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당신은 싸우고 있습니까?2024-03-07 14:00
작성자 Level 10

2021년 2월 1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마흔 번째 강해)

 

제목당신은 싸우고 있습니까?

본문고린도후서 11:1-6

 

서론)

 

지난 주일절친으로 지내는 친구 목사의 설교가 담겨 있는 유트브 방송에 접속해서 은혜로운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설교를 시작한 친구는 서두를 이렇게 열었습니다.

그 유명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4월 7일 부활절 아침에 미지의 땅인 조선의 땅을 밟음으로서 이 땅에 복음의 꽃을 피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소개하였습니다.

이윽고 이 언더우드 선교사의 일화를 소재 삼아 설교하던 친구 목사는 그 날 아침에 집에서 딸과 나누었던 대화를 소개했습니다.

딸아너보다 2살이나 어렸던 언더우드는 자기의 삶을 이방의 땅인 조선에 바칠 정도로 위대한 삶을 살았는데너는 28년 동안 무엇을 남겼니?”

그러자 이 질문을 받은 친구 딸이 곧바로 되받아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28세에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아빠는 환갑이 되는 동안에 무엇을 남겼어요?”

듣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고 말하며 친구는 의문의 1:0 패배를 당했다고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

친구 딸은 아빠의 공격에 가장 강력한 방어의 수단으로 적극적인 공격을 택함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역전의 한판승까지 거두게 된 것입니다.

비유가 조금 과했나요?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경우불리한 전세를 역전시키려면 아주 소극적으로 수비 자세만 취하면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럴 때는 도리어 최선을 다해 공격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그것이 방어의 내용이 되어 불리했던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공식은 단순히 스포츠 게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여정 중에도 이런 공식은 맥을 같이 하는 때가 있습니다.

매번 이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경우에 따라서 때로는 신앙의 영역에서도 강력한 공격적 자세를 취함으로 열세를 역전하는 경우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이 바로 이런 상황을 제시합니다.

 

본론)

 

에스라성경대학교대학원의 조석민 교수는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1:1절을 시작으로 12:13절까지의 텍스트를 소위 말하는 바보 연설’(Fool's speech) 라고 정의하기까지 합니다.

이유는 아마도 1절의 내용 때문일 것입니다.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어리석다고 자기를 표현한 바울의 표현은 한편으로 보면 적대자들에 대한 강력한 공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0장에서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의 외모언변실력영적인 태도 등등을 싸잡아 폄훼하며 그를 어리석은 자로 매도한 것에 대한 바울의 역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말한 그대로 자신을 어리석은 자라고 지칭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적대자들에게 이어지는 발언에서 뭐라고 역설하고 있습니까?

고전 영어성경의 대표라고 하는 RSV에서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I wish you would bear with me in a little foolishness. Do bear with me."

편안하게 의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여보게들조금 어수룩하게 나를 대해 주면 안 될까나를 받아주게.”

제가 RSV의 1절을 이렇게 의역한 것은 바울의 공격적인 방어 논리가 담겨 있음을 교우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는 자네들이 말한 대로 어리석다면 할 수 없이 어리석은 사람이지그렇지만 나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네.”

점잖은 것 같지만 대단히 강력한 공격적 방어 논리가 담겨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어지는 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고린도교회의 전체 형제들에게 보편적으로 전한 메시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주석을 필요로 하는 텍스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형제들 전체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입니다.

나는 고린도교회에 있는 자네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역했다네어느 정도로 열심을 냈는가 하면 하나님이 힘주시는 열심을 갖고 형제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네그런 면에서 나는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그리스도 예수님과 영적인 혼인의 관계로 엮어주기 위해 중매한 중매쟁이라네그런데 문제는 일부 적대자들이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한 것처럼 자네들을 유혹시켜 그리스도를 떠나 타락하도록 부화뇌동하고 있다네해서 나는 자네들이 유혹에 넘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떨어져 나갈까 심히 염려하고 있다네.”

이렇게 염려를 말한 바울은 4절에서는 공격적인 방어의 논리를 조금 더 강화하여 역설합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아마도 이 구절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이미 당했던 바울의 경험에 의거한 발언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바울이 경험했던 거짓 복음이 무엇이었습니까?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쳤던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거짓 복음이었습니다.

본문인 고린도후서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이 교회를 유린했던 방법은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선지자들이 행했던 상황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도리어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깊숙이 숨어 있었던 바울의 적대자들이 여론몰이 했던 것은 바울에 대한 인격적 모독사도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그리고 인신공격 등등의 비인간적인 행태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바울을 공격한 일체의 내용들은 바울의 영적 리더십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함으로 고린도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와해시킨 범죄 행위였습니다.

이 저의가 악한 행위는 결국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이 바울이 전한 강력했던 복음의 능력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물론 정상적인 복음에서 떠나게 한 일임을 궁극적으로 바울은 강하게 성토한 것입니다.

이렇게 일침을 가한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마지막 텍스트인 5-6절에서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보 연설을 이어갑니다.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바울이 무엇이라고 선포하였습니까?

① 나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다.

② 말은 조금 어눌한 것이 사실이지만지식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이 구절만 떨어뜨려 놓고 보면 교만해 보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스스로 높이 자평하는 것이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구절이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구절이 아님을 앞에서 살폈습니다.

5-6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바울의 비장함의 발로입니다.

고린도교회 공동체라는 주님이 핏 값을 주고 산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방어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절체절명의 마음으로 최선의 공격적 방어를 택한 것입니다.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임을 알고 바울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할 말은 하겠다는 비장함이 11장에서 엿볼 수 있는 바울의 태도임을 알려 줍니다.

여기까지가 본문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이해를 우리 세인지체들이 마음에 새겨야 하는 레마는 무엇이겠습니까?

 

※ 주존심을 무너뜨리는 일체의 것들과는 싸워야 합니다.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신 군부가 서울의 봄을 무력으로 짓밟고 다시 군사 독재라는 동토의 시절로 막 돌렸을 때였습니다.

당시선배들이 스크럼을 짜고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며 불렀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 460장입니다.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 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선지동산에서 목회자 후보생들이 이 찬송을 부르면서 신군부독재에 항거할 때최류탄이 신학교 터지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신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보았던 암울했던 시대를 경험했습니다.

이 당시는 민주화라는 거대한 담론이 밀물처럼 밀려오던 시대였기에 이렇게 정치적인 이슈로 싸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2021년의 싸움은 무엇입니까?

독재와의 싸움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2021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치열하게 저항해야 하는 싸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主尊心을 무너뜨리는 일체의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들에게는 영적인 집중력을 발휘하며 저항해야 합니다.

펜데믹 이후이 땅에 존재하는 공동체 중에 가장 많이 약화되고세간에게서 가장 강력한 비난의 화살을 맞고 있는 곳이 있다면 말할 것도 없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지난 설 명절 당일에제천에서는 이제 잠잠해 질 것 같았던 코로나 19 확진자가 또 두 명 발생했다는 재난 문자가 도착해서 확인했더니대전에서 대규모 발생의 원인을 제공했던 IM 관련 확진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로 사는 저도 이럴 때 너무 실망스러운 데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야 재론의 여지가 없지 않겠습니까?

해서 교회는 어디에서든지 발붙일 곳이 없어 보일 정도로 신뢰도 바닥의 정점을 찍고 있습니다.

펜데믹 상황을 겪으면서 그 동안 교회 공동체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를 뼈저리게 성찰하는 것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적인 단계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지극히 교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지인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름 음지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적은 그룹의 목회자와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주류 개신교회는 자정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집단이라고 평가받는 수모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그에게 항변하고 싶었지만 딱히 항거할 만한 것이 없어 서글펐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토록 무기력하고 비참하게 교회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것을 운명적으로 수용해야 한단 말인가에 지금 저는 절규하고 있습니다.

열이 40도까지 올라가는 것과 같은 영적인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저 역시교회 공동체의 운명이 나하나 어떻게 해서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더 솔직한 심정으로 제 스스로 이미 기울어진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앞서 나갈 수도 없습니다.

다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큼은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 소박한 제 신앙고백입니다.

무엇일까?

교회가 어디까지 추락하고또 일어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다만 주존심을 무너뜨리는 것과는 치열하게 싸우자고 마음을 추스르곤 합니다.

철학자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호모-데우스의 시대라고 정의했습니다.

즉 하나님인 인간 혹은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도발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셈입니다.

해서 그는 21세기의 트렌드를 이렇게 도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21세기 인류 기획은 신성을 달성하는 것(attaining divinity)이다.”(박일준, “인공지능시대인간을 묻다”, 동연, 129)

이 정도면 신-바벨탑의 절정시기라고 보아도 전혀 무색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시대의 영적 기상도는 사무엘 시대와 너무 흡사합니다.

사무엘상 8:7-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이 무시무시한 시대의 복판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생각으로라도 하나님을 제거하면 모든 것이 해체된다.”

저는 이 기가 막힌 문장에서 무시무시한 시대를 살기는 하지만 짜릿한 주존심의 보루적 기상을 보았습니다.

1,000% 동의하며 지지합니다.

이 생각을 지켜가는 것이 외롭지만 저와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내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그릇된 교회들은 무너져도 그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의 마음이 무너져서야 되겠습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일체의 무리들을 향하여 적극적인 자기변호와 주 안에서의 자랑을 시도함으로 물러서지 않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싸움의 열정이 있습니까?

 

결론)

 

이제 저는 글 하나를 소개하며 설교를 맺겠습니다.

저명한 유대 학자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에밀 맥컨하임은 독일 부모님의 자택에 걸려 있는 그림에 대해 설명해 준다수염을 기른 늙은 유대인들이 대학살을 피해 도망가는 내용의 그림으로 그들은 아주 소중한 것을 손에 움켜쥐고 있다유대인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황금이 든 주머니를 움켜쥐고 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하지만 사실 이들은 각기 토라 두루마리를 옮기고 있었다.”(오스 기니스, “저항”, 토기장이, 279)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무엇이 유대인을 유대인 되게 하였을까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천문학적인 물질이 유대인을 유대인스럽게 했을까요?

그럴 리가요.

그들이 손에 쥔 것은 황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정신인 토라 즉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정신이었습니다.

주존심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주님 되심입니다.

주님만이 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정신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라는 절대적인 확신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무너져도 교회의 주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주님 되심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과 분연히 싸우십시다.

지금 여러분은 이 정신을 사수하기 위해 싸우고 계십니까?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문들아 머리 들어라

들릴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영광의 왕 들어가시도록

영광의 왕 들어가신다

영광의 왕 뉘시뇨 강하고 능하신 주로다

전쟁에 능하신 주시라 다 찬양 위대하신 왕

왕께 만세 왕께 만세

당신은 영광의 왕이라 다 찬양 위대하신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