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떠나
본문: 사도행전 9:10-19(1f), 사도행전 22:12-13
서론)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유명한 어록이 있습니다.
“incruvatus in se"
이 라틴어 문구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자신에 대해 안쪽으로 구부러짐’이라는 의미의 문구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로 바꾸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타적 삶’ (outward)입니다.
그런데 아랑곳하지 않고 철저하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안쪽으로 구부리려고 하는 ‘이기적 삶’(inward)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을 루터가 지적한 셈입니다.
문제는 이런 “incruvatus in se"의 자세를 갖고 있는 한 결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데에 그 불편함이 있습니다.
주께서 명하신 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타인을 위하여 그들을 향하여 내 자아가 구부러진 삶을 살려면 반드시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순종입니다.
해서 순종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기 쉽게 아주 가벼이 쓰는 단어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순종은 가볍게 여길 단어가 아니라 가장 심오한 영적인 삶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복음서에 있는 성경 한 구절을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19:2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영생을 얻기 위해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명하신 내용입니다.
그러자 이 명령을 받은 부자 청년이 행한 반응을 이어지는 22절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그의 걸작인 ‘나를 따르라’에서 부자 청년의 불순종에 대하여 아주 의미 있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순종과 함께 믿음도 버렸다.” (본회퍼,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83.)
본회퍼의 이 해석은 단순한 해석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순종을 믿음과 병행하는 요소라고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해서 본회퍼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 유명한 그만의 독특한 신학적 해석을 남깁니다.
“성서 안에서 우리에게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전체 말씀을 통해 오직 순종하는 자에게만 믿음을 선사하시고, 오직 믿는 자에게만 순종을 선사하시는 분이시다.” (위의 책, 88.)
그렇다면 우리는 부담스럽고 불편하지만 젊은이들의 말 표현으로 빼박(?)의 교훈을 담지하게 됩니다.
믿음이 아무리 좋다고 폼을 잡고, 말을 하고 다녀도 그의 삶에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는 삶을 보이지 않으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오늘 저는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의 피정 내용을 ‘순종’으로 정했습니다.
귀 기울여 믿음 있는 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으로 여행을 떠나 보십시다.
사도행전 9:1-9절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사울이 바울로 회심하게 된 드라마틱한 바울의 엔 카운터(encounter)를 소개합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은 전통적으로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주의의 배경을 갖고 있었던 청년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히브리 율법에 아주 정통한 사람으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다소에서 탄생했지만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득권적인 힘을 갖고 있었던 젊은이였습니다. 해서 그는 맹목적으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한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는 예수를 핍박하는 것에 대한 유대신학적인 확신과 힘을 갖고 행동하던 자로 여겨집니다.
이런 유대적인 신앙의 열혈청년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213KM나 떨어진 다메섹으로 원정대를 조직하여 예수주의자들을 발본색원하라는 유대종교회의 명령을 받고 그 장정에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도상에서 갑자기 하늘로서 홀연히 빛이 사울을 비추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사울은 그 자리 땅에서 엎드려지게 되었는데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음성을 듣는 종교적 체험(누미노제)을 경험하게 됩니다.(사도행전 9:4-5)
이후 그는 이 다메섹에서의 이 놀라운 사건을 경험한 즉시로 눈에 비늘이 끼게 되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의기양양하게 들어가던 다메섹을 사람의 손에 이끌리어 들어가 직가라는 곳에 있었던 유다의 집에서 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는 일을 당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8-9)
오늘 본문은 설명한 사울의 엔 카운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메섹에 거주하고 있었던 아나니아를 제자를 호출하십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아나니아의 정체를 ‘마쎄테스’ 즉 ‘제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구절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다메섹에는 이미 제자군 으로 주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제자 아나니아를 부르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을 유대인들에게 간증하는 오늘 두 번째의 본문인 사도행전 22장에서 아나니아를 소개하는 데 주목할 만합니다.
사도행전 22:12절입니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그렇습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 지역에서 율법에 따라 살고 있는 다메섹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마저도 칭찬받던 히브리인 제자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은혜롭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나니아를 하나님이 부르신 이유는 순전히 사울을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나니에게 명령을 내리셨는데 9:11-12절 본문을 보면 직가라는 곳에 가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중일 터이니 그를 찾아가서 안수하고 다시 보게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자 주의 제자였고 경건하며 신실했던 아나니아가 자신이 듣고 있었던 경험과 실체에 대한 이유를 들어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본문 13-1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그 동안의 정황을 기초로 한다면 아나니아의 항변은 매우 정당한 항변입니다.
도무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하여 대단히 위험한 인물인 사울을 찾아 그에게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하라는 주의 명령이 이론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을 받으신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친절히 당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셨습니다.
사울은 이방인들을 물론 불신자들을 위해 택한 내 그릇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15-16절)
이 설명이 끝나자마자 아나니아가 행동한 반응에 주목하십시다.
본문 17-19절 (1f)입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17절에 보이는 단어 ‘떠나’라는 단어가 제게 감동과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부연 설명이 떨어지자마자 또 다른 토를 달지 않고 즉시 직가로 떠났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아나니아가 사울에 대하여 들은 정보는 환상 중에 주님이 말씀해 주신 것 말고는 없습니다.
주변 정황은 여전히 살벌합니다.
사울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아나니아에게 있어서 사울은 요주의 인물인 것 말고는 어떤 다른 정황도 포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나니아는 주님이 명하신 명령이 정서적으로 볼 때 매우 두렵고 긴장되는 명령이었을 것은 자명합니다.
해서 아나니아는 어떤 의미로 보면 주님의 명령은 있었지만 적절한 거리두기로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 분명한 정황을 소상히 알아보고 움직여도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의 명령을 받자마자 직가로 떠나 사울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서 사울에게 안수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눈을 멀게 한 비늘을 벗게 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오늘 본문 정황을 본문에 의거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22장으로 외연을 확장하면 아나니아의 사역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종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두 가지의 아나니아의 순종의 행위를 소개하겠습니다.
두 번째 본문인 사도행전 22장으로 건너가십니다.
12-13절입니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이 구절에서 아나니아가 행한 두 가지의 진정성이 보여야 합니다.
1) ‘내게 와 곁에 서서’입니다.
아나니아는 위험한 인물인 사울을 직접 찾아 나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눈여겨볼 대목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9:11절에 기록되어 있는 직가(直街)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straight street' 즉 ‘곧은 거리’라는 뜻입니다.
유다의 집은 직가라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뮌스터 대학교의 에른스트 헨첸 교수는 직가를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곧은 거리는 다마스쿠스의 동서로 뻗어 있으며 양측에는 주량현관(여러 개의 기둥을 줄지어 세운 현관)이 있고 각각 큰문에서 끝난다. 추측건대 오늘날 베를린의 ‘보리수 거리’처럼 잘 알려져 있고 화려한 거리였을 것이다.” (헨첸, “사도행전(1)”, 국제성서 주석,481.)
이재철 목사께서도 이 직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다르발 무스타킴’이란 이름으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의 주된 통행로로 이용되고 있는데, 다메섹 성의 동문에서 서쪽으로 약 1,6.km 직선으로 뻗은 대로입니다.” (이재철, “사도행전 속으로 4“, 234)
지금 왜 직가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까?
사울과 아나니아를 사용하시면서 먼저 일해 놓으셨던 하나님의 배려를 성명하기 위함입니다.
주군의 명령을 받은 아나니아의 즉각적인 순종은 직가라는 곳에 있는 유다의 집을 찾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고대 도시들은 대단히 복잡한 미로구조로 만들어 적의 공격을 대비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대 도시들 중에 이렇게 직선으로 곧게 뻗은 도로들은 극히 드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끌려갔던 곳, 그리고 아나니아가 찾아가야 했던 곳이 직가였습 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이 전제되었다는 은혜를 발견합니다.
곧게 뻗어 있는 그 유명한 직가를 찾는 것은 쉬웠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아직도 두려운 마음이었을 것이 분명한데 찾기 쉬운 곳에 사울을 인도하신 것을 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분명히 느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이 확신 속에 거하였기에 요주의 인물이었던 사울의 가장 가까운 지근거리까지 접근하여 사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다시 보라’입니다.
두 번째의 순종의 역동을 보겠습니다.
다시 사도행전 22:13절 하반절을 읽겠습니다.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사도행전 9:13절에서 아나니아가 인식했던 사울은 적대자였습니다.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이다.”
그런데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을 찾아 사울을 만난 아나니아가 사울을 무엇이라고 호칭합니까?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행 22:13)
‘아델포스’ 즉 ‘형제’라고 호칭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 된 사울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호칭을 바꾼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즉각적으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다시 보라’ (아나-블레포)
여기에 기록된 ‘보라’라는 헬라어 단어 ‘블레포’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목해서 본다는 뜻입니다.
즉 look at 의 의미입니다.
‘다시 보라’는 것은 이전에 예수를 핍박하는 자로 살았기에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볼 수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제는 영적 시력을 갖고 보라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성령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던진 일성을 기억하십니까?
사도행전 3:4절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건성으로 앉은뱅이에게 ‘우리들을 보라(에이도)’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앉은뱅이에게 우리들을 주목해서 ‘보라’(블레포)고 말한 것입니다.
‘블레포’는 진정성이 있는 관계형성을 의미하는 봄입니다.
바라봄 말입니다.
직가에 찾아간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진정성을 다하여 안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의 일을 주목해서 보게 될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블레포)
이제 저는 설교의 원 의미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아나니아는 마지못해 사울을 찾아 직가로 간 것이 아닙니다.
아나니아는 흉내를 낼 태세로 사울에게 안수한 것이 아닙니다.
아나니아가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능동적 찾아간 것은 본문 15절의 말씀을 분명히 믿고 순종한 신앙적 행동이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울은 주군께서 이방인들과 불신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택한 그릇임을 아나니아가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곧바로 순종이라는 신앙의 최고 행위로 연결되었습니다.
이제 앞에서 언급했던 본회퍼 목사의 갈파가 다가오십니까?
“성서 안에서 우리에게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전체 말씀을 통해 오직 순종하는 자에게만 믿음을 선사하시고, 오직 믿는 자에게만 순종을 선사하시는 분이시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주간 독서 목록은 대한민국의 유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5명의 석학들이 자기들의 전공에 의지하여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할 여러 정책 자문을 한 세미나 모음집인 ‘초-가속’(HYPER-ACCELERATION)이었습니다.
이 중에 카이스트의 뇌 과학자인 김대식 박사가 지적한 한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밀레니엄세대, Z세대들 사이에서는 인터넷상에서 ‘참’의 정의가 이미 달라졌다고 얘기들 합니다. 진실이, 팩트가 참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많은 인플루언서가 퍼뜨린 게 참이 되어 버립니다. 진실의 개념 자체가 양적인 (quantitative)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김대식, “초가속”, 동아시아,272)
사정이 이렇다보니 우리는 유트브 조회 수에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성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트브 조회 수가 있으라 하시니 있었고”
“유트브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유트브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유트브가 말해야 비로소 순종하는 시대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창세기 12:1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러자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12:4절의 말씀으로 확인하십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순종의 믿음과 정 반대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영악함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가니까 따라갔던 영악함의 대명사입니다.
영약함의 대명사는 소돔과 고모라의 비극을 맛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따랐던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영약함의 포기자처럼 보였던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가나안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땅, 어느 곳이라고 명명하지 않은 땅으로 떠나라는 명령은 영악한 자는 순종하지 못합니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의 풍요로움을 버리고 알지 못하는 땅으로 떠난다는 것은 영악한 자는 결코 행할 수 없습니다.
순종하는 자만 가나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승리하는 데 그 무기는 순종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의 기자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5:22절 하반절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To obey is better than to sacrifice.)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면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