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7일 목요일 성서일과 묵상 그러니까 엎드린다.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19:33-40, 에스겔 24:1-14, 고린도후서 12:11-21, 시편 149편, 출애굽기 9:1-7 꽃물 (말씀 새기기) 고린도후서 12:11-13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 마중물 (말씀 묵상) “내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나는 이와 같이 말하면서 완전히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탓만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나를 부추긴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리석은 말을 하도록 놔두기보다는 나를 지지하고 칭찬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내가 보잘 것이 없고 하찮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여러분을 매료시킨 저 대단한 ‘사도들’과 견주어 내가 그들만 못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도 직접 겪어 보아서 알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으면서 복된 시기와 힘겨운 시기를 보내는 동안, 참 사도를 구별하는 온갖 표적들, 곧 놀라운 일과 이적과 능력의 표적들이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여러분이 나나 하나님께로부터 다른 교회에 비해 덜 받은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덜 받은 것이 한 가지 있기는 합니다. 바로 내 생활비를 책임지지 않은 것 말입니다. 참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서 그 책임을 빼앗은 것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고린도후서 12:11-13절) 바울이 반어법적인 표현한 오늘 성서일과를 읽다보면 대단히 예의 있는 표현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도리어 바울의 선언은 마치 그 동안 참고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는 선전포고와 같은 선언문처럼 느껴지는 텍스트다.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헐뜯고 있었던 적대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부화뇌동에 속절없이 넘어가 바울의 등 뒤에 더 아픈 비수를 꽂은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을 향해 던진 선전포고가 오늘 성서일과다. 아주 가끔 후배들이나 젊은 목회자들, 그리고 심지어 목사 후보생들이 찾아와 내게 전하는 교회 갱신과 개혁에 대한 불타오르는 결기를 듣곤 한다. 그때마다 그들의 기를 꺾지 않기 위해 젊은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불온함에 대해 격려하는 차원으로 대화를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런 개혁적인 모드로 똘똘 뭉친 후배들에게 정말로 해주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마무리할 때가 대다수다. 왜냐하면 지금 이야기를 해도 저들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35년이라는 세월, 목회 현장에서 부대끼다보니 한 가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목회는 내가 무엇을 한다고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목회에 정답은 없다. 목회는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기에.” 이 교훈에서는 물러설 수 없을 것 같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있으면서 그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선전포고하며 자탄한 오늘 성서일과를 묵상하다가 내 생각은 더 강해졌다. 자비량으로 사역한 바울은 아무리 계산하지 않고 목회하며 헌신했고, 심장을 꺼내 보일 정도로 진정성이 있는 순결한 사역을 했어도 끝까지 비수를 꽂는 고린도교회의 종교인들을 향해 폭탄을 던진다. 하고 싶은 성토였다. “여러분이 나나 하나님께로부터 다른 교회에 비해 덜 받은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덜 받은 것이 한 가지 있기는 합니다. 바로 내 생활비를 책임지지 않은 것 말입니다. 참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서 그 책임을 빼앗은 것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엄청난 역설이다. 자비량으로 목회를 한 바울의 순수성을 트집 잡아 그러니까 자격이 없는 사도라고 매도한 자들을 향한 직격탄을 날린 셈이다. 내가 목회하며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는 정당한 사례를 받지 않은 것이었다고 토로한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렸을까를 체감했다. 교회 안에 참 나쁜 사람들이 많다. 합법적으로 포장한 나쁜 사람들이다. 목회자의 정직함을 부정직함으로 공격하는 나쁜 사람, 목회자의 순수함을 오염된 악함으로 매도하는 나쁜 사람, 목회자의 깨끗함을 더러움으로 역공격하는 나쁜 사람 등등 비일비재하다.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다시 다잡이 하는 것이 있다. 나름, 깨달은 공부는 이것이다. “그러니까 주군께 엎드린다.” 이런 정글에서 또 하루를 산다. 두레박 (질문) 나는 목회를 내 목회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손 우물 (한 줄 기도)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 주님 교회는 주님 겁니다. 제가 월권하지 않게 하시고, 내 목회인양 방자하거나 교만하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목회의 정답은 없다. 그러니까 그냥 엎드리는 목회를 지속적으로 감당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주님, 인도네시아에 들려오는 소식에 먹먹해집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힘의 논리만이 이 땅의 슬로건이 된 듯해서 서글퍼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정현종 시인의 시를 중보기도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두루미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미사일에 기러기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폭탄에 도요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전폭기에 굴뚝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포탄에 뻐꾸기를 발사합니다 모든 포탄에 비둘기를 발사합니다 정치꾼들한테 왜가리를 발사합니다 군사모험주의자들한테 뜸부기를 발사합니다 제국주의자들한테 까마귀를 발사합니다 승리 중독자들한테 발사합니다 먹황새 물오리 때까치 가마우지.... 하여간 새들을 발사합니다 그 모오든 死神들한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