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열 두 예언자의 영성2024-06-10 15:22
작성자 Level 10

72b95d3fe5b2e4aab6868b7e9668e6eb.png

 

 

ㆍ지은이 차준희
ㆍ출판사 새물결플러스
ㆍ작성일 2014-08-30 21:12:30

 

 

차준희 교수의 ‘열 두 예언자의 영성’을 읽고

사사기 연속 시리즈 설교를 하는 89번째 내일 8월 31일 주일 낮 설교의 제목을 이렇게 정했다.
“삶의 밑줄을 치십시다.”
서평을 쓰고 있는 이 책의 아모스 챕터에 나오는 저자의 멘트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먼저 저자는 서평자를 지지해 주는 친구이기에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아, 물론 퍼온 글임을 분명히 밝혔으니 설교 도둑질이라고 공격하지는 마시기를.
아모스 5:21-24절은 아모스의 총 주제절이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서평자는 이 구절을 주일 설교에 성경적 내증으로 인용하면서 현장 목회의 치열한 장에서는 조금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유진 피터슨의 번역으로 내용을 설명하기로 했다.
“나는 너희 종교 행사들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너희 집회와 성회는 이제는 신물이 난다. 너희들이 벌이고 있는 종교적인 프로젝트들, 너희들이 내거는 허영에 찬 슬로간과 목표에 진절머리가 난다. 너희의 기금 모금 계획, 홍보 활동과 이미지 연출도 지긋지긋하다. 너희의 자아를 만족시키는 시끄러운 음악들은 나는 이제 들을 만큼 들었다. 너희가 나를 향해 노래한 적이 언제더냐?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내가 바라는 것은 정의다. 큰 바다와 같은 정의! 내가 바라는 것은 공평이다. 강 같은 공평! 이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것, 내가 바라는 전부다.” (유진 피터슨의 역사서 메시지에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로 서평자는 아모스 유진의 5:21-24절의 재해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차준희 교수는 한국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골수 보수주의적인 교단 신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는 목이 걸려 있는 자이기에 본문 해석을 다음과 같이 갈파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그는 아모스 5장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그 교단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모든 교단에서 목회를 하는 현장 목회자들을 향해 이렇게 쓴 소리를 했다. 분명히 그의 목소리는 쓴 소리인데 가슴을 저리게 하는 사자후로 서평자에게는 들린다.
“오늘의 교회는 죄를 씻는 곳이 아니라 도리어 죄를 더하는 장소가 된 것은 아닌가? 오늘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가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닌가? (중략) 그리하여 당신을 향한 예배를 도리어 괴로워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을 고문하는 자리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독설을 서슴지 않은 저자는 아모스서를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가슴으로 받아야하는 촌철살인을 이렇게 날렸다.
“경건과 불경건을 가르고 결정짓는 것은 신자의 예배 자리가 아니라 일상의 자리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이 삶이 예배이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는 아모스를 마감하는 마무리 기도를 이렇게 적었다.
“예배와 삶이 하나가 되기를. 우리의 삶이 정의와 공의로 가득 채워지기를. 우리의 삶과 교회가 공동체 의식으로 충만해지기를. 성경에만 밑줄 치지 말고 삶에도 밑줄 치는 사람이 되기를.”
서평자는 가슴을 때렸다. 나에게 주는 경종처럼 들려서. 해서 좋은 책을 발간한 저자에게 빚 갚는 심정으로 내일 주일 설교 제목을 이렇게 정했다.
‘삶에 밑줄을 치십시다.’
저자의 이런 색깔의 표현은 이 책에 부분 부분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표현의 방식은 조금씩 달라도 목표하고 있는 예언자들의 영성에서 귀결되는 답은 거의 엇비슷함을.
호세아ㄹ르 보자. 6장의 연구를 통해서 저자는 ‘하나님 알기’(다아트 엘로힘)과 ‘인간적 도리’(헤세드의 저자식 해석)를 평행선에 둔다. 파격이다. 저자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배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아는 것임을 확신하는 저자의 신학에 기반 한다. 그러기에 호세아의 영성에 찾아야 하는 교훈은 상식이 예배보다 우선이라는 듣기에 따라 목을 내놓아야 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의 도전이 참 매력적이다. 요엘을 말해보자. 서평자는 설교 때마다 돌직구를 날려 섬기는 교회의 교우들은 이미 세뇌가 될 정도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인위적 성령의 만듦이라는 참담함은 질 나쁜 죄악이라는 고집이다.
한국 교회는 참 신묘막측한 것이 많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성령의 은사를 만들어 주는 곳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해서 가면 꼭 성령을 만나게 해 주는 기도원과 부흥회가 성업 중이다. 분노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이다. 인위적인 성령 만들기로 인하여 한국교회의 지체들을 아주 값싼 은혜를 사모하는 특수한 집단으로 만들어 버린 질 나쁜 행위들이다. 저자는 요엘서를 통해 ‘하나님의 영의 민주화’를 선포한다. 특정한 종교적인 행위를 통하여 받는 성령이 아니라 성령께서는 차별 없이 인격적으로 임하시는 모두의 영이심을 각인시킨다. 동시에 차별 없이 인격적으로 누구에게나 임하는 성령을 받은 존재라면 반드시 모든 이를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임을 또한 역설한다. 그러기에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지갑을 열어 세상을 품을 것을 고지한다. 거칠게 공감하고 싶은 대목이다.
마틴 부버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창문을 통해서 응시하는 무신론자가 자기가 만든 거짓된 하나님 상에 사로잡힌 신앙인보다 하나님에게 더 접근해 있다.”고.
요엘의 영성을 통해 재해석된 하나님의 영의 민주화 선포가 한국교회에 수많이 존재하는 표면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경성이 들려지기를 기대한다.
오바댜의 짧은 글에서 저자는 신앙의 경주에서 홀로 멀리 서 있는 방관자를 독설한다. 방관은 신학적으로 stand with 가 아니라 stand by 의 이기적인 독단임을 고발한다. 이런 면에서 교회 공동체가 왜 코이노니아 공동체가 되어야함을 저자와는 다른 방식의 도전을 받아 보았다.
서평자는 작년 특별 새벽기도회에 설교 텍스트를 요나서 잡았다. 그리고 요나에 대한 메시지의 총 방향성을 12만 명의 믿지 않는 제천의 아담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는 것으로 사역을 감당했던 기억이 있다. 현장 목회자는 어쩔 수 없는 시급성이 전도인데 반하여 저자는 ‘요나 신드롬’ 에 두었다. 자기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진리와 정의를 앞세워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신앙 행태인 요나 신드롬 말이다. 신학교 교수의 스펙트럼과 현장 목회자의 스펙트럼이 조화를 맺으면 환상적인 요나서의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서평자는 2년 전에 아주 소박한 예배당을 건축했다. 마침 저자가 섬기는 교회 말씀 사경회 강사로 섬기게 되었을 때 저자는 성전 건축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예배당 건축을 앞두고 있는 친구 교회에 와서 고춧가루를 뿌린 셈이다. 그러나 참 감사했던 것은 교우들이 저자의 메시지를 의미 있게 들어 함께 은혜를 공유했다는 점이다. 해서 당시의 은혜를 기초로 서평자의 교회 공동체는 성전이 아닌 예배당을 하나님께 드리는 감격을 맛보게 되었다. 아이러니처럼 느껴지는 대목이지만 간증이다. 서평자의 교회는 미가의 메시지를 가슴에 담고 있다.
 “비글랄켐이 아니라 비글랄레누의 변화를 사모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서평을 여기에서 닫는다. 다 쓰려고 하니까 꾀가 나기 때문이다. 아니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나머지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으시라. 정말로 손해 보지 않고 수지맞는 장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잘 써서 보너스 상도 받으시라.
저자는 한국교회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교수요 목회자이다.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서평자는 그의 진솔하게 고민하며 깊은 성찰을 토대로 공개되는 귀한 글들로 인하여 날마다 배운다. 그를 통하여 계속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무너져 가는 한국교회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은 친구의 건강을 위해 개인적으로 엎드릴 때마다 중보 한다. 12 예언자의 영성을 통래 독자들의 영성도 깊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사족 하나)

목회 현장과 신학교의 현장에는 생각보다 큰 괴리가 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그 이유는 서로의 상황 이해에 대한 소통이 부족한 데에서 오는 것이리라. 해서 어떤 경우에는 신학교 교수는 목회자들을 몰아치고, 목회 현장에 있는 목사들은 교수들에게 실정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볼멘소리를 던진다. 상황이 이런 차에 차준희 박사가 현장 목회자들에게 갭을 줄여주는 적지 않은 기여를 이 책에서 제공했다. 구약 소 예언서 설교를 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강단의 유약함을 한 편으로 보강해 주는 역할을 해 줌으로 보기 좋게 두 사이의 좋지 않음을 upside down 해 주었다. 친구의 수고와 노력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한 권의 책을 통하여 나 또한 소 예언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시대의 통찰을 혜안을 값진 추석 보너스 선물로 받았다. 감사하다.

2014년 8월 30일 오후 5시 50분. 서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