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정호승 |
---|
ㆍ출판사 | 해냄 |
---|
ㆍ작성일 | 2014-09-05 11:35:06 |
---|
정호승 작가의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를 읽고 (해냄, 2014년) 남아공 헌법 재판소장을 역임한 알비 삭스는 아프리카의 정신을 ‘우분투’ 정신이라고 했다. I AM BECAUSE YOU ARE. 의 정신이리라. 작가는 이 책에서 이 주제에 천착하며 글을 써내려갔다. 그래서 그런지 내내 너무 따뜻했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자, 자연과학을 전공한 자가 아니라 인문과학 - 나는 이 대목에서 인문이라는 말에 과학이라는 첨가어를 붙여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못마땅하게 여긴다. - 을 공부한 사람으로 쓴 글들이 왜 감히 다른 학문을 접한 자들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를 다시 한 번 통쾌하게 맛보았다. 저자는 글 속에서 그가 만났던 모든 삶의 정황들을 하나도 무관심하게 보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것에서 배움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아주 올바른 학생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서평자는 그에게 또 배운다는 점이다. 그가 먼저 경험한 배움들을 말이다. 나는 그래서 또 바른 생활을 해 나아가는 학생이 되고 말았다.(ㅎㅎ) 물론, 긍정의 의미이다. 더군다나 목사인 나는 가톨릭 평신도(사실은 이 단어를 별로 쓰고 싶지 않지만 대체할 만한 단어를 아직 찾지 못해 한시적으로 사용함)인 저자에게 심지어 영적인 것까지도 많이 배웠다. 배움에는 신분, 서열, 직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배우면 되었지. 지금부터 그의 따뜻한 그래서 내가 배운 그들을 나누기로 한다. 책에서 나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쉬운 글들을 소개한다. 이유는 그냥 글에 대한 맛깔스러운 비평이나 서평보다도 이 책은 그냥 나누기만 해도 행복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기에 그냥 서평자의 글을 보기만 해도 따뜻해 질 것을 확신한다. 1부 톨스토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서평자는 톨스토이의 이 지적에 대하여 공감한다. 그렇다면 내가 함께 해야 할 곁에 있어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가난한 자들임을 저자는 피력한다. 그가 소개한 감동의 글 몇 가지, 요셉 의원의 원장인 선우 경식원장은 말했다 “가난한 환자들은 신이 내려주신 선물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의 진실에서 우러나온 미소여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달나라에까지 가겠다.”고 한 마더 테레사 수려를 잊고 살았고, 세계 곳곳에 엠마우스 공동체를 설립해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마련해 준 프랑스의 피에르 신부를 잊고 살았다. 청십자 병원을 설립해 가난한 환자를 진료하는 일에만 일생을 바친 장기려 박사도, 성 나자로 마을 원장으로 평생 한센인을 위해 살다 간 이경재 신부도 잊고 말았다. 그리고 최근 우리 곁을 떠나면서 “고맙다”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도, “이슬 한 방울조차 버리는 연꽃잎처럼 살라”고 하신, 다비의 과정에서도 무소유의 정신을 철저하게 보여주신 법정 스님의 귀한 목소리도 이젠 잊었다. 서평자는 이들의 말을 그냥 말로 새길까봐 염려된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하신 뒤 그 말을 듣고 있는 율법교사들에게 던지셨던 말이 살아 움직였으면 좋겠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저자는 그의 경험을 담는다. 장애우들 10명을 데리고 백두산 등정을 앞둔 백경학씨의 말을 “우린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게 중요해. 그게 우리가 백두산을 찾은 까닭이야. 많은 사람들이 혼자 먼저 올라가려고 하니까 다들 살기가 힘든 거야.” 아멘했다. 동화작가 정채봉 씨가 천지를 보고 쓴 시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를 떠올렸다. “아!/ 이렇게 웅장한 산도/ 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백두산 천지가 눈물샘이란다. 동화를 쓰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감성이 스마트 귀신에 사로잡힌 이 시대를 울리는 경종이 되기를. “그때 문득 봄이 오면 왜 꽃샘바람이 꼭 불어오는지, 나뭇가지가 왜 바람에 잔잔하게 부러져 거리에 나뒹구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까치와 같은 작은 새들로 하여금 집을 지을 때 그런 나뭇가지로 지으라고 그런 거였다. 만일 꽃샘바람이 불어오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 부러지지 않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또 떨어진 나뭇가지가 마냥 크고 굵기만 한다면 새들이 그 연약한 부리로 어떻게 나뭇가지를 옮길 수 있겠는가?”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지은 집은 강한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겠지만, 바람이 불지 않은 날 지은 집은 약한 바람에도 허물어져버릴 것이다.” 성경 말씀에 버금가지 않는가? “인간들은 그런 까치집을 송두리째 파괴해 버린다. 언젠가 화가 이종상 선생께서 까치집이 있는 나무가 뿌리째 뽑혀 이삿짐 트럭에 실려 가는 풍경을 그린 <이사>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나무는 뿌리 부분을 트럭 위쪽으로 걸쳐 놓고 길게 누워 있었는데, 아래쪽 나뭇가지엔 까치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트럭은 숨차게 달려가고 있었고, 그 뒤를 까치 두 마리가 힘겹게 따라가고 있었다.” 얼마나 나를 초라하게 하는 가르침인가? 계속해서 저자의 노래를 들어보자. “올 봄에 나는 본질과 현상이 전도되고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는 삶의 태도를 버리는 데서 봄의 의미를 찾는다. 봄이 왔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지, 꽃이 피기 때문에 봄이 온 것은 결코 아니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 세계 불교계의 큰스님으로 존경받는 틱낫한 스님은 “한 송이 꽃은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꽃이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의 존재 또한 그가 만일 진정한 인간이라면 온 세상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꽃은 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게 아니라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꽃은 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내가 사는 아파트엔 봄날에 가장 먼저 산수유가 피는데, 그 연노란 산수유도 꽃이 져야 붉은 열매가 익어 겨울엔 새들의 먹이가 될 수 있다.” “논어』에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이 있다. 그림은 흰 바탕이 있음으로써 그 위에 그릴 수 있다는 의미로, 본질적 갖춤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주막에 대한 일화] p.38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가르침을 그는 인용한다.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 말라. 부르는 대로 주고 사면 희망과 건강을 선물하는 것이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오는데 70년이 걸렸다.” 우리도 새기자. 박완서 선생께서 아들을 읽고 난 뒤에 기자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는 그러한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하고 묻자, 선생께서는 “그것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누구든 고통 없는 삶은 없다. 그러나 어떻게 참고 견디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을 뿐, 고통은 그 의미를 찾는 순간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어린 자식을 잃고 비탄에 잠긴 젊은 부부에게 한 현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지금 당신들이 겪고 있는 일은 마치 끓는 물속에 던져진 것과 같습니다. 만일 당신들이 계란이라면 끓는 물속에서 더욱 단단해지고 차차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게 되겠지요. 하지만 당신들이 감자라면 끓는 물속에서 더욱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지면서 탄력이 생기겠지요. 당신들은 어느 쪽이고 싶습니까?”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어거스틴의 말씀도 나 자신의 선택에 의해 고통의 의미를 찾았을 때 성립될 수 있는 말이다. “돌아올 거라 믿지 않으면 살 수 없어 오늘도 기다린다.”는, “이사를 가면서도 숨진 아들이 찾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했다”는 데서 박완서 선생님의 고통을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또 다른 가르침이다. “향수 원료인 용연향은 원래 고래의 상처에서 발생된 부산물이다. 향유고래가 대왕오징어 등을 섭취하다가 내장에 생긴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토해내면 역한 냄새가 난다. 그렇지만 그 배설물은 10년 이상 바다를 떠돌면서 염분에 씻기고 햇볕에 바짝 말라 아주 귀한 향수의 원료가 된다. 처음엔 비록 상처의 똥이었지만 오랜 세월 인고의 시간을 견딤으로써 고통의 향기를 지니게 된 것이다. 아마 고래의 똥은 자신이 왜 험한 바다를 떠도는지 그 고통의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내 인생이라는 쌀에 고통이라는 돌이 더 많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어떠한 존재든 고통 없는 존재는 없다. 그렇다고 고통만 있는 존재는 없다. 아무리 쌀에 돌이 많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쌀보다 돌이 더 많을 수는 없다.” “그렇다. 고통은 인간적인 것이다. 고통이 없으면 누구나 인간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어떤 선인장은 10년 만에 꽃을 피우기도 한다. 모든 꽃은 밤이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아침에 아름답게 피어나기 위하여 고통스러운 밤을 참고 견딘다. 신영복 선생께서는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내가 고통을 겪을 만한 가치조차 없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라고 했다. 사순절 예수 수난극을 관람한 한 부부의 이야기- 배우가 사용했던 십자가 소품을 들고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속이 텅 빈 것인 줄 알았는데 그 무게에 놀라자 배우가 말했다. “만일 무거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그 역을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의 이런 갈파들이 목회 현장에서 치열하게 사역하는 서평자에게 힘이 된다. 2007년에 말기암으로 6개월 시한부 삶을 살면서도 <마지막 강연>이라는 동영상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던진 미국의 랜디 포시 교수는 인생의 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벽이 있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벽은 우리가 무언가를 얼마나 진정으로 원하는지 가르쳐준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지 않는 사람은 그 앞에 멈춰서라는 뜻으로 벽이 있는 것이다.” 문 없는 벽은 없다. 모든 벽은 문이다. 이제는 감사로 주제를 넘어가 보자.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자의 시 햇살에게 중에서) 제 2부 “인생은 마라톤 경주가 아니다. 인생은 주어진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면서 음미하는 여행이다. 내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와 속도가 아니라 경로와 과정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시간은 절대적이지 상대적인 것은 아니다. 시간은 어쩌면 신의 또 다른 얼굴인지도 모른다.” 존재가 없으면 선물도 없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의 저자 스펜서 존슨은 2010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언제 행복해질까? 무심히 흘려보낸 오늘에 열쇠가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소중한 선물”이라고 말한다. 내 어머니는 나로 하여금 신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주신 존재다. 신의 사랑과 가장 닮은 사랑이 바로 내 어머니의 사랑이다. 모성은 관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신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성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나는 가끔 아내한테서 ‘지나친 효자’라는 말을 듣는다. 그럴 때마다 그 말이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데에 지나침이 없듯이 나 또한 어머니를 사랑하는 데에 지나침이란 있을 수 없다. 나는 아내가 그런 말을 하면 이런 말을 한다. “어머니를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가 어떻게 아내를 사랑할 수 있느냐”고. 그러면 아내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건 그래요.” 아마 우리가 신을 사랑하는 일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삼등은 괜찮지만 삼류는 안 된다.”(p.120) 가슴에 담는다. “현생에 개나 돼지 같은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가치다. 성공한 삶을 살기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아라.” “인생에는 실패가 없다.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과정일 뿐이다. 과정을 실패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할 뿐이다. 작은 실패의 냇물이 모여 큰 성공의 강물이 흐른다. 따라서 아무리 쓴맛을 맛보더라도 참고 견딜 줄 알아야 한다.” “자연 상태에 있는 금붕어는 일평생 약 1만여 개의 알을 낳는 데 비해 어항 속의 금붕어는 3천이나 4천여 개의 알밖에 낳지 못한다. 아무런 위험도 없이 적당한 온도와 먹이를 공급받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것은 어항이 고통이라는 자연법칙의 진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을 수반하는 삶이 자연의 삶이므로 어항 속의 금붕어는 삶의 실재를 잃어버린 것이다.” “또 신은 가끔 인간에게 빵 대신 돌멩이를 던진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 돌을 원망하며 걷어차 버리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고, 또 어떤 이는 그 돌을 주춧돌로 삼아 집을 짓는다고 한다. 나는 신이 관심을 갖는 인간이 되고 싶다. 신이 던진 돌멩이로 빵을 만들어 먹는 인간이 되고 싶다. 쓴맛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설탕 맛을 모르므로 오늘의 쓴 맛을 내일의 단맛으로 만들고 싶다.” “사람은 희망을 잃을 때 자살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바로 희망을 잃는 것이라고 한다.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그의 환갑 기념 심포지엄에서 “내가 이룬 업적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저자는 전문적인 영역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독일 속담에 ‘여덟 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은 식구 한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한 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은 여덟 식구를 보살핀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내가 잘하는 한 가지 전문성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쇠는 불에 넣어봐야 알고, 사람은 이익을 앞에 놓고 취하는 태도를 보면 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원고지 위에서 죽고 싶다.” 요즘 아이들은 독서 세대가 아니다. 게임 세대이며 영상 세대다. 스마트폰 세대이며 인터넷 세대다. 자연히 책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읽을 책이 없어서 독서환경이 나쁜 게 아니라 책 외에 다른 매체가 많아서 오히려 열악하다. 독서가 상상력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면 영상은 바로 직접 보여줌으로써 상상력을 제한시키는데도 영상 위주의 삶을 즐긴다. 얼마 전, 전남 광주 무등 중학교에서는 한 담임교사(국어과 교사가 아니라 사회과 교사라고 한다)가 지각생에게 체벌 대신 시를 한 편씩 외게 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체벌」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기사가 나기도 했는데 학생들이 시를 외기 싫어서 지각생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 학급에 지각생이 자꾸 줄어들까 봐 걱정이다. 지각생이 없으면 그렇게라도 시를 외울 기회가 없어지니까! ‘천지는 하느님이 쓴 시다!’ 저자가 얼마큼 문학에 미쳐 있는가를 보여주는 전문성의 강조를 엿보게 한다. 제 3부 “미국 서남부 지역엔 밑동의 지름이 10미터인 데다 키가 90미터 이상 똑바로 자라면서도 뿌리가 2, 3미터밖에 되지 않는 레드우드라는 삼나무가 있다. 이 거목은 체구에 비해 뿌리가 연약하지만 낙뢰에 불타는 일은 있어도 태풍에 쓰러지는 일은 거의 없다. 뿌리가 땅 밑으로 깊게 뻗진 못하지만 옆으로 25미터 이상 뻗어 한 뿌리에 여러 그루의 나무가 자라기 때문이다.” “어린 벼들은 곧 가뭄과 태풍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계속 햇볕만 내리 쪼이면 벼들은 곧 가뭄의 고통을 당할 것이고,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면 곧 태풍의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나 벼들에게 그런 고통은 당연하다. 고난 없이 자라는 벼들은 없다. 가뭄에 목마르지 않는 벼가 없고, 태풍에 쓰러지지 않는 벼가 없다.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벼 포기도, 태풍에 쓰러져 있다가도 포기끼리 묶어주면 서로 기대어 일어나는 벼포기도 실은 당신과 나의 삶을 닮았다.” 달라이 라마는 “아무리 해결책을 발견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그 고통에 맞서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한다. “키 작은 쥐똥나무나 풀잎들은 언제 태풍이 불어왔느냐는 듯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태풍에는 자신을 낮추고 굽힐 줄 아는 나무만이 살아남는다. 보란 듯이 자신을 과시하는 나무는 쓰러진다. 나 또한 인간이라는 한 그루 나무다. ‘항상 날씨가 좋으면 곧 사막이 되어버린다’는 스페인 속담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햇빛만 원한다면 인생은 이런 사막이 되고 만다. 때로는 고통의 비바람이라 할지라도 불어와야 하고 절망의 눈보라라 할지도 몰아쳐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대지에서 자란 나무가 숲을 이루고 그 숲의 그늘에 앉아 새들과 함께 내가 쉬었다 갈 수 있다. 계속 햇빛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삶의 그늘을 소멸시켜 버리는 죽음의 햇빛을 원하는 일이다.” “언젠가 읽은, 큰아들의 장례식과 작은아들의 결혼식을 하루에 동시에 치른 부부가 그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그늘을 인내와 순응의 그늘로 만들어간 이야기는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내게 하나님은 오늘을 무사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부탁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하나님, 마음껏 분노하고 욕하고 원망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일 뿐이었다. 내게 필요하고 유리하도록 하나님을 내 삶의 요소요소에 꼭 필요한 어떤 장치처럼 도구화해 놓고 있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의 무엇을 위해 기도하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자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기보다 나 자신의 물질을 위해 기도할 때가 많다. 버려야 할 것과 비워야 할 것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욕구의 획득과 완성을 위해 기도할 때가 많다. 내가 가닿아야 할 침묵과 고요와 잃지 않아야 할 미소와 포옹을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이 시대의 무질서와 폭력과 분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기도할 때가 많다. 결국 나의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한 소유와 탐욕의 기도일 뿐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길이다.” 저자는 전술했듯이 가톨릭 신자이다. 나는 가톨릭 신자에게서 이 만한 영성을 만나보지 못했다. “어느 날 내셔날 지오그래픽 기자 두 명이 쓴 책 『지혜는 어떻게 오는가』에서 인디언의 영적 스승 매튜 킹이 “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그 또한 기도”라고 한 말을 읽고 감동을 받아 무릎을 꿇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나님께 하는 게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에 고요히 귀 기울이는 게 바로 기도구나!’ 한국외방선교회 선교사제인 최강 신부께서는 수필집 『나는 넘버쓰리가 두렵다』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언어를 접어야 한다”고 말한다. “침묵이 바로 하나님과의 대화를 위한 가장 첫걸음이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우선 하나님을 향해 앉아 있으라. 그렇게 앉아만 있어도 당신은 서서히 변화되는 당신의 삶을 체험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깊은 데’란 어디일까. 거짓과 비리, 불법과 기만이 있는 데가 아니라 진실과 화해, 사랑과 용서가 있는 데가 아닐까. 가을을 맞아 내 삶의 갈릴리 호수 그 깊은 데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가톨릭에서도 ‘십자가 성 요한’ 성인은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등산할 때 왜 위를 올려다보며 걷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정상에 오른다고 생각하면 산을 오르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목적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성공을 목적으로 삼으면 인생이 공허해진다. 실제로 은메달을 딴 선수보다 동메달을 딴 선수들이 더 기뻐한다고 한다. 은메달 수상자들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금메달을 딸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동메달 수상자들은 만일 조금만 실수했더라면 아예 수상도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천 년 이상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으려면 천 년 된 노송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나무로 건물을 짓는다면 모름지기 천년은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궁목수로서 그 나무에게 면목이 서는 일이다”라고 후손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인생의 자세는 견딤의 자세이고 인생의 힘 또한 견딤의 힘이다. 내 인생에 인내의 힘이 있다면 그건 다 군에서 배운 것이다. 군 생활이 힘들다고 해서 다들 견디지 못한다면 누가 분단된 이 불행한 조국을 지킬 수 있겠는가. ‘가다가 넘어지면 바로 그곳에 내가 찾는 보물이 있다’고 한다. 읽다가 숙연해 진 대목이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 말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가 죽기 직전에 한 말이다. 저자는 아들과의 관계를 이렇게 표햇다. “부모는 활이고 자식은 화살이라고 했다. 화살은 활이 많이 휘면 휠수록 멀리 날아간다. 멀리 날아간 화살일수록 역으로 그 화살을 날려 보낸 활은 많이 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의 허리가 휘면 휠수록 자식은 그만큼 멀리 날아간다. 활은 휘어질수록 고통이 심하지만 오직 화살을 멀리 날려 보내기 위해 그 고통을 참고 견딘다.” 목사로서 영적인 자존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음의 글을 통해 살폈다. ‘빛과 영혼의 화가’로 일컬어지는 렘브란트는 초상화 의뢰를 받으면 의뢰자의 요구와 의도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의 의도대로 그렸다. 그래서 “렘브란트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려면 그 앞에서 2, 3개월은 앉아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초상화를 주문하는 이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기도 했다. 생활비가 필요한 현실적 어려움 가운데서도 화가로서의 자존심과 작품성을 지키려고 노력한 렘브란트의 이러한 태도는 시대를 초월하여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내게 늘 귀감이 되었다.“ 이제 몇일 후면 추석이다. 자연을 보는 작가의 감성을 보자. “한가위는 어머니다. 한가위는 늘 어머니의 마음을 지니고 찾아온다. 한가위 보름달은 초승달과 반달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뎌왔다. 나도 저 달을 통해 보름달이 되기까지의 인내와 기다림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름달과 같은 눈을 지니고 나와 이 시대의 가난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제 4부 “눈을 감으면 비로소 남이 보인다. 내가 보인다 하더라도 남을 위한 존재인 내가 보인다. 그동안 나는 나를 위해 항상 눈을 뜨고 다녔다.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는 다 나를 위한 존재였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이기적인 삶인가. 지난여름엔 매미가 너무 시끄럽게 운다고도 싫어하지 않았는가. 매미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인데 나는 매미만큼이라도 열심히 산 적이 있었던가?” 정말로 감동이 되는 작가의 촌철살인이다. “슬픔은 절대로 극복할 수 없어요. 이길 수도 없어요.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이겨요? 눈물을 흘리면 이길 수 있어요? 그건 극복이 아니죠. 극복이란 말은 강요의 성격을 띠니까요. 그것은 슬픔에 잠긴 사람을 더 힘들게 하는 거예요.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기억을 잊어야 하는데, 내가 그 기억을 잊어버리면 우리 애는 이 세상에 안 태어난 것과 마찬가질 수 있잖아요. 기억을 지우고, 극복하는 일은 참 잔인한 일이에요.” (박완서)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슬픔 속에 성지(聖地)가 있다’고 했다. 슬픔을 견딘다는 것은 내 영혼의 등불을 켜기 위해 꼭 필요한 기름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치 수용소에서 발견된 낙서 중에는 이런 낙서가 있다고 한다. “하루하루가 아무리 힘들고 끔찍해도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닌 내일 슬퍼하겠다.” “침엽수는 겨울이 되어도 잎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폭설이 내리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만다. 그러나 활엽수는 그렇지 않다. 겨울을 맞이하면서 나뭇가지마다 잎을 다 떨어뜨려 쌓인 눈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낸다. 첫눈이 오지 않는 겨울은 불행하다. 그러나 첫눈이 오지 않는 겨울은 없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법정 스님께서는 ‘종이 깨어져서 종소리가 깨어져도 종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 선조들은 종 밑에 항아리를 묻었다. 지금도 영주 부석사와 남해 금산 보리암에 가보면 범종 밑에 항아리가 묻혀 있다. 그 항아리는 제 몸을 통과하는 고통의 종소리를 맑고 아름답게 여과시키는 음관의 역할을 한다.” ‘육체는 슬프다!’ “시인 말라르메의 이 시구가 늙은 부모의 허물어진 육체를 볼 때마다 가슴을 때린다.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존재는 어머니다. 올 한 해도 늙은 부모의 사랑으로 내 인생은 이루어졌다. 미국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는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소망한다는 의미로 앙상하게 죽은 나무를 성탄절 크리스마스트리로 세워놓는다고 한다. 내 부모님도 죽은 나무로 만든 크리스마스트리와 마찬가지지만 이제 곧 새로운 생명과 사랑을 싹 틔울 것이다.” “노력하는 자의 아름다움을 보자. 나도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 수없이 고쳐 쓴다. 한 작품당 평균 서른 번 내지 마흔 번 이상은 고쳐 쓴다. 어떤 작품은 10년이 걸려 완성한 것도 있다. 조지훈 시인은 「승무(僧舞)」를 쓸 때 3년이나 절을 찾아다니면서 직접 승무를 보고 썻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까지 시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시를 쓰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뿐이다.” “법정 스님께서 산문집 『버리고 떠나기』에서 “기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후의 자기 자신”이라고 말씀하신 까닭을 기도하는 아버지의 손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버지한테 야단맞을 일이 수없이 많았지만 주먹이 된 아버지의 손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손은 항상 내 손을 잡기 위해, 나를 쓰다듬어주기 위해 존재했을 뿐이다. 아버지의 손은 언제나 아들의 손이 되어주었고, 아들이 필요로 할 때마다 아들의 고단한 인생의 손이 되어주었는데 정작 아들인 나는 그러지 못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게 인생의 고비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스티브 잡스의 말을 떠올리며 “이제 주변 정리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마치 의사처럼 내가 내게 말할 것이다. 나라의 뿌리는 백성이고, 정치의 뿌리도 국민이며, 사랑의 뿌리 또한 서로 껴안고 하나가 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신 게 아닐까. “이 길은 뿌리이 길이야.” 원래 금은 돌밭에 버려져도 그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금이 돌밭에 버려진 자신을 돌멩이로 생각하면 그만 본질을 잃게 된다. 뿌리가 지상으로 솟아나오면 나무는 살아남지 못한다. 나무뿌리는 혼자 있으면 거칠 데 없이 뻗어 나가느라 직선이 되기 쉽지만, 함께 있으면 다른 뿌리와 어울리기 위해 자연히 곡선의 아름다움을 지닌다. 미국 전 상원의원 패트릭 모이니헌이 말한 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자기의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자기만의 사실’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전북 익산시 장중마을에 있는 한 그루 은행나무를 생각해 본다. 수령 300년 된 이 나무 중간 부분에는 대나무 10여 그루와 30년 된 보리수나무가 담쟁이와 함께 무성하게 자란다. 봄부터 가을까지 이들이 형형색색 한데 한 몸이 되어 어울린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우리도 이들처럼 대한민국이라는 나무 안에서 한 몸을 이루며 아름답게 살아가야 한다. 19대 국회의원이 된 도종환 시인의 의원회관으로 ‘근조’ 리본이 달린 화분이 전달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잡지에 그가 쓴 글에서 읽고 나는 이 ‘물 새는 물동이’ 우화가 떠올랐다. 그의 글에 따르면 “평소 가까이 지내던 분이 내가 국회에 들어와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땅에 아까운 시인 하나 죽었다’라며 흰 천에 검은 글씨로 ‘근조’라고 쓴 화분을 보냈다”고 한다. “요절한 왼손잡이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는 “왼손이 심장과 가까우니까 악수는 왼손으로 하자”고 말했다. 악수는 오른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되지만 왼손으로 해도 그 가치가 손상되지 않는다. 평균적 가치관이 세상을 유지시킬 수는 있지만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물새는 물동이가 세상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 때야말로 연을 날기에 가장 좋은 때다’라는 말이 있다. 일본 파나소닉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한 말이다. 열한 살 때 점원 생활을 시작해 파나소닉을 설립하고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낸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반드시 길은 있다, 제대로 연을 날리기 위해서는 오리혀 강한 바람이 불어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쥬라기공원> 등의 영화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떤 새로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가슴을 떨리게 한다. 문 밖을 나와 천천히 새해의 눈길을 걷는다. 눈길 위로 두 사람이 걸어간 발자국이 나 있다. 발자국이 나란히 일정한 폭으로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국이다. 고요히 그 발자국을 따라가 본다. 발자국끼리 중간 중간에 잠시 포개져 있는 부분이 보인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선 채로 잠시 서로 껴안고 키스를 나누면서 생긴 발자국이다.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어느 농부가 해마다 정원 한구석에 잡초처럼 피어나는 민들레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그러자 한 현자가 “어떻게 하면 민들레를 뽑아버릴까 하고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민들레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이랬으면 좋겠다. 정호승씨의 글이 산문이기에 서평자가 읽으며 감동이 되었던 부분들을 무작위로 발췌하여 소개하였다. 시대가 하수선하다. 그래서 무섭다. 무서운 시대, 목사가 아닌 작가의 글을 통해 그 두려움과 무서움이 어느 정도 힐링이 된다. 조금 더 과격하게 말하면 영혼의 청소가 된다. 9월을 시작하면서 시인이 쓴 산문과 함께 여행하면 천고마비는 물론 우리들의 영혼도 살찌우게 될 것을 확신한다. 사족 하나) 인문학의 퇴조는 인간학 전체의 멸망이다. 그 중에서도 문학의 천대와 멸시는 서곡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위에 말한 일침을 실감했다. 사람은 생각하며 성찰할 때 아름다워진다. 생각이 마비된 시대, 정호승 작가는 나에게 사색하게 했다. 그래서 행복했다. 2014, 8월 30일 오후 10시 20분 서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