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공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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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분도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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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5-01-08 21: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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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2) 를 읽고 개신교회 목회자로 섬긴 지가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름 개혁적인 모드를 갖고 사역을 한다고 설치며 살아와서 그런지 가톨릭에 대한 근본주의적인 색깔을 갖고 가톨릭을 공격하는 자들에 대하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것도 사실이다. 동시에 이 생각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있는 교리들의 제반적인 내용들을 수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양보를 해도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비성경적인 요소들에 대하여는 아직도 나 또한 요지부동하다. 서평자가 언급하고 있는 공지영 작가는 가톨릭 신자이다. 그냥 신자(미사만 간신히 드리는 자)가 아니라 신실한 가톨릭 영성을 추구하는 작가이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바탕에는 개신교 목사로서 도저히 인정하기가 어려운 대목까지 신앙화하는 과유불급이 없지 않아 곳곳 수도원 기행 (2) 에 담겨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지영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은혜 그것도 개신교적인 색깔이 아주 강한 은혜를 받았다. 아주 오래 전에 접했던 ‘수도원 기행 1’에서는 도무지 언급되지 않은 가톨릭적인 영성(물론 나는 그 영성이 가톨릭 적이라고 평가하지 않고 아주 개신교적이라고 평가했음)을 깊이 발견했다. 공지영 작가는 아주 잘 알려진 소설가이자 다방면의 문학적 장르를 소화하고 있는 작가이다. 해서 인지도 측면에서도 다른 어떤 작가들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다. 나 같은 사람도 그녀의 글을 소소히 읽은 것을 보면 이 평가는 과대평가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봉순이 언니’로부터 시작하여 ‘수도원 기행 1’, 그리고 많이 울었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그리고 ‘도가니’까지 그녀의 작품을 섭렵하려고 했던 이유는 ‘역사성’과 ‘비상식과 힘 있음을 갖고 있는 자들의 휘두름에 대한 비틀어짐’때문이었다. 목사로 이 땅을 살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들을 작가는 여타 그녀의 작품을 통해 통타해 주었기에 대리만족하는 부스러기 은혜를 받았다고나 할까 그렇다. 물론 공지영 작가에 대한 안티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심지어 그녀의 사생활까지 들추어내면서 그녀가 도덕성에 있어서 씻지 못할 짓을 한 것처럼 몰아가는 익명의 질 나쁜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이 참 악하다는 생각을 여지없이 하게 되었으니 나는 어쩜 그녀의 소리 없는 응원자가 된 것 같기도 하다는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뭐 그래도 상관은 없다. 나는 그녀의 삶에 대한 부분을 그녀의 인격적인 영역에서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적어도 작가의 우군에 속한 나는 이번에 그녀의 두 번째 수도원 기행을 읽으면서 같은 신앙인으로서 그녀를 응원하는 것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하겠다는 또 한 번의 개인적 독백을 읊어본다. 서평하고 있는 책, ‘수도원 기행 2’ 는 참 은혜롭다. 진보적인 신학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내가 ‘은혜롭다.’라고 표현할 때는 근본주의적인 차원에서의 고지식함을 대변하는 표현이 아니다. 그녀의 수도원 기행 속편은 정말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인의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때도 너무 은혜롭다. 18년 만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작가는 책의 지천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소통, 그리고 만남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압권은 이 대목이다. 소개한다. 개인적인 영적 교제를 하고 있는 신앙 안에서의 자매인 소피아는 남편도 잘 해주고 자녀들도 별 탈이 없이 잘 자라주어 뭐 하나 부러울 것이 자매이다. 그녀는 그런 가정적인 유복함을 배경으로 피정과도 같은 신비적인 만남들을 강렬하게 추구하는 자매이다. 그녀가 피정의 강도를 더 요구하고 깊이 체험하기를 요구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권하자 작가는 이렇게 그녀에게 일설(一說)한다. “언니, 그건 안 돼. 고통을 겪어야 알게 되는 거야. 십자가 없이 어떻게 그 분을 알겠어.” (P.170) 나는 작가의 이 글을 읽다가 우레 소리를 들었다. 주님의 사자후를. 후에 소피아는 아들을 이유 없이 두 명이 갑자기 잃는다. 이후 그녀는 작가의 외침이 진정성 있게 느껴지게 되는 깊은 신앙의 골로 들어서데 되었음을 독자들에게 알린다. 이 부분을 접하면서 나는 색다른 도전과 은혜를 받았다. “십자가 없는 교회, 십자가 없는 신자”가 요동치는 한국교회에 내리시는 일설로 작가의 말을 들었기에 말이다. 아빌라에서의 기행을 통해 테레사 성녀를 통한 그녀의 영성을 진솔하게 작가는 본받고 싶어 한다. 아빌라의 테레사 성녀와 영혼의 짝을 이루었다고 믿어지는 성 요한의 글을 작가는 글 말미에 소개한다. 예수께서 성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물으셨다. “요한아 특별히 이번에는 너의 공로를 보아 다 들어주겠다. 얘야, 무엇을 주랴?” 그러자 요한 성인이 말했다. “멸시와 모욕이요.” (P.288) 신앙인의 아름다움의 극치 중에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작가는 글을 마치면서 이런 본인의 영성 고백을 남긴다.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P.302) 나는 공지영 작가의 글을 접하면서 개신교적인 영성의 은혜를 받았다고 전술했다. 본 서는 수도원 기행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지만 읽고 난 나는 제목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영성 기행”이라고. 책에 기록된 감동의 보너스 하나 더. 팔덴 갸초(Palden Gyatso) 는 티베트의 최장기수 정치법이었고, 고통 받고 있는 티베트의 현실을 국제연합에서 최초로 증언한 티베트인이다. 중국에서 고문과 박해를 받고 삼십 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한 후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한 뒤 다람살라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난 팔덴 갸초는 울기만 했다. 그간의 사정을 묻는 달라이라마에게 그는 울면서 말했다. “대단히 위험했습니다.” “그래, 가장 위험하던 것이 무엇이던가?” “하마터면 중국인들을 미워할 뻔했습니다.” 작가가 쓴 ‘수도원 기행 (2)’에서 또 한 부분, 유독이 기억의 한 복판에 남아 있는 글이다. 왜냐하면 티베트 불교의 영성이 이 정도였는가? 를 반문하며 많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정도의 영성이 있어야 신앙인이라 하지 않겠는가? 자문하면서 갸초의 울림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본다. 작년 한 해 사도행전 26:29절을 심령에 녹이려고 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감 유지와 삶은 나의 전부이다. 바울처럼 살고 싶다. 아름다운 글을 읽고 난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서평을 쓸 때마다 고민되는 부분이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진행되는 책과의 데이트는 나를 존재하게 하는 무기요 보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