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페리 노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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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두란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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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08-19 16:5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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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노블의 'UNLEASH‘를 읽고 (두란노, 2014년) 책을 읽다가 아슬아슬했다. 그의 기록들이 내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성서적, 신학적인 입장과 해석에서 많이 빗나가 있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러도 하나님은 은혜를 거두시지 않는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설교단에서 전했던 메시지 중에서 가장 참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아울러 가장 거센 공격을 받았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엄연한 성경에 기록된 메시지이다.” (P 55.) 물론 페리 노블의 이 단호한 선언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내가 무엇을 행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선언임을 밝히고 있지만 ‘어떤’이라는 대전제는 항상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이기에 위험하다. 인간이‘절대’ 라고 표현할 만한 이 땅에서 표현될 확신성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확신성을 갖고 있는 존재는 창조자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님의 전적인 주권적 영역이다. 예수님조차도 용서받지 못할 죄의 전제를 복음서에서 천명한바 전술한 노블의 이런 확신은 항상 반대급부적인 본인이 알지 못하는 영적 영역이 있음을 알고 삼가야 할 부분이기에 그의 선언은 유감스럽다. 또 하나, 저자는 다윗의 승전기사를 전하며 골리앗을 이긴 쾌거에 대하여 소개한다. 그의 승전이 분명히 하나님의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과 도우심에 의거한 승리임을 부인할 자는 없다. 그러나 다윗은 이어지는 기사는 그의 치명적인 실수와 범죄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 신명기 역사가의 기술이다. 다윗은 우리들과 같이 똑같은 연약성과 죗성을 갖고 있는 인간임을 역사가는 고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신앙의 차원에서 포플리즘적인 냄새로 영웅화 시키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저자는 다윗이 들었던 돌 다섯 개에 대한 해석을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네 거인들이 전쟁 중에 쓰러졌다는 기록에 대입하여 그 네 명의 거인들이 마치 골리앗의 자식들처럼 간주했다. 이런 억지춘향식의 성서 해석을 무리하게 시도함으로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 가지고 나간 나머지 네 개의 돌 사용처가 그들을 쓰러뜨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임의적으로 해석하며 적용하는 실수를 과감하게 범했다. 다윗의 승전보를 드라마틱하게 그리려는 시도에서 나온 과유불급이다. 이왕 언급했으니 한 가지만 더 나누자. 저자는 책에서 본인이 12세부터 빠져 무려 6년 동안이나 빠져 나오지 못한 포르노 중독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고백한다. 그의 용기에 적지 않은 지지를 보낸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인 선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는 유보이다. 목사로서 재직하고 있는 그가 그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이라고 못 박았지만 공인으로서 윤리적, 도덕적 그리고 성적인 부분에서의 일탈을 피력함에 있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은밀한 그리고 인격적인 회개만으로는 완전한 돌이킴이 안 되었을까? 하는 유감이다. 물론 이런 차원에서의 진정성은 많은 논의에 따른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 글을 읽고 난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근래 들어 모 교회에서처럼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회개가 진정한 회개라고 정의하여 공회에서 들추어 낸 회개 고백을 시킴으로 인해 도리어 그 당사자의 가정 파괴는 물론 또 그와 관계된 자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또 다른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는 바 페리 노블의 일련의 이런 공개적 선언은 한국적인 문화와 토양에서 위험스러운 접근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음을 서평자는 토하고 싶다. 이상은 노블의 이론과 입장에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현직 목회자의 반론적인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거침없는 선포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영적 ‘UNLEASH’의 관점에서 상당수 많은 부분 공감하고 또 수용하고 싶은 내용들로 넘쳐난다. 진정한 영적 올무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초석을 노블은 다윗의 일생을 조명하면서 몇 가지로 정리하여 진단해 보면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요약할 수 있다. 1) 하나님이 다윗을 통하여 일하신 위대한 성경적인 테제는 다윗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찾으셨다는 대명제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기초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 사람보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 분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실까? 를 질문하는 사람이 영적인 해방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들을 구경꾼으로 부르시지 않고 역사의 협력자로 부르신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영적인 해방임을 저자는 역설한다. 2) 같은 차원에서 우리 힘으로 아무리 무엇인가를 노력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과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지 그 분의 자녀라는 지위를 그냥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이것을 인지하고 깨닫는 자가 진정한 해방을 맞이한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낼 수 없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것은 영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 인간의 역사상 그 누구도 이 일을 해 내지 못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노력으로 얻을 수 없고 다만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진정한 해방을 맛본다. 3) 내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변함없이 충만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아야 한다. 이 진리를 받아들여야 진정한 해방이 시작된다. 4)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오늘의 골리앗은 ‘지난 실수’이다. 이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순간 영적인 해방을 기대할 수 없다. 수많은 상황이 이면에 숨어 과거의 거인을 나의 삶의 정면으로 끌러들여 나를 옥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이런 이유로 지금도 그 거인에게 겁에 질려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며 과거의 그 거인에게 기가 질려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 안에서 살지 못함으로 후회의 감옥에서 구금되어 있다. 재론하지만 저자는 강조한다. 예수 안에서 나는 가장 귀한 존재이며 예수 안에서 나는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자임을 확신하라. 그럴 때 진정한 해방을 맛보리라. 5) 진정한 영적 해방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저자는 하나님의 비전이라 칭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상상도 하지 못할 위대한 일을 행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내 작은 비전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한 비전을 나에게 주심으로 나를 만족하게 하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비전에 동참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다윗에게 성경 그 어느 구절도 다윗의 승리를 약속한 구절은 없다. 다만 다윗이 목숨을 걸고 놓칠 수 없는 기회를 붙들었기에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일하셨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비전이 아닌 하나님의 비전을 붙드는 것이 또 다른 해방의 비결임을 제시한다. 6) 다윗은 사울을 용서한다. 더불어 의미 없는 장현 엘리압과의 싸움에서 자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감동을 받았다. 집중해서 싸워도 이길까 말까 한 골리앗과의 싸움에 집중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쓸데없는 엘리압에게서 우리들의 남아 있는 정력을 소비한다. 이로 인해 본선에서 싸워야 하는 골리앗과의 일전에서 한 방에 패배하는 아쉬움이 너무 많은 것이 사실임을 노블은 제기한다. 이로 인해 진정한 해방을 맛보지 못하고 항상 패배의식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서평자는 6년 전, 엘리압의 거대한 싸움에 몰려 있었다. 정말로 싸우고 싶지 않은 싸움에 몰려 있었다. 뒤로 물러서면 그 동안 쌓아 올린 담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최악의 아픔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압과 싸우지 않았다. 그것이 옳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현장에는 너무 많은 골리앗들이 산재해 있기에 그 골리앗과의 싸움에 집중하기를 결정했다. 엘리압이 아닌 골리앗과의 싸움을 선택한 지 6년, 목양의 현장에서 행복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나는 페리 노블의 말대로 내가 받은 상처보다 예수님이 주시는 위로가 더 큰 것을 100% 아니 1,000% 믿는다.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서평자는 영적인 해방과 자유함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페리 노블은 이렇게 말한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라.”(p.126) 내 생각과 내 상처 때문에 내 분노라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영적 해방의 엑셀레이터를 밟을 것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저자는 한 가지의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로 영적 해방을 선포한다. 이 땅에서 내가 당하는 그 어떤 비극보다, 통보다, 예수님은 크시고 선하심을 말이다. 그러므로 시험이 와도 괜찮다. 예수께서 크시기 때문이다. 노블은 책을 마감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합력함이 또한 영적인 해방을 맛보게 해주는 또 다른 요소임을 천명하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 혼자 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 ‘반드시’ 함께 가는 공동체가 될 것을 희망한다. 오늘 우리들의 교회는 문젯거리 투성이의 교회이지만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비전과 희망이 싹트며 또 하나님은 그 교회를 당신이 일하시는 도구로 삼으시기에 함께 서로 반드시 가는 진정한 공동체로 교회를 만들어 갈 것을 당부한다. 그의 희망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온갖 추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여기신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세상 변화의 주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그 분의 계획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면서 내 아내를 추하다고 말한다면 나와 친해지길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 마음을 접는 것이 좋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경멸하는 것이 곧 그 분의 신부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주님과의 관계가 좋아질 수 없다.”(p.197.) "내가 발견한 최고의 가드레일은 믿음 안에서 사귄 사람들이다."(p.202) 서평을 마무리하면서 구분하는 것에 익숙해서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음을 용서하시라. 진보적인 색깔이 있는 독자들은 페리 노블을 미국 대형교회에서 사역하는 보수적 테두리에서 허덕이고 있는 기득권에 노출된 목사로 몰아붙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반면 보수적인 계통의 독자들은 반면 상당 많이 공감할 것으로 사려 된다. 서평자는 글 독서 후에 또 이렇게 양분될 것에 대하여 염려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소망이 있다. 교회에 대한 희망이다. 이번에 방문한 프란체스코라는 교황으로 인해 또 수없이 많은 개신교인들의 가톨릭으로의 엑소더스를 눈으로 보아야하는 개신교 목사로서 현실은 현실이지만 내가 섬기는 교회에 대한 희망 즉 선 언급한 대로 “온갖 추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여기신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세상 변화의 주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그 분의 계획”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남겨두고 싶다. 그래서 서평자인 나부터 진정성이 있는 ‘unleash’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사족 하나 “미국 목사에게 동양적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였다. 가끔은 버터 냄새가 날 때가 있어 거부감이 드는 경우도 있기에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노블은 이런 기우를 날려 보냈다. 아이러니인지는 모르겠지만 복음의 진수에서 멀어 보이는 것 같은데 복음의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맹공법이 그의 글 속에 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위로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영적 난제들을 현실로 풀어가는 대안이 보인다. 이런 이유로 뜻밖의 감동이 있다. 미국 대형교회의 상당수 담임목사가 갖고 있는 뒤틀린 복음이 아니라 복음의 정공법을 느끼면서 나름 동의하는 공부를 했다. 함께 공유할 분모들이 여기저기에 있다. 나누면 좋겠다.” 2014년 6월 25일 오후 3시 17분 동족상잔 64주년 비극일에 기도동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