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8일 사순절 두 번째 주일 설교 제목: 가끔은 멈추어야 합니다. 본문: 여호수아 8:30-35 서론) “무소유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아니다 싶을 때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 진짜 자유인입니다.” (혜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쌤앤파커스, 216) 8년 만에 다시 서고에서 끄집어 낸 젊은 승려의 이 글은 밀리언셀러에 등극한 혜민의 책에 실려 있는 그의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프랑스에서 제일 먼저 프리섹스의 물결이 범람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니까 프랑스 남자의 평균 섹스 대상이 17명이라고 합니다. 평균이 이 정도이니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프랑스는 완전히 국가기강이 무너지고 후진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프랑스에 요즈음 다시 보수화의 물결이 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니다’하고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가 이 물결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이러한 추세로 계속되다가 나라가 망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진체를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악한 궤계입니다.” (전병욱, “파워 크리스천”, 74-75.) 이 글은 24년 만에 서고 한쪽으로 치워둔 전병욱 목사가 쓴 책 중에 가장 많이 팔린 기독교 베스트셀러로 그 유명세를 펼치던 ‘파워 크리스천’에 실린 글입니다. 2021년에 이들이 말한 말들을 그들의 책을 통해 복기하면서 오만 가지의 복합적이고 씁쓸한 감정이 제게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이들은 왜 말한 대로 살지 못했을까? 아주 쉽고 단순하게 말해 보려고 합니다. 멈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것 때문에 본인들이 멈추어야 할 때를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해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극혐(極嫌)의 감정을 갖고 이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들에게 이렇게 쏟아 붙인다고 미리 짐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이렇게 진단하려고 한 이유는 한 발을 물러서서 이들이 행한 일탈의 내용을 추적해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일탈에는 여러 가지의 사회학적, 심리적, 혹은 종교적인 원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사순절 두 번째 주일에 설교를 통해 말씀드리려고 하는 진단은 조금 다른 차원입니다. 나누어 보십시다. 몇 달 전에 친한 동기 목사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차준희 교수가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친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일주일을 살면서 어느 경우, 바쁜 일이 있어 책을 읽지 못한 날이 생기면 그 날은 영락없이 눈을 감으면 책들이 망령처럼 떠돌아다니는 악몽을 꾼다는 가십을 전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들 중에 이렇게 표현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중증 정신병이야! 전문적인 용어 중에 ‘workaholic'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번역하자면 ‘일중독’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본인이 하고 있는 일의 테두리를 벗어날 때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대단히 불안해하는 증상을 보일 때,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일중독자라는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고 진단합니다. 일중독환자의 치료 과정은 일을 중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중단의 과정은 대단히 예민한 과정이기에 정신의학적, 심리적, 또 종교인이라면 종교적인 팀 치료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알콜 중독, 왜곡된 성 중독, 도박 중독, 권력 중독, 돈 중독 등등 일체의 중독은 맥을 같이 합니다. 이들이 왜 망가졌을까요? 결론적인 나름의 답을 미리 드린다면 멈춤(stopping)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사순절 셋째 주일 아침에 저와 여러분에게 주는 귀한 은혜가 담보되어 있는 본문입니다. 메시지 선포에 귀를 집중하여 귀를 기울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전 이해를 나누겠습니다. 모세 사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불안한 상태에서 모세의 리더십을 이어 받은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함께 하셨던 것처럼 내가 너와도 함께 하시겠다는 강력한 은혜를 받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막중한 사역을 나름 잘 감당하며 선방했음을 본문 여호수아 8장 이전에서 독자들인 저와 여러분에게 신명기 역사가는 보고합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건너야 하는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도하했고,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여리고성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나름 교만했고, 영적으로 흐트러져 있었던 이유로 아이 성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지만, 다시 문제를 직시하여 원인 제공자를 처단하고 영적 진열을 재정비하여 아이 성도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30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그 때가 언제입니까? 주석이 조금 필요한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아이 성 패배 이후, 패배의 원인을 제거하고 다시 아이 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에 여호수아는 또 다른 전투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기브온 지역을 점령해야 하는 일, 만만치 않았던 아모리와의 일대 격전, 가나안북방의 하솔과의 전투 등 아직도 가나안 입성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넘쳐나던 바로 그 때였습니다. 아이 성 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사기가 충천한 이스라엘은 앞에서 열거한 가나안 거민들과의 남아 있는 싸움을 그대로 행하면 더 유리할 수 있는 바로 그 때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선택은 대단히 의아한 일이었습니다. 기세를 몰아 계속 전투하는 곳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베이스캠프가 있었던 길갈로 돌아갔으면 약 50KM를 이동하여 세겜을 간 것이고, 혹 아이 성에서 곧바로 세겜을 갔다면 약 37KM를 도보로 이동한 셈이 되는데 둘 다의 공통점은 전쟁터가 아닌 세겜으로 갔다는 점입니다. 어떤 것이 되었던 여호수아의 이 행보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아이성 전투 이후였기에 체력적으로 적지 않은 부담스러운 일인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여호수아는 다음 전쟁터로 가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세겜으로 공동체를 이끌고 갑니다. 여호수아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이 행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어지는 본문 해석을 추적하다보면 우리는 대단히 의미 있고 감동적인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추적해 보십시다. 여호수아는 만사를 제쳐두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세겜 골짜기로 집결시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50KM 내지 37KM를 도보로 이동하여 세겜으로 간 것입니다. 세겜은 골짜기입니다. 세겜 골짜기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에발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그리심 산이 있습니다. 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이끌고 세겜에 있는 에발산으로 이동을 했을까요? 그 답을 신명기 27:4-8절에서 알려줍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그렇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입성 전에 명령했던 그 명령에 철저히 순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순종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크게 네 가지입니다. ① 제단 만들기입니다. 본문 31절 전반절을 봅니다.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에발산에 도착하면 그곳에 쇠(철)로 만든 제단이 아니라 자연석 그대로 돌로 된 제단을 만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② 제단 쌓기였습니다. 본문 31절 후반절입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③ 율법 새김이었습니다. 본문 32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④ 율법 낭독이었습니다. 본문 33-35절을 봅니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여호수아의 행하였던 네 가지의 행동이 어떻게 보이셨습니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액션으로 보이지는 않으십니까? 전쟁이 한 참인데 어떻게 보면 예배니 드리고 있는 한가함으로 보이는 이 내용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정서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건 영적 팩트를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갖는 생각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네 가지에 담긴 영적 교훈은 중요합니다. ※ 궁극적인 승리를 위한 영적 멈춤이라는 교훈입니다. 사순절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피정 기간 동안,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잘 가고 있는 지를 뒤돌아보기 위해 가끔은 멈추는 것입니다.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인가 뒤돌아보기 위해서는 가끔은 멈추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점검해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걷고 있는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인지를 살피기 위해서 에발산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선조였던 모세기 그토록 당부했던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전쟁 중이라는 핑계로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를 점검하기 위해 에발산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혹시나 폭주하고 있는 질주를 하는 것은 아닐까 점검하기 위해 에발산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에발산에 들어가서 모세가 명했던 명령을 뒤돌아보며 그대로 순종한 것은 단순히 순종만을 한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 영적 숨고르기를 위해 멈춘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해서 제단을 만들 때, 자연석으로 돌단을 만들며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사람의 기교에 의해 만들어진 단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돌로 제단을 만들라는 말에 순종한 이유는 인간의 수단이나, 무기에 의지하여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재점검한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은 전쟁이 목적이 아님을 이스라엘에 다시 천명한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 중이라는 사안이 시급한 것임을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알아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이 명령하신 전쟁이었으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에발산에 들어와 드리라는 번제였고, 화목제였습니다. 가장 위급하고, 긴장 될 때 너의 삶을 그리고 범사를 주장하고 인도하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네가 지금 이기고 있는 일체의 일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하나님께서 인식시켜 주신 것입니다. 멈추지 않으면 이것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사를 드린 뒤에 율법을 돌에 새기라고 했습니다. 자,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의 율법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율법 조문을 돌에 새기라고 했다면 전쟁 중에 있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 일은 대단히 부담스럽게 귀찮고, 시간도 많이 소비된 일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일을 해야 했던 것은 전쟁의 폭주를 멈추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앙생활의 승리는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앙생활은 불편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심비에 새겨 넣는 작업임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말씀을 새기지 않는 자가 21세의 사탄의 권세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어불성설입니다. 마지막으로 율법을 읽으므로 듣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은 감동의 감동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세겜은 골짜기였습니다. 골짜기를 중심으로 북쪽 산이 에발 산에는 르우벤, 갓, 아셀, 스블론, 단 , 납달리 지파를 서게 했습니다. 남쪽 산이었던 그리심 산에는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를 서게 하였습니다. 제사장과 레인 사람들은 법궤를 가지고 골짜기에 섰습니다. 그렇게 법궤가 있는 곳으로 모든 이스라엘 12지파의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 엄위한 순간, 여호수아는 모세의 온 율법을 통으로 낭독했습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여호수아가 큰 소리로 낭독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들었던 것입니다. 지금 저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긴박한 가나안 전쟁의 계략을 짜는 것이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저들은 지금 하나님과 대면하기 위해 일체의 일을 멈춘 것입니다. 한홍 목사가 쓴 ‘리더여, 사자의 심장을 가져라’에 나오는 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빠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차를 몰고 다니느라 바빠서 기름을 넣을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홍, 리더여, 사자의 심장를 가져라, 두란노,139.) 펜데믹의 공포가 대한민국을 덮친 지가 이제 14개월째를 접어들고 있습니다. 지난 14개월을 산 현장 목회자로서 뼈저리게 한국교회를 목도하며 느낀 공포는 바이러스의 공포가 아닙니다. 가장 큰 두려움은 사탄이 집요하게 공격함으로 앗아가고 있는 말씀 탈취의 공포입니다. 오늘, 내가 멈추어서 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말씀을 지금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의 공포입니다. 그러나 더 크게 두려워 떨 것은 잃어버렸는지 조차도 관심 없는 영적 한센 병 환자가 되어 있다는 공포입니다. 멈추지 않으면 이것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맺겠습니다. 인디언들은 드넓은 광야를 말을 타고 한참을 달리다가 어느 정도 달려가면 반드시 말을 멈추게 하고 뒤를 돌아본다고 합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인디언들이 말을 쉬게 해 주는 의미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설명은 더 깊은 감동을 제게 주었습니다. 인디언들이 뒤를 돌아보는 이유는 정령(신들)들이 따라오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미신입니까? 우상을 숭배하는 미개한 것들이 인디언이라고 깔보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무시무시한 인디언들이 갖고 있는 영성에 대하여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또 다른 원주민들의 신앙을 짓밟는 아이러니한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예수를 위해서 했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의 정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하등의 이유로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신자보다 못한 일을 신앙의 이름으로 저지릅니까? 올바른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 아니면 꿩이라는 식의 신학 없는 신앙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가끔 멈출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아니, 멈춰 서야 합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잘 걷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사순절은 멈추어 뒤를 돌아보는 절기입니다. 우리 세인교회가 에발산이 되기를 바라며, 우리 교회 강단이 세겜 골짜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눌러도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주께서 밝히신 작은 촛불이 어둠을 헤치고 타오르네 그 빛에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온 누리에 비추게 하소서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이 고요함이 깊이 번져갈 때 저 가슴 벅찬 노래 들리네 다시 하나가 되게 이끄소서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 밤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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