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5일 화요일 성서일과 묵상 몇 몇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7편, 사무엘하 11:2-26, 요한계시록 3:1-6, 시편 83:1-4, 13-18 출애굽기 4:10-31 꽃물 (말씀 새기기) 요한계시록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마중물 (말씀 묵상) 수년 전, 사데에 도착했을 때 가이드가 사데 교회의 흔적이라고 알려준 초라하기 그지없는 교회 터를 본 뒤에 그곳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데 교회 공동체가 모였던 장소라고는 믿지는 않았다. 방치하면 손해고 잘 만들어 놓자니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해서 적당히 국가에서 사데 지역을 관광 자원화해서 돈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반면 역사적 실체이기에 부인할 수 없었던 사데에 남아 있는 아데미 여신을 섬기던 신전 터의 위상을 보고 놀랐다. 결국, 아데미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게임이 될 수 없었던 시대적 정황을 그 터전에 가서 직접 눈으로 목도한 셈이다. 더불어 왜 사데라는 지역에 있었던 교회에 대해 주께서 경고하셨는지를 어렴풋하게 인식하고 올 수 있었다. 이방적인 일체의 것들에 잠식되어 있었던 사데 교회가 왜 이름만 있는 죽은 교회라고 책망 받았을지 각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일과는 희망을 노래하게 한다. 이미 죽은 교회와 같은 무능력한 교회지만 사데에는 희망의 불꽃이 있었다. 더러운 옷에 물들지 않은 몇 명이 있었다. 나는 사데에 있었던 몇 명에 더 흥분한다. 역사는 토인비의 말대로 창조적 소수에 의해 만들어져간다는 것을 나 또한 동의하기에 그렇다. 몇 몇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 그들은 꺼지지 않는 불이다. 오늘,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를 바라보시는 주군은 분명히 몇 몇에 주목하실 것임을 알기에 그 몇 몇으로 살아내기에 나 또한 몸부림 쳐본다. 두레박 (질문) 대세에 떠밀려가는, 기득권에 열광하는 수많은 무리가 아닌 고독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창조적 소수로 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좁은 길을 걷겠습니다. 몇 몇이 되겠습니다.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등 떠밀려 내려가는 무기력한 자가 되지 말자. 하나님의 의지를 기억하는 삶의 남은 내 인생을 여백을 드려보자. 쉽지는 않겠지만 흔들리지 말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하나님, 아픈 자들을 안아주십시오. 너무 많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