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랭던 킬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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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새물결 플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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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12-05 10:5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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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던 킬키의 ‘산둥 수용소’ (새물결 플러스)를 읽고 독서의 절정은 감동이다. 책을 왜 읽는가? 를 물으면 저자와 말하고 싶어서라고 말하련다. 나는 킬키의 책을 읽으며 매 장마다 흥분으로 대화했다. 그가 윤리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나누어야 하고 가르쳐야 하는 현직 목사로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산둥 수용소 안에 있으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 대가는 이루말 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이 책을 늦게 알아 지각대장이 되었지만 금년에 읽은 오늘까지의 101권의 책 중에서 나에게는 누가 뭐라 해도 산둥수용서는 가장 큰 감동을 준 베스트셀러라고 극찬하고 싶다. 천박하지 않은 표현법으로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메시지로 인간 내면을 도려낸 저자의 필체는 압권이다. 서평자는 섬기는 교회에서 설교 사역을 하는 목사이다. 아무래도 설교를 하는 목사로 있기에 나에게 가장 감동이 되는 어휘들이나 촌철살인들이나 문장 전체를 설교에 인용할 때가 많다. 아, 물론 반드시 출처를 밝히는 예의는 잊지 않는다. 도둑놈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돌이켜 볼 때, 금년에 우리 교우들에게 제일 많이 인용하며 나누었던 책 세 권을 들라면 이재철 목사의 사명자반, 송병현 교수의 엑스포지멘터리 사사기, 그리고 킬키의 산둥 수용소 인 듯하다. 내친 김에 주일 예배 시간에 인용하며 선포했던 글 하나를 소개한다. 읽다가 전율했기 때문이다. 1945년으로 막 넘어가는 년 초에 위현 수용소에는 일본 패망의 직전 시기였기에 식량 배급이 현격하게 줄어 1,450명의 수용소 인원들이 적지 않은 배고픔의 고통을 당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예민해져 있었습니다. 하루에 섭취할 칼로리의 1/3도 안 되는 식량으로 버티다보니 상당수의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허덕이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 때 미국 적십자사에서 인도적 차원으로 보낸 구호물자가 1,500개 정도의 꾸러미로 포장이 되어 수용소에 반입이 됩니다. 당시 수용소에 수용된 미국인 약 200 여명이었기에 미국 사람들은 한 사람당 7-8개의 구호물자 꾸러미를 받게 되는 셈이 되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그 구호물자를 미국인들에게만 주기로 하지 않고 수용소에 있는 다국적 인원 전부에게 한 꾸러미 정도씩을 분배하고 미국인들에게만 두 꾸러미를 주는 계획을 세워 수용소 인원들 전부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일이 진행되려는 순간, 수용소 당국은 본인들이 세운 계획을 철회한다는 발표를 하는데 이유는 젊은 미국인 7명이 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적십자에서 보낸 것은 미국인들의 재산임으로 다국적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고 태클을 건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전 수용소 인원에게 구호물자를 골고루 분배하려는 계획은 유보되고 일본 본 정부에게 유권해석을 요청하고 그 결과를 기다려야 했기에 당분간 물자 지급을 보류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수용소 내에 있었던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미운 털이 박히게 되었고 여기저기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책의 저자인 랭던 킬키 박사는 미국인들 중에 대중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사람인 변호사 출신 수감자, 냉정한 사업가 출신의 수용자, 그리고 선교사 수감자들을 찾아가서 공동의 분배를 설득하지만 그들의 철저한 미국적 이기심을 토대로 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구호물자 에피소드는 일본 당국의 결정을 기다린 끝에 수용소 전 인원들에게 1인당 1꾸러미를 지급하여 나머지 남는 것은 다른 수용소에 보낸다는 결정이 나서 미국인들을 사람도 잃고 신의도 잃는 닭 쫓다가 개 쳐다보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게 됩니다. 이 사건을 경험한 랭던 킬키가 책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우리는 자신의 진짜 욕망과 욕구를 스스로에게 감추기 위해 직업적이거나 도덕적인 옷을 입는다. 그러고는 이기적 관심이라는 진짜 속내 대신에 객관성과 정직이라는 겉옷을 걸치고 세상에 나간다. (중략) 따라서 어떤 사람이 도덕적으로 건강한지 아닌지는 무엇보다 그의 자아가 가지는 근본적인 성향, 방향성, 충성도에 의존한다. 말하자면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이 갖는 ‘방향성’에서 그의 영적인 일관성이 나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의 진짜 자아는 안으로 향하고 있으며 나만의 복지를 향하고 있다. 우리는 이 안에 너무나도 침잠한 나머지 우리 안에 이런 것들이 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딜레마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일은 더욱 힘들게 된다.” 나는 킬키 박사의 글을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 하나 있었다. 재론한다며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진짜 욕망과 욕구가 내 안에 있는 것조차도 모른다는 절망 말이다. 이것을 모르기에 작금에 우리 주변에 엽기적인 일들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에도 그것을 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시하는 소름끼치는 무감각이 나를 그리고 우리들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학대학교 학부 시절 일본이 낳은 걸출한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을 읽었다. 일본 군부는 미군 포로를 잡아서 생체 실험을 한다. 그 실험의 집도의가 젊은 일본 군의관 로다이다. 로다는 어쩔 수 없는 군부의 명령으로 생사람을 마취시켜 놓은 뒤 몸의 한 부분들을 절단시켜 놓고 사람이 얼마나 살 수 있는가? 를 시험하는 기막힌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이 엽기적인 일을 하면서 로다는 그렇게 명령을 수행하면서 스스로 자위를 한다. 나는 군인이기에 명령을 수행하는 자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등등을 생체 실험 도구로 시험하면서 어느 날 생사람의 배를 갈라 간을 들고서 그것을 시식하고 또 냄새를 맡는 자기가 어떤 가책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괴물이 되었음에 절규하는 로다의 그 외침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생생히 기억한다. 이것을 기억한 이유는 나 스스로도 목양의 현장에서 그런 무감각에 사로잡힌 괴물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킬키가 산둥 수용소에서 갈파한 생생한 기록들은 인간 승리의 보고서가 아니다. 철저한 인간 군상들의 패배 보고서이다. 그래서 더 많이 배울 것들이 있다. 반면교사는 항상 목사들의 살아 있는 교과서이자 선생님들이니까. 킬키는 산둥 수용소에서의 약 2년 6개월에 걸친 경험들을 소개 분석한 뒤에 이 책의 말미에 참 많은 가르침을 의미 있게 시사해 준다. “인간의 도덕성과 비도덕성은 우리 생명의 가장 심오한 영적 중심으로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폴 틸리히가 말한 ‘궁극적 관심, 궁극적 책임감’이다. 이 영적 중심을 통해 행위의 목적과 의미를 얻으며 그래서 존재의 일관성과 방향성을 얻게 된다. 이 영적 중심이 흔들리면 인간은 자신의 삶이 극도로 불안정하고 완전히 뒤죽박죽이라고 느낀다. 이렇게 되면 우리 존재는 아무런 방향성이 없이 어떤 일도 이루지 못하며 그래서 의미 없는 일련의 사건과 행위의 연속으로 전락하고 만다. (p.429.)” 기막힌 통찰이다. 영적인 중심에서 방향성이 나온다는 그의 말이 오늘, 얼마나 가슴절임으로 다가오는가? 한 가지만 더 나누고 싶다. 킬키 박사는 산둥 수용소에서 가장 비극적으로 절망을 경험하게 한 인간의 부류들을 지성인, 종교인, 하이 클래스에 있던 자들이었음을 까발린다. 그리고 그 아픔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오히려 예리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더 그럴듯한 합리화를 꾸며낸다. 수용소에서 중요한 도덕적 문제에 직면할 때 이런 양상은 반복되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 존경받는 사람들일수록 더 그럴듯한 말로 자기의 이기심을 합리화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더 존경스러워 보였으니 말이다. (중략) 죄란 유한한 대상에게 궁극적인 종교적 헌신을 하는 것이다. 즉 죄란 자아와 자의 실존, 또는 자아가 속한 집단에 최우선적인 관심과 헌신을 기울이는 것이다.”(pp.431-432) 종교의 존재 타당성에서 볼 때 이타적이지 않을 때 그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고 또 그런 종교 안에 그 테마를 고스란히 전수받은 종교인들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킬키의 완곡한 표현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서평자는 표현하고 싶은 감동들이 태반이다. 더 많은 감동들이 이 책 안에 수록되어 있다. SNS 와 매스 미디어에 미쳐 있는 이 시대는 이처럼 아름다운 아날로그적인 감동을 책에서 얻는 것을 빼앗았다. 그래서 참 슬프고 유감스럽다. 킬키의 책은 우리 교회 모든 교우들의 필독도서이다. 그만큼 서평자에게 주어진 감동이 진하고 강하다. 사족하나) 목사인 나는 랭던 킬키의 이 책을 왜 지금 읽었을까? 많이 속상하다. 킬키의 경험 속에서 배태된 종교윤리학적인 사유와 성찰 그리고 지성적 분석이 압권이며 감동이다. “원하지 않던 상황들이 파괴적인 역할을 하기보다 창조적 역할을 했다.(p.448)” 어떤 상황이든 그리스도인이라는 내가 절망하지 말아야 할 지침으로 다가온다. 아들, 무지하게 큰 감동과 지적인 도전이 담겨 있다. 이 책은 가능하면 빨리, 알았지? 2014년 8월 18일 오후 3시 40분 목욕탕 안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