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4일 목요일 성서일과 묵상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왜 이게 눈물 나게 하지?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03:8-13, 창세기 37:12-36, 요한일서 3:11-16, 시편 114편, 출애굽기 13:17-22 꽃물 (말씀 새기기) 창세기 37: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마중물 (말씀 묵상) 한희철 목사가 묵상한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를 읽다가 38:6-13 텍스트에 대한 해석에 필이 꽂혔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 한 목사는 이 구절에 대한 묵상 내용을 이렇게 적었다. “성경을 눈물로 읽을 때가 있다. 말씀을 읽다말고 나도 모르게 왈칵 뜨거운 눈물이 솟을 때가 있다. 말씀이 나를 만나는 순간이고, 내가 말씀을 만나는 순간일 것이다.”(위의 책, 268쪽) 그가 이렇게 서술한 이유는 예레미야 38:6절 때문이었음을 밝힌다. 예레미야의 정적들이 예레미야를 소위 지칭하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웅덩이에 던져버렸을 때, 갈수기를 막 지난 시기였음을 감안할 때 마땅히 웅덩이에는 물이 반쯤은 차 있어야 했는데 예언서의 보고에 의하면 ‘물이 없고 진창뿐이었다.’는 이 구절 때문에 한 목사는 울었다고 술회한다. 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진창은 예레미야를 받으신 하나님의 손이었다.”(같은 책, 270) 설교자는 해석자다. 그렇다고 해석자가 신학 없이 말씀을 해석한다면 그건 말씀이 아니라 지껄임이 된다. 나는 한 목사의 해석을 읽다가 박수를 보냈다. 그의 영성과 감성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오늘 성서일과로 돌아가 본다. 오늘의 일과를 묵상하다가 한 목사가 경험했던 그 울음을 나도 터뜨렸다. 이 단 한 구절 때문에.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요셉이 던져진 구덩이에 “물이 없었더라”라는 구절이 한 목사의 묵상을 떠오르게 했다. 나는 ‘하나님의 만지심’이라는 기독교적인 용어에 대해 민감한 편에 속한 목사다. 아주 오래 전에 『종교전쟁』을 읽었을 때, 대단히 시니컬한 무신론 과학자 장대익 교수가 글에서 이렇게 냉소했다. “종교는 말살해야 할 정신의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 (신재식, 김윤성, 장대익 공저, 『종교전쟁』, 사이언스북스, 141쪽) 유시민 작가와 김상욱 교수가 근래 뜨겁다. 그들이 쓴 『문과남자의 과학 공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의 돌풍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지금 읽고 있으니 할 말 없다. 며칠 전에 유 작가는 김 교수와 함께 한 북 토크에서 행한 說 중에 이렇게 갈파한 소리를 들었다. “신을 증명한 존재는 아무도, 누구도 없다, 누가뭐라 해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뭐, 그럴 수 있다. 또한 장 교수나, 유 작가가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며, 그래야 그들의 학문적인 과정 자체가 틀리지 않았고, 또 그래야 이 시대의 많은 지성들을 열광시킬 수 있기 방식이기 때문이니 가타부타 논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말이다. 다만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를 읽다가 왈칵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 체험적 팩트가 그들이 아닌, 내게 주어졌다는 것이 나에게는 감동의 클라이맥스다. 이 감동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난 그래서 앞에 언급한 자들과 결이 다른 삶을 살고 있음에 감사하다. 또 하나, 나는 하나님이 증명되는 순간, 신앙을 버릴 것 같다. 증명되지 않는 하나님이라 나에게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증명되는 신을 뭐 하러 믿나! 다시 재론하지만 증명할 수 없고, 증명되지 않는 존재이기에 나는 스스로 있는 그분을 나의 주군으로 믿는다. 동시에 증명되지 않는 그분이 ‘물이 없게 하심’의 주체이기에 눈물 충만(?)하게 그분을 사랑한다. 요셉에게 임했던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이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기에 나는 오늘도 천로역정의 길을 걷는다. 오래 전, 세계적인 인지 심리학자인 스티븐 핑거가 말한 이 갈파 때문에 나는 감사했다. “사회적 사실을 결정하는 주요 원인은 개인들의 의식상태가 아니라, 그에 앞선 사회적 사실들에서 찾아야 한다.” (스티븐 핑거, 『빈 서판, 2판』, 사이언스북스, 59쪽.) 학문이 갖고 있는 지식의 총량이 또 다른 우상임을 깨닫게 했기에 말이다. 이런 학문의 카테고리 안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만이 줄 수 있는 영적인 ‘누미노제’와 같은 감동이 임할 리 없다. 하루를 열면서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에 목이 메는 이 은혜 때문에 행복하다. 두레박 (질문) 나는 나를 위해 일하시는 ‘물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에 민감한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예레미야의 하나님, 그리고 오늘 나의 하나님, 주님께 더 민감한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하나님이 없다고 믿기에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확신하며 랜덤을 종용하는 이 시대,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감사하는 삶을 더 치열하게 살아내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모로코, 리비아에 임한 사태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있다면 이런 불공평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라고 공격과 시비의 표적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시대입니다. 반면, 이 비극의 단초는 인간이 자행한 랜덤의 결과라고는 1도 믿지 않는 패역함이 오늘입니다. 하나님, 시대의 악함이 극에 달한 오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픔을 당한 이들을 품어주옵소서. 하나님만이 위로의 해답이십니다. 주여, 저들을 긍휼이 여겨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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