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기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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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꽃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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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5-01-03 16:4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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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아슬아슬한 희망”을 읽고 (꽃자리, 2014) 헛질 하지 않기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그 아슬아슬한 것이 희망이라서 좋았다. 그 희망마저도 바라볼 수 있으니 말이다. 말장난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슬아슬하니까 그 희망이 더 간절한 것은 아닐까 싶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김 목사의 글 팬이 되어 있다. 나같이 시니컬한 자가 김 목사의 글 팬이 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끔은 신기해서 자문한다. 그러다가 자답(自答)하는 것이 있다. 그의 글이 편벽되지 않음이다. 서평자는 1년에 약 100 여 권 정도의 책을 정독하며 읽는 편이다. 읽으면서 가끔 느끼는 것이 있다. ‘헛 질 했네.’ 이다. 시간이 너무 귀한 것을 알고 있는 목사이기에 참 나쁜 책(서평자의 주관적 판단)을 만났을 때는 쓸데없는 독서를 하면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다는 허탈함에 많이 속상하다. 내가 헛 질이라고 말하는 책의 저자들이 갖고 있는 단면이 있다. 생각의 강요이다. 어떤 책은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다. 목사가 저자인 경우에 이런 헛질을 유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데 김기석 목사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이런 기우에 통타를 날린다. 그는 수구적이지 않다. 항상 개방적이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는다. 그의 글은 항상 신선하다. 특히 구도자의 길을 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선명한 감동의 족적을 남긴다. 감사하게도 그는 항상 약한 자의 편에 있다. 그는 을의 편에 있다. 그는 눌린 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일성(一聲)에 귀를 쫑긋하려고 무던 애를 쓴다. 어떤 경우에는 눈을 부라리고 쳐다보며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보면 가끔은 아프지만 매도 맞는다. 그 매를 맞을 때는 정신이 번쩍 든다. 그래서 매 맞는 내가 행복하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목사로 그리고 약간 시대에 뒤쳐진 목사 후배로서 그의 조용한 사자후는 항상 나를 경책시킨다. 또 하나 그의 팬이 된 이유는 그의 폭넓은 독서력을 통하여 얻는 도전과 배움이다. 공부하는 목사 선배로 따라가기에 참 괜찮은 선생이다. ‘아슬아슬한 희망’에서 서평자는 또 한 번 그에게 배웠다. 그는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해서 그가 섭렵하고 난 책들을 나도 모은다. 부스러기 때문이다. 그 부스러기를 주워 담는 것만 해도 목사로서 수지맞는 일 중의 하나이다. 이제 그 희망의 줄타기를 해보자. 샛별을 품에 안고 저자는 생명의 소중함을 기적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세월이 참 빠른데 살아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예찬한다. “내가 기적인 것처럼,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이 기적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자기 생명이 기적인 줄 모르는 이들만이 타자를 함부로 대한다.” (pp, 24-25)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호흡을 하고 있는 나, 그냥 주어진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사유가 없는 자이다. 여전히 아침에 호흡을 하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뿜을 수 있는 것은 창조주의 은혜요 기적이다. 절친이 있다. 인천에서 도시 빈민 사역을 하며 하늘을 품고 사는 친구이다. 친구는 어려서 심장 질환을 앓아서 지금도 심장에는 기계가 도움을 준다. 언젠가 친구가 이런 감회를 서평자에게 토설한 적이 있다. “언제든지 심장에 들어 있는 기계가 멈출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사는 사람과 정상적인 심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맞이하는 아침이 같을 수 없다.” 정답이지 않은가? 그러나 절친의 말에 동의하면서 나는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그도, 나도 아침에 호흡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동일한 기적이다.” 나에게 주어진 또 한 번의 삶은 이어지는 기적임을 알고 사는 자는 겸손하게 살 수 밖에 없다. 기적의 신비를 알고 있기에 말이다. ‘어’, 하면 ‘아’하지 말게 하자. 상투적인 언어를 깨뜨리자고 저자는 苦言(고언)한다. 특히 목사가 행하는 상투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비판적이다. 그는 이렇게 직설했다. “설교단에서 매 주일 선포되는 말씀이 ‘사건’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또한 성도들의 일상에서 작동도지 않는다면 그처럼 슬픈 일이 또 없을 것이다.” (pp,33-34) 이렇게 전제한 저자는 상투적인 언어로 도배한 설교자들을 향하여 통타를 날린다. “오늘의 목회자의 과제가 있다면 상투어로 변해 버린 종교적인 언어를 우리들의 일상의 언어로 새롭게 번역하는 일이 아닐까?”(p,34) 전적으로 동의한다. 설교자가 설교단에서 서서 선포하는 말은 그 순간 하나님의 영의 역사와 임재로 로고스가 레마로 바뀌는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서평자는 생각한다. 이것을 구약적인 의미로 적용한다면 설교자의 설교는 항상 ‘다바르’의 해석을 말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의 말’로의 선언은 상투적일 수 없기에 말이다. 언어학자 윤상현은 이렇게 갈파했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게를 갖는다. 그 존재는 우리들의 인식과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정도에 따라 존재의 무게감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왜 없지 않고 있는가? 라는 질문만큼 존재는 무거운 것이다.” 서평자는 윤 박사의 글을 읽다가 생뚱맞은 생각을 해 보았다. ‘없지 않고 있는 존재’ 중에 가벼운 존재는 없는데, 그 존재에 대한 사유함과 성찰함을 통해서 이야기되는 일체의 언어들이 상투적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의 도전적인 생각 말이다. 깊은 사유함은 천박할 수 없다. 존재의 깊이와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일상의 언어를 그러므로 상투적인 가벼움으로 대치해서는 안 된다. 비 상투성과 신선한 언어로의 접근은 이 시대를 치료하는 화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포기할 수 없는 목회자들의 책임이다. 봄바람 만드는 사람!
저자는 그리스인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성 프란체스코’에 나오는 한 예를 소개한다. “한 겨울에 아몬드나무에 꽃이 만발했다. 주변의 나무들이 일제히 아몬드나무의 허영심을 비웃었다. ‘저렇게 교만할 수가! 생각해 봐, 저 나무는 저렇게 해서 자기가 봄이 오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지!’ 아몬드나무 꽃들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용서하세요, 자매님들, 맹세코 나는 꽃을 피우고 싶지 않았지만 갑자기 내 가슴속에 따뜻한 봄바람을 느꼈어요.'”(pp,38-39)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 신문, 방송, 인터넷은 ‘브렉시트’의 충격으로 뒤덮였다. 앞으로, 세계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나라에 직간접적으로 미칠 영향에 대하여 분석하는 기사로 도배되었다. 저기압, 고기압 군을 별도로 구별하여 향후 대책을 강구하는 모양새가 마치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 같은 분위기이다. 이제 얼마 있으면 삼복더위가 찾아올 터인데 전 세계는 한랭전선 모드이다. 그 어디에서도 봄바람의 기운은 찾아볼 수 없다. 저자도 말했지만, 봄바람의 기운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바람기(?)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났으면 좋으련만 기운도 없어 씁쓸하다. 목사로 사는 나의 역할이 새삼스러워진다. 봄바람 만드는 사람! 그러고 보면 목사는 참 할 일이 많은 직업이다. 영악함을 포기하는 삶 저자의 글 중에 서평자가 참 많은 감동을 받은 대목이 있다. 소개한다. 영화감독인 타르코프스키의 순교 일기의 내용이다. 파반다 출신의 파베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승이 한번은 말라 죽은 나무 한 그루를 가져다 산 위에 흙을 파고 심었다. 그리고는 요한 콜로그에게 이 앙상한 나무에 매일 물을 한 동이씩 주어 열매가 열릴 때까지 하라고 명했다. 물가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요한은 저녁 때 다시 돌아오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했다. 3년이 지난 후, 나무는 다시 싹이 나기 시작했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노수도승은 열매를 따 교회의 수도자들에게 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서 이리들 와서 順命(순명)의 열매들을 맛보도록 하시오.”(pp,50-51) 저자는 이 글을 소개한 후에 이런 부연을 기록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영악한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는 데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도 누군가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 있는 자가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의 열매도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의 열매일 것이다.”(p,51)
목회의 현장에서 어언 30년을 사역을 하다 보니 무당(?)이 다 된 느낌이 들 정도로 내 스스로에 경악할 때가 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영악한 자들은 한 눈에 들어와 즉각 알아차리는 무당적 기질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을 때이다. 하나님 앞에서 이들도 보듬을 수 있는 능력과 포용성 달라고 수없이 기도하는데 그들에 대한 나의 반응을 영 신통치가 않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을 슬라이드가 지나가는 영사기처럼 떠올리면 영악한 자들과 미련하리만큼 순종하는 교우들이 흑백논리의 차원에서 분명하게 구분된다. 서평자도 인간인지라 그럴 때 영악한 사람에게 말투 자체도 곧지 않는 나를 보면서 참 못난 목사의 기질을 다시 확인한다. 이 판단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던 애를 쓰는데 그들을 포용하기가 녹록하지 않다. 아마도 영악한 자들을 극복하는 방법은 내 스스로가 영악함에서 벗어나는 일이리라! 이 모난 자를 목사로 만드셔서 당신이 참 힘드십니다. 라고 고백하니 무슨 목회가 되겠는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드리는 기도이다. “주여, 영악함을 버리게 하옵소서!” 솔직하기라도 했으면.
2014년 서평자는 ‘산둥수용소’를 늦깎이로 만났다. 그렇게 지각생으로 랭던 킬키를 만났지만 2014년 서평자에게는 그의 책은 최고의 책이었다. 읽는 중에 서평자를 한참이나 기웃거리고 머뭇거리게 했던 부분을 잠시 소개하고 싶어진다. 1945년으로 막 넘어가는 년 초에 위현 수용소에는 일본 패망의 직전 시기였기에 식량 배급이 현격하게 줄어 1,450명의 수용소 인원들이 적지 않은 배고픔의 고통을 당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예민해져 있었다. 하루에 섭취할 칼로리의 1/3도 안 되는 식량으로 버티다보니 상당수의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허덕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 미국 적십자사에서 인도적 차원으로 보낸 구호물자가 1,500개 정도의 꾸러미로 포장이 되어 수용소에 반입된다. 당시 수용소에 수용된 미국인 약 200 여명이었기에 미국 사람들은 한 사람당 7-8개의 구호물자 꾸러미를 받게 되는 셈이 되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그 구호물자를 미국인들에게만 주기로 하지 않고 수용소에 있는 다국적 인원 전부에게 한 꾸러미 정도씩을 분배하고 미국인들에게만 두 꾸러미를 주는 계획을 세워 수용소 인원들 전부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계획을 세운다. 일이 진행되려는 순간, 수용소 당국은 본인들이 세운 계획을 철회한다는 발표를 하는데 이유는 젊은 미국인 7명이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적십자에서 보낸 것은 미국인들의 재산이기에 다국적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고 태클을 건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전 수용소 인원에게 구호물자를 골고루 분배하려는 계획은 유보되고 일본 본 정부에게 유권해석을 요청하고 그 결과를 기다려야 했기에 당분간 물자 지급을 보류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수용소 내에 있었던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미운 털이 박히게 되었고 여기저기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된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책의 저자인 랭던 킬키 박사는 미국인들 중에 대중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사람인 변호사 출신 수감자인 리키 콜첵과 선교사 출신의 수감자 그랜트를 찾아가서 공동의 분배를 설득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교묘한 이기적 논리로 더 적극적으로 나눔을 거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이 구호물자 에피소드는 일본 당국의 결정을 기다린 끝에 수용소 전 인원들에게 1인당 1꾸러미를 지급하여 나머지 남는 것은 다른 수용소에 보낸다는 결정이 나서 미국인들을 사람도 잃고 신의도 잃는 닭 쫓다가 개 쳐다보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게 됩니다. 이 사건을 경험한 랭던 킬키가 책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해 준다. “우리는 자신의 진짜 욕망과 욕구를 스스로에게 감추기 위해 직업적이거나 도덕적인 옷을 입는다. 그러고는 이기적 관심이라는 진짜 속내 대신에 객관성과 정직이라는 겉옷을 걸치고 세상에 나간다.” 서평자는 킬키 박사의 글을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 하나 있었다.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진짜 욕망과 욕구를 너무 완벽하게 포장하고, 변장하고 있는 내 변장술에. 해서 생각하며 살기로 한 것이 있다. 정직하지 못하면 솔직하기라도 하자. 우물에서 숭늉 구하기 저자는 이런 혜안을 내놓는다.
“고요히 앉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구하는 것과 같다.” (p,71) 저자는 사유함의 중요성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에둘러 표현했다. 현대인들의 참 아픈 비극은 무리지음이다. 무리지음은 내 스스로가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반향이리라. 그렇지만 그 몸부림의 반향은 나를 더욱 외롭게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내가 외로움이라는 서늘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리지음이 아니라 홀로됨이라는 역설이다. 저자는 책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신학자 폴 틸리히의 지론으로 소개한다. “‘외로움’은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는 데에서 오는 ‘홀로 있음의 고통’이지만, ‘고독’은 내 존재의 근원과 하나 됨의 희열을 누리는 ‘홀로 있음’의 영광이다.”(p,73) 서평자는 저자가 소개한 폴 틸리히의 갈파에 상당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왜인가? 무리지음이라는 몸부림에는 결코 내 존재의 근원과 하나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을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마치 우물에서 숭늉 찾는 꼴이 아니겠는가? 생거먼 대학 학장으로 일하면서 개발된 문명에 도전하던 깨어 있는 지식인 리 호이나키는 일리노이 주의 농촌으로 돌아와 그가 꿈꾸던 생태주의적인 세계를 그리며 살던 나날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일상적으로 마음을 분산시키는 현대적 미디어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나는 자유롭게 사색했다. 직업상의 불가결한 구성부분으로 독서를 하는 생활을 포기한 후에 나는 이런 삶의 독서를 했다. ‘오늘날 육화된 독서는 어떤 것인가? 아직도 글을 읽고 쓴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날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는 거리와 여유를 발견하였다.” 호이나키가 이런 통쾌한 성찰을 할 수 있었던 근원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의 말대로 그가 선택한 곳은 현대적 미디어가 전혀 없는 촌스러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환경이었기에 오히려 그곳에서의 고독함이 내 존재의 근원을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 결과 그는 후대의 생각하는 지식인들에게 삶으로 실천하는 깨어 있는 지성적 교훈들을 남겨준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이 시대의 비극은 분주함이다. 더불어 전혀 내적인 감동과는 관계없이 홍수같이 쏟아지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이 나와 항상 같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아니라 고독함을 경계하게 하는 시끄러움이 함께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서 스스로의 경책을 갖지 않는 한, 우리들 스스로는 매 번 우물에서 숭늉 찾는 어처구니없는 사유함이 없는 일을 자행할 것이 분명하기에 안타깝다.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변질되지는 말아야지.
“한 의인 소돔에 갔다. 소돔 사람들을 죄와 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밤낮으로 거리와 시장을 돌아다니며 탐욕과 도둑질, 거짓과 무관심을 버리라고 설교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빈정거리며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소돔 사람들에게 흥미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인자들은 계속 살인했고 현자들은 계속 침묵했다. 어느 날, 의인을 아이가 다가와 아무 소용도 없는 외침을 왜 계속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의인은 자기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소리를 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소리를 치는 이유는 그래야 사람들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지.”(p,88) 서평자는 김기석 목사가 소개한 엘리위젤의 ‘팔티엘의 비망록’ 도입부에 적은 이 글을 섬기는 교회에서 참 많이 인용하여 교우들과 나누었다. 그리고 절판 된 이 책을 서울에 있는 대학원 모교에 찾아가 단 번에 읽고 벼락을 치는 감동을 받았다. 저자도 이 글을 맨 처음 읽었을 때의 감회를 마치 감전이라도 된 충격이었다고 했다. 엘리 위젤의 이 글을 읽었는데 별 감동이 없다면 그가 어찌 정상인이겠는가?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변질이라도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목사의 마지노선이 아닐까? 1992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수자의 손이 올라올 때 하나님께 다섯 가지를 약속했다.① 목회의 본질인 예수님이 가신 길에서 이탈하지 않겠습니다. ② 정치하는 목사가 되지 않겠습니다. ③ 물질에 굴복하지 않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④ 갈라디아서 1:10절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사역하겠습니다. ⑤ “자기의 창문을 통해서 응시하는 무신론자가 자기가 만든 거짓된 하나님 상에 사로잡힌 신앙인보다 하나님에게 더 접근해 있다.”고 갈파한 마틴 부버의 일침대로 거짓된 하나님 상에 사로잡한 목사가 되지 않겠습니다. 서평자에게는 24년 전에 하나님께 드렸던 이 다섯 가지의 맹약이 현재진행형이다. 어느 경우 이 5가지의 약속이 흐려졌다. 그리고 흔들릴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소리를 지르면서 다섯 가지를 외운다. 그리고 곧추 세운다. 왜? 굳이 엘리위젤의 말대로 적용한다면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기본만이라도 하는 목사가 되었으면 싶다. 지면의 궁색함을 핑계로 한 가지만 더 나누고 싶다. 루벤스의 작품 ‘그리스도의 진노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성도미니크와 성 프란체스코’ 의 그림 삽화에 관한 교훈이다.(p,226) 저자는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이런 사족을 달아 놓았다. “오늘의 교회는 과연 그리스도의 진노의 팔을 막고 있는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이미 부유해진 교회, 부유해 지고 싶은 교회에는 그리스도가 머물 자리가 없다. 십자가를 잃어버린 교회는 무너지는 게 당연하다. 세속적인 성공의 유혹에 저항하고, 스스로 가난해지려는 노력 없이 교회는 새로워지지 않는다.”(p,226) 루벤스의 ‘진노의 팔을 붙잡은 손’의 성화에 대한 해석은 2015년 섬기는 교회의 신년감사 주일 예배 예화로 삽입할 정도로 전율하는 은혜를 서평자에게 주었다. 주님의 마음을 닮으려는 격정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에, 그리고 섬기고 있는 교회의 영적인 자존감을 고취시키는 데에 소름끼치는 감동을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를 유예시킬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는가? 1년 내내 물으며 곱씹었다. 더불어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 있는가도 물었다. 더 고집을 피려고 한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날까지 내내 질문하며 사역하려 한다. 그래서 저자의 말대로 아슬아슬하지만 아직도 한국교회와 서평자에게 기대를 걸고 계시는 주님의 그 희망을 꺾지 않는 호모 크리스티아노스가 되려고 몸부림쳐 보련다.
사족하나) 아슬아슬한 오늘의 시대에 희망이 있음을 작가는 보여준다. 어떤 의미로 보면 희망이 아슬아슬하기에 그 희망이 더 간절하고 소중한 것은 아닐까! 2015년, 그 희망이 나의 달려감의 끈이기를 기대해 본다. 아름답고 깊이 있는 작가의 글에 감사를 전한다. 2015년, 1,1. 22:02, 서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