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화요일 성서일과 묵상 야만적인 전쟁을 멈춰라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44편, 이사야 27:1-6, 고린도후서 5:17-21, 시편 119:49-56, 신명기 5:22-6:3 꽃물 (말씀 새기기) 신명기 6:1-3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마중물 (말씀 묵상) 전 지구적으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첨예한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중동이다. 아슬아슬했는데 드디어 그 화약고가 터졌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에 대해 논하고자 할 때마다 목사로 살고 있는 나는 곤혹스럽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했던 땅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결과론적으로 훑어보면 이스라엘은 이미 타인이 살고 있는 땅을 빼앗아버린 형국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창세기를 연구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승자독식구조로 역사를 해석하는 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공부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실례를 하나 든다면 창세기 9:24-27절 같은 경우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전통적으로 이 구절은 대단히 위험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온 게 사실이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지 않았던 가나안(함)이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었던 그의 형제(셈과 야벳)들의 지배를 받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문자적 해석 말이다. 정말로 그런가? 창세기 10:6-20절을 읽다보면 함의 톨레도트를 만나게 된다. 이 톨레도트를 훑어보면 함이 저주를 받아 가나안에 살게 되었다는 그 어떤 보고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함의 톨레도트 안에 들어가 있는 후손 중에는 니므롯 같은 걸출한 용사가 있어 영토를 확장하는데 일익을 감당했고, 함의 후손들은 탁월한 정치력과 결속력을 통해 본인들이 살고 있었던 가나안 지역을 견고하게 했음을 보고한다. 그 어느 곳에서 함의 자손들이 저주를 받은 민족으로 묘사된 곳은 없다. 그렇다면 왜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라고 창세기 기자는 묘사했을까? 연구하다가 필이 꽂힌 주석을 하나에 멈춰 섰다. “창세기 기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의 조상이 이미 오래 전에 저주를 받았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가나안 정복에 나서는 이스라엘 군대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함인 듯하다.” (송병현, “엑스포지맨터리 주석-창세기, 국제제자훈련원,p,203.) 송 교수의 해제에 동의하기로 했다. 창세기 기자가 의도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하심을 강조하기 위한 포석으로. 언젠가 이스라엘이 진행한 가나안 점령에 대한 구약신학적인 설명을 듣고 싶어 친구 차준희 교수와 통화를 통해 신학자의 답변을 들어보았다. 친구는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가나안이라는 하나님의 주신 땅에서 살던 백성들 그러니까 창세기 10장의 내용으로 접근할 때 함의 후손들일 거다. 이 땅에 살던 백성들이 부르던 신의 이름은 ‘엘’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엘’은 고대근동의 일체의 종교들에서 흔히 호칭되던 일반적 신의 명칭이었는데 하나님의 명령대로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르던 가나안을 정복하여 정착하게 된 이스라엘에게서부터 비로소 성경이 말하는 야웨의 이름을 불렀다. 결국 야웨 신앙의 시작은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야웨 하나님의 신앙을 계승하는 기독교 신앙인의 자세는 가나안은 하나님이 미리 약속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신앙적 태도라고 친구는 충고해 주었다.” 신학자의 변으로 이해는 되었지만, 너무 안전한 해석은 아닐까 싶어 동의에 주저했던 적이 있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목사다. 그러기에 가나안이라는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조금은 불편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수용하며 공감하는 목사다. 하지만 끝까지 고민해야 하는 부분은 팔레스타인(함의 후손에 대한 해석)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해석이다. 성경은 말한다. 땅의 주인은 야웨 하나님이심을. 레위기 25:23절을 이렇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가나안이라는 땅의 주인은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도 아니다. 잠시 머무는 것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가자 지구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어 봉쇄함으로써 빌미를 제공한 이스라엘의 분노는 정당화 될 수 없다. 반면 그렇다고 로켓 2000발을 이스라엘의 민간인들이 있는 곳으로 쏴 댄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 벌이고 있는 폭력도 비난받아야 마땅한 폭력이다. 둘 다 어느 것도 지지받을 수 있는 정당성이 없는 일이다. 이로 인해 민간인들과 여성과 어린아이들이 죽어나가도록 만든 일체의 전쟁은 모두가 범죄다. 둘 다 야만적인 전쟁을 멈춰라. 더 더군다나 자기들이 믿는 신의 이름(도진개진)을 운운하며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천하가 공로할 만행들은 즉각 멈춰져야 한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무조건적으로 이스라엘을 편드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라고 명명된 이스라엘에 지금 필요한 것은 상생이요, 공존이며, 평화라는 길 자체다. 오늘 성서일과로 본 쉐마를 선포하기 전의 하나님의 신탁의 내용을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걸까? 키리에 엘레이손! 두레박 (질문) 나는 말도 안 되는 편협함 속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평화로 가는 길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평화가 곧 길인 것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이 땅이 되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두 나라의 만행이 중단되도록 기도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사랑의 하나님, 같이 살아갈 힘을 주십시오.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상생할 수 있는 영적 생기들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