 행위가 떡을 위한 행위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심히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반면 바울의 관점을 반대급부로 소개합니다. 고린도전서 9:3-5절입니다.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고린도교회에 존재하던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시비 걸며 이렇게 공격했습니다. 진정한 사도가 아니니 고린도교회에서 사례비도 받지 못하고 자비량 선교를 한다고 비아냥댔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강력하게 변론합니다. 내가 베드로처럼, 다른 사도들처럼 먹고 마실 권리, 부양가족을 책임질 권리가 없는 줄 아느냐? 마땅히 나도 그런 권리를 가졌다. 내가 자비량으로 선교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라라고 역설합니다. 다. 김판임 교수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으면 종속된다는 경제상의 기본 사실을 알고 있었다.”(김판임, “바울과 고린도전서“ 동연 간,p,144) 이런 목회신학적인 바탕을 갖고 있었던 바울은 이렇게 사역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의 활동에 대한 정당한 삯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교인들이 주는 생활비가 아니라 그들 자신, 즉 그들의 그리스도 됨이다.” (앞에 책, p,145) 전율하는 감동이지 않습니까? 너무 귀하고 아름다운 사도의 단면이지 않습니까? 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을까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수단이 아닌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2) 무리들입니다. 본문 20절을 다시 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무리들이 누구입니까?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기득권에 길들여져 있었던 자들입니다. 무리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시키는 데로 한 자들입니다.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라고 종용하던 종교지도자들의 입맛대로 행동했던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무엇을 빌라도에게 외쳤습니까? 22절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성도가 어떻게 하면 無理가 됩니까? 잘못 배우면 무리가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이미 강도의 굴혈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강도의 굴혈로 변질된 그곳에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했겠습니까? 사도행전 8:341절은 대단히 아픈 선언입니다.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왔다가 다시 자기의 본국으로 내려가던 어간 빌립집사를 만났을 때 빌립이 그에게 물었던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풀어주는 극적인 장면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으로의 도보 여행을 했던 간다게의 내시는 성전에서 이사야 53장을 풀어줄 그 누군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허무한 여행을 마친 셈이 됩니다. 귀환하는 도중 성령의 은혜로 가사에서 빌립을 만났고, 수난 받으신 종 예수를 소개받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 감격까지 누리게 되었음을 우리는 너무 잘 압니다. 성전에서 그 어떤 하나님의 뜻과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지 못한 예루살렘의 무리들은 결국 자기들을 위해 오신 예수를 죽이는 공범자들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들은 이런 비극의 선택을 하였을까요? ※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을 잘못 배워 잘못 아는 것입니다. 이번 교단 신문에 글을 기고하면서 많이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하면 공격 받기 쉬운 테제를 다루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고문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벌써 10여 년 이상은 족히 될 것 같다.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간된 책에 빠져 있었던 시기가. 심리학, 상담학이 강단을 융단 폭격하고, 긍정의 삶, positive thinking(적극적 사고방식), 잘 되는 나, 목적이 이끄는 40일, 청부론, 청빈론이 강단에서 선포되어 할 십자가의 도를 확인사살하고 있는 바로 그 때, 고든 콘웰의 데이비드 웰스 교수가 쓴 ‘신학실종, 윤리실종, 위대한 그리스도, 거룩하신 하나님, 용기 있는 기독교’와 웨스트민스터의 마이클 호튼이 쓴 ‘Christless Christianity(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기독교의 핵심, 언약신학, 세상에 포로 된 교회’를 미친 듯이 읽으며 반항했던 그 치열함이 고스란히 뇌리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책들은 필자가 애지중지하며 아끼는 愛書들이기에 언제나 설교 원고에 인용되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웰스가 정신이 번쩍 들게 했던 엄청난 갈파를 하나 소개한다.” (나사렛 신문 4월호 기고 글 중에서) “신학적 성찰에는 과거에 대한 전체적 연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과거에 하나님이 교회에서 일하시고 역사하신 사실에서부터 현재의 폭풍우 가운데서 교회라는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는 무게 중심을 찾게 해준다. 과거의 영적인 부요를 모으며,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해 줄 수 있도록 만드는 반성적 성찰을 준다. 그러므로 신학적 성찰을 하는 자는 언제나 신앙으로 고백되는 내용과 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실종”, pp,154-155.) 우리는 잘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를 배워서는 안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배워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가르치는 설교에 열광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를 알려주는 설교에 열광해야 합니다. 내가 섬기고 다녔던 교회는 신자의 수가 기천명이었더라를 뽐내고 자랑하는 교회에 길들여지지 말고, 내가 섬기는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달려갔다는 것에 박수치는 잘 배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변질되면 나쁜 것이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 패러디합니다. “성도가 타락하고 변질되면 나에게만 나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롭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종려주일이자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본문 20절을 다시 읽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까??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를 측은히 여깁니다. 참 불행한 자라고 동정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나는 혹시 예수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은 종교인은 아닙니까? 나는 혹시 잘못 배운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착각하며 영적으로 해로운 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냉정하게 성찰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몸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님이 당하신 고난 이 죄인을 위함이니 범죄 한 날 위해 주 욕을 보셨네 나 무엇으로서 그 은혜 보답 하리까 무한하신 주의 사랑 고맙고도 크도다 나 평생 사는 동안은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