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당신에게는 붙들 본질이 있습니까?2024-03-07 14:00
작성자 Level 10

2021년 1월 3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서른여덟 번 째 강해)

 

제목당신에게는 붙들 본질이 있습니까?

본문고린도후서 10:7-11

 

서론)

 

바울은 이번 장(10)부터 적대자들을 향하여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에는 사도로서 고린도교회를 아끼고 보호하기 위해 할 말도 참고인내했지만 10:5절을 통해 그 동안 묵과해 왔던 것을 이제는 방관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항할 것이라고 천명했음을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살폈습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① 복음의 옷으로 위장했으나 전혀 복음의 능력을 부인하는 척하고 있는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종교인들과 맞서겠다고 천명했습니다.

②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영적 님비주의자들에 대하여 이제는 침묵하지 않고 싸우겠다고 역설했음도 나누었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격노했을까요?

여럿차례 강조했지만 사도권에 대한 도전과 시비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사악한 일이었고복음의 능력도 부인하는 사단의 권세에 붙들린 질 나쁜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적대자들이 어느 정도로 바울을 헐뜯고 폄훼했는지를 자세히 고발하는 장면이 들어 있습니다.

 

본론)

 

오늘 우리는 주일 설교를 통해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을 괴롭혔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외모에 대한 폄훼였습니다.

 

7절 본문입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이렇게 바울의 외모를 가지고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했습니다.

연관되어 있는 10절 후반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정경은 바울의 외모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보고하는 구절이 없습니다.

하지만 2세기 문서로 추정되는 바울과 데클라 행전에는 조금은 바울의 외모를 추측할만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키가 너무 작았다고 증언합니다.

코는 매부리 형이었고거기에다 다리가 구부러진 O자형 다리를 가졌기에 사람들이 보기에는 꼽추처럼 보였다고 증언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다 아시는 것처럼 그는 기저질환의 소유자였습니다.

눈을 매번 찌푸렸던 이유는 그가 시력이 좋지 않은데다가 안질까지 앓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논증하는 학자들로 있습니다.

혹여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삼층천(三層天체험을 간질환의 결과물이라고 해석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종합해보면 바울은 일종의 질병 종합 세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약한 육체를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말까지 어눌했음이 분명합니다.

말도 시원하지 않았다는 구절이 이를 대변합니다.

아마도 모세와 같지 않았나 싶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난 육체의 핸디캡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갖고 있었던 핸디캡 중에 하나가 치아였습니다.

저는 가족력 자체가 치아에 있어서는 아주 안 좋은 외가의 DNA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치열이 고르지도 않았을 뿐더러어려서 부모님들이 치아 관리를 잘 해주지 않아 많이 망가져 치아 때문에 적지 않은 고통을 당했던 성장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목회 현장에 나와 대인들과 접촉하는 직업을 갖고 평생을 살아야 했기에 대대적인 수리를 했습니다.

그렇게 치아 교정을 했지만 선천적으로 별로 안 좋은 잇몸 구조까지 갖고 있기에 지금도 웃거나 하면 안면이 한쪽으로 약간 기우는 기형적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해서 어려서부터 누군가 건강한 치열을 갖고 있거나 하면 그가 참 부러웠던 기억이 생생하고혹여나 치아에 대하여 폄훼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젊어서는 많이 다투었던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선천적으로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난 약점을 빌미 삼아 공격하는 자는 비인격적인 자입니다.

너무 치사한 인간들이고저의가 나쁜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아류의 비인격적인 자들이 바로 바울의 적대자들이었습니다.

적대자들은 바울도 어쩔 수 없었던 바로 이 약점을 물고 늘어진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공격에 대하여 본문에서 수동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이제는 강력하게 방어하며공격적으로 대처할 것을 시사한 점이 본문의 특징입니다.

 

2) 진정성에 대한 왜곡입니다.

 

본문 9-10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편지로 여러분을 위협한다는 이 소문은 어찌된 것입니까그의 편지는 강하고 설득력이 있지만그 사람 자신은 나약하고 말도 잘 못한다그러한 소문은 면밀히 조사해 보면전혀 근거 없다는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37번에 걸친 강해로 바울이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어떤 마음을 갖고 편지를 썼는지 주의 깊게 살폈습니다.

어떤 때는 다칠까봐 돌다리를 건너는 심정으로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달랬고또 어떤 경우에는 너무 약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강하게 다그친 대목도 있음을 살폈습니다.

하지만 전자든후자든 바울이 행한 일체의 서신 사역 안에 들어 있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진정성이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적대자들에 대한 감정적인 표출을 자제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악한 자들은 그것 자체를 또 악용합니다.

적대자들은 이렇게 묘사합니다.그가 쓴 편지가 어떻게 보면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바울 스스로는 나약하기 끝이 없는 겁쟁이라는 왜곡으로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이 왜곡은 바울의 신체에 대한 왜곡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어디 까지 파급됩니까?

이렇게 나약한 자가 어떻게 사도일 수 있겠느냐는 왜곡입니다.

대적자들이 왜 바울을 이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까지 바울의 사도에 대한 권위를 왜곡했습니까?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기득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본인들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세속적 권력의 탐욕을 맛본 그 기득 권력을 놓치지 않겠다는 그 알량한 생각이 바울을 공격한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촌철살인 중에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무릇 삶이 있는 곳이라면 거기에 의지도 있다그러나 그것은 삶의 대한 의지가 아니라나는 그대들에게 가르치노니권력에 대한 의지인 것이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홍신문화사, P,154.)

그것이 교회든사회든 인간이 거하는 일체의 영역에 인간을 가장 비인간적인 존재로 만드는 코브라의 치명적인 독과 같은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권력을 쟁취하려는 의지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적대자들이 이것을 포기할 리 없습니다.

이것을 사수하기 위해 바울의 약점을 갖고 공격한 것입니다.

아주 저급하고 질 나쁜 모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공격에 대하여 바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주일에 받을 은혜요 도전입니다.

 

※ 본질을 끝까지 붙는 것이었습니다.

 

7절을 다시 읽습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바울이 반응한 이 토로를 보면서 참 가슴 뜨거워지는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고린도교회 적대자들은 바울의 외모를 공격했습니다.

바울이 갖고 있는 외형이 먹잇감이었습니다.

반면바울의 핵심적 가치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이 메시지에서 기막힌 글로 묘사했습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그러니 나를 믿어주십시오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권위를 내가 과장해서 말한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나는 내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바울이 붙들었던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기독론적인 본질이었습니다.

교회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를 묻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진단하면 돌이켜 그리스도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몸부림치며영적으로 분투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내가 예수 외의 다른 것을 붙들고 있으면 그것을 떨쳐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사역에 최선을 다하는 것 공동체입니다.

해서 공관복음서에 공히 기록된 변화산상 메시지의 엔딩 멘트는 대단히 의미가 있고 감동적인 교훈을 줍니다.

마가복음 9:7-8절입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나성으로 전입하기에 앞서 웨슬리 신학 전통에 서 있는 또 다른 교단에 노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진행하던 과정을 멈추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교단 소속의 조건으로 우리 교회에게 상응하는 물질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 물질은 편입하려는 교단에서 저와 우리 교회를 그만한 위치에 있게 해주겠다는 미끼였습니다.

해서 그 교단 가입을 중단했습니다.

지난 일이지만그들은 번지수 잘못 짚은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의 대다수가 알고 있지만저는 교회 정치권력에 대하여 대단히 비판적인 사람입니다.

하물며 그 기득권적인 정치권력을 상응하는 물질을 도구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상식은 고사하고 비상식의 차원에서도 한참을 빗나간 처사인데 제게 그것을 요구한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 참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이렇게 이런 자본주의적인 공식으로 교회 내의 권력을 목적으로 삼는 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수 행하셨던 섬김의 사역과는 담쌓고도리어 교회에서마저도 기득권 세력이 되려는 자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마치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바울의 적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한국교회 안에도 부지기수입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신앙적 본질이어야 합니다.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이 이런 내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라고 선포한 메시지가 그래서 오늘 목사로 살아가는 제게는 더 목이 메게 다가옵니다.

수없이 말하지만 껍데기같은 비 본질을 추구하는 교회는 남은 자 교회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작년에 감동 깊게 읽었던 김기석 목사의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김 목사는 마가복음 10:42-44절을 먼저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구절을 소개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일갈합니다.

이 구절은 가치관의 전복이다힘은 지배의 수단이 아니라 섬김의 도구일 뿐이다지배하는 주체의 전복만으로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힘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 (중략교회가 강자들의 호의에 의지하려 할 때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동원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이 많아질 때 그 전략은 가속화된다.”(김기석, “욕망의 페르소나”,예책, pp,169-170.

그런데 저는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런 망가진 교회를 만드는 것은 목사 한 사람만이 아니라 권력욕에 불타는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들에 의해 가일층 강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몇 주 전에 친구와 SNS에 함께 나눈 글을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신학교 동기 중에 목사직을 스스로 반납하고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친구가 있다나하고는 읽은 책들을 함께 나누고 삶을 성찰하는 삶으로 사제의 길을 가는 친구다 목사직을 그가 내 놓았을 때 아팠다말리고 싶었지만 그의 삶이니까 난 친구를 존중한다어제 친구가 올린 페북 글이 이렇다.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고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허버트 스펜서)

친구가 짧은 단상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세상살이가 그러하다.”

글을 읽다가 허버트 스펜서의 글의 한 부분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나의 생각의 단편 조각을 친구에게 이렇게 남겼다.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지론에 대해 부분 인정한다그런데 도그마의 해석이 아닌 '지금 여기서'라는 존재성에 대한 확인이 주군을 볼 때 전율로 연결되기 때문에 기독교가 아닌 주 예수께 함몰되어 있다난 아직도 이 부분에 있어서 여전히 배고프다친구야.”

친구는 동의했는데 내가 단 글에 기분이 나빴는지그의 페친 몇 몇이 불편한 감정을 또 다른 댓글에서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그 댓글들은 이제 기독교에 대한 예의는 고사하고 막말로 도배하는 글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댓글들을 보다가 엔딩 글을 하나 썼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다만 비정상적인 구도로 기독교를 먹칠하는 일련의 일들을 놓고 싸잡아 매도하는 일련의 글들을 보다가 참담했고또 한편으로는 분노스러웠다작년에 읽었던 월터 브루그만 책에서 다음 글을 만났다. ‘복음주의적이라는 기치 아래 모이는 보수주의적인 학문의 신들을 추구하는 자들은 확신할 수 있는 공식명제그리고 논리로 무장하고 있지만스스로 어떤 구원도 이루어낼 수 없다반면 이성 중심주의의 계몽주의에 순응하면서 그 누구와도 불편하게 지내기를 기피하는 진보주의적인 자들도 자신들의 아집에 특화되어 있다()무신론자들학문적 환원주의자들그리고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다그들은 우리와 관계하지 않거나또는 우리와 근거리에서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우상들을 지니고 있다.” (월터 브루그만, “시편적 인간”, 한국장로교출판사,pp,68-69.)

진보주의적인 구약학자가 갈파한 이 글을 읽다가 메모했다이유는 편 가르지 않음의 지성적 예의를 갖추고 있는 그의 글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라고 할까 그렇다나는 친구를 잘 알기에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달린 댓글들을 보니까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다너도 알겠지만 목사로서 살아오면서 적어도 나는 물론다른 사람에게 쪽팔리는(?) 인생을 살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하지만 이제는 그 어떤 진정성이 있는 말을 해도 목사가 하는 말은 듣지 않으려는 세태이다 보니 참담하기 그지없다하지만 적어도 주군에 대한 올바른 믿음으로 달려가는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를 종교 삼아 부를 축적하는 쪽팔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나는 플레즈 파스칼의 말대로 하나님의 살아계심 쪽에 내 삶을 걸었다만에 하나 극단적인 무신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선택한 삶이 쓸데없는 짓이고헛짓이었다고 판명난다 하더라도 내 삶의 현장 안에서 분명한 신앙적 목표를 갖고 달려간 족적은 자랑스럽지 쓸쓸하지 않을 것 같다물론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존재하심과 나와의 전인격적인 관계 맺고 계심을 한 올의 여지없이 동의하는 목사다친구의 글에 댓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무신론자들이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무례함은 최고의 교만이지 않겠나 싶다일상의 현장에서 삶의 사제로 살아가는 친구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내일부터 특새를 진행합니다.

왁자지껄한 특새로 몰고 가지 않을 것입니다.

단 6번의 말씀을 통해 다시 기본(본질)을 다시 새기는 특새로 만들어보려 합니다.

지금 우리 세인교회는 물론내 사랑하는 한국교회에 절실한 것은 프로그램프로젝트가 아니라 본문에서 바울이 행했던 본질을 다시 붙드는 사역입니다.

지금은 엎드려 복음의 본질을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당신과 나도 삽니다.

2021년 첫 특새의 주제는 다시 기본으로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