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주님이 당신을 자랑하고 있습니까?2024-03-07 14:00
작성자 Level 10

2021년 2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서른아홉 번 째 강해)

 

제목주님이 당신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본문고린도후서 10:12-18

 

서론)

 

세계적인 기독교 변증학자인 오스 기니스가 2011년 하나님의 품에 안긴 존 스토트 목사가 임종하기 3주 전에 병상에 누워 있는 그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를 소개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존 스토트와 한 시간이 넘게 지난 추억을 나누며 대화를 하다가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떤 기도를 해 주기를 원하느냐 물었을 때누운 채로 기력이 딸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존 스토트 목사가 오스 기니스 박사에게 이렇게 속삭이듯 말했답니다.

마지막 숨이 떨어질 때까지 주님께 신실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게.” (오스 기니스, “저항”, 토기장이, p,37.)

오스 기니스 박사는 이 유언과도 같은 존 스토트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소회를 이어 밝힙니다.

그는 끝까지 기도의 열정에 불타오른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오스 기니스는 얼마나 존 스토트를 자랑하고 싶었을까?

충분히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이 글을 읽다가 생뚱맞은 생각이 하나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자랑스러워하실까?

오늘 본문이 설교의 텍스트라는 것을 알기에 한 주간 내내 이 생각에 골몰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황금률 못지않은 절대 명제와도 같은 금언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0:32-33절을 소개합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이 말을 곱씹어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자랑하시는 전제가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너도 나를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약속하십니다.

나도 너를 그날에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너를 자랑할 것이라고.

문제는 오늘을 사는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원하심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살아내고 있는 바울의 자랑거리와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유대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고린도에 방문한 그 어떤 자들이 자랑하는 것과의 분명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집중적으로 찾아내려고 하는 대상자들은 후자입니다.

혹시나 바울의 적대자일 가능성이 농후한 이들이 자랑했던 일들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에 나와 있는 문구들만 다루면서 추적해 보겠습니다.

 

1) 자기 스스로를 칭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12, 18)

 

먼저 12절을 읽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또 한 구절 18절을 봅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이런 자들을 향하여 바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추적해 보십시다.

12절 전반절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무슨 말입니까?

그들과 비교되는 것조차가 불쾌하다는 것입니다.

반응할 가치가 없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후반절입니다.

오직 주께서 칭찬하는 자니라

더 이상무슨 반론을 할 수 있겠습니까?

 

2) 남의 수고를 탈취하여 자기의 수고인양 자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15)

 

본문 15절을 봅니다.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침투했던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의 수고를 탈취한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눈물과 땀과 피를 흘려 세운 고린도교회에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고 깃발을 꽂으려고 했습니다.

바울의 수고를 강탈한 것입니다.

바울의 수고를 자기들의 것으로 탈취한 것입니다.

한 예로 바울의 적대자들은 이미 살핀 대로 자기들은 명실상부 유력한 유대 율법을 지지하는 상부 그 어떤 기관에서 (혹여 산헤드린 공회일 수도 있음발행한 공적인 추천서를 갖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이에 반하여 바울은 공적 기관(유대적인 율법을 지키는 기관)에서 고린도교회를 위한 사역자로 파송한 그 어떤 추천서나 서류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유대 율법과는 결별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바울은 말 그대로 그는 고린도에 가서 직접 동역자들과 함께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교회를 개척했던 야전 사령관이었습니다.

그는 고린도교회를 세운 개척자였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적대자들은 이런 간증의 현장인 고린도교회를 넘보았습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고린도교회를 유대적인 율법이 기초가 된 변질된 교회로 둔갑시키려는 저의가 악한 일을 도모했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한 바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5절 후반절입니다.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정말로 아끼고 위한다면 페어플레이를 함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적대자들을 타이릅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적시했습니까?

바울이 스스로 그렇게 페어플레이를 했기 때문입니다.

13-14절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이 구절을 읽겠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해 주신 한계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그 한계가 여러분에게까지 미쳐여러분도 그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영역에 침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이미 여러분과 함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터무니없는 적대자들의 공격과 유언비어 살포에 대하여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지는 본문 16절에서 본인이 감당해 왔던 방식에 대하여 저들에게 알려줍니다.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바울의 이런 목회 신학적인 올바른 생각은 단순히 고린도교회에만 국한하여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 유명한 로마서 15: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정말로 너무 철저한 실천신학자 바울의 신학이자 사역관입니다.

지금이야 이렇게 하는 목회자가 없고또 그렇게 무모한 일을 하려는 목회자도 없기에 편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 깃발만 세우면 교회가 되던 시절한 복합 건물에 교단이 다른 교회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던 때가 있습니다.

해서 세상 사람들이 비아냥거리며 교회를 비난하던 일들을 기억합니다.

위치가 좋은 장소에가성비가 괜찮은 차원에서 교회를 개척하면 된다는 극히 세속적이고상업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그곳이 이미 들어선 교회가 있든지 말든지 전혀 상관없이 교회론의 자로 모르는 비신학적인 일들을 자행한 결과오늘 이런 아픔을 교회가 당하게 된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마치 본문의 고린도교회에 깃발 꽂은 바울의 적대자들처럼 말입니다.

우리 교회 예배 실황이 유트브 방송으로 중계되고 녹화되어 방송됩니다.

주일 예배 실황은 홈페이지 설교 영상 콘텐츠 유지를 위해 녹화를 했다가 설교 부분만 편집하여 홈페이지에 업-로딩을 합니다.

외에 수요 예배는 제가 아직 편집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를 못해서 전 예배 실황이 그대로 업 로딩 됩니다.

다만 새벽예배 영상은 일주일간격으로 삭제를 합니다.

영상부장의 전언에 의하면 주일 예배 시간에 부르는 복음성가와 자동반주기로 녹화되는 찬양의 내용들이 저작권법을 어겼다는 것을 기록이 남기 때문에 우리 교회 유트브 방송이 상업적인 방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담이 되어 삭제를 한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정말로 무서운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동반주기가 연주하는 곡을 유트브에 실어도 저작권법을 위반했다고 경고를 때리는 무서운 시대인데 누군가가 피와 땀을 흘려 수고한 설교논문글 자료 등등을 저자의 허락도 없이 그대로 베끼는 표절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심지어는 무슨 강심장인지 그렇게 도용한 것을 자기 것으로 둔갑시켜 책까지 출판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본문 15절 후반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죄의식이 없이 고린도교회를 유린하고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의 행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처하며 반응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는데 기형적으로 자라지 말고규범(캐논)대로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페어플레이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란다고 바울은 직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강한 어조로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타이름으로 적대자들에게 반응한 바울은 오늘 본문 텍스트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본문 17-18절에서 선포하며 10장을 마감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정답입니다.

이 구절을 읽다가 오늘 설교 제목을 정했습니다.

내가 나를 자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도대체 그것이 본인은 물론 이외 그 누구에게 유익이 되겠습니까?

아무런 유익이없는 것은 물론도리어 해가 됩니다.

해서 바울은 이렇게 역설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을 만들라고 말입니다.

옳은 것은 주님이 칭찬하는 칭찬이 옳은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한줌의 재도 안 되는 세상과 세간의 칭찬에 휘둘리지 말라는 바울의 강력한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분명한 은혜 안에 살았던 바울은 주 안에서 유언과도 같은 자랑을 남기고 순교합니다.

디모데후서 4:7-8절을 읽겠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렇습니다.

이 자랑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자랑입니다.

이것 외의 어떤 자랑도 남기지 마십시다.

자랑은 주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진짜 자랑이며하나님이 인정하는 자랑이 유일하게 남는 진짜 자랑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겠습니다.

설교의 서두에 소개한 오스 기니스 박사의 글을 읽다가 심비에 새겼습니다.

그는 랍비 조나단 삭스의 말을 인용합니다.

유대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을 때사람들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고수했다하지만 유대인으로 사는 것이 쉬워지자 사람들은 유대인이기를 포기했다전 지구적으로 유대인의 중대한 문제기 바로 이것이다.” (오스 기니스, “저항”, 토기장이,p,25.)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어려웠던 이 땅의 선교 초창기 수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되었을 때어떤 의미로 보면 가장 순결한 신앙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왔습니다.

허나 교회가 부흥되고교회가 부유해지면서 그 안에 있는 신자들은 이상한 변종 그리스도인들로 변질되어 가장 형편없는 종교적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했습니다.

허나 코로나 19가 덮친 작년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존폐라는 단어가 사용됨에 있어서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최악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묘한 감정에 빠지곤 합니다.

그래서 지금이 바로 진성 크리스천을 고르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칼 소회 말입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내가 나를 자랑하는 엽기적인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나를 자랑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인가를 평가받는 시대 말임을 민감하게 절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자랑하시는 진성 크리스천입니까?

당신은 하나님이 자랑할 것을 지금 갖고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