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박노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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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느린 걸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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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10-01 16:4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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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 걸음, 2010년)를 읽고 제 블로그에 댓글이 하나 올라와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박노해 시집 출판하는 '느린 걸음'출판사입니다. 올려주신 서평에 저도 다시금 '다른 길'을 들추어보게 되었네요. 이 책에 담은 저희의 마음만큼 애정 어린 서평 감사드립니다.” (이하 생략) 느린 걸음에서 박노해 시인의 책 ‘다른 길’에 대해서 서평을 올려놓은 것을 아마도 웹 서핑 중에 발견한 뒤, 남겨 놓은 교제의 글이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함께 저 또한 느린 걸음 관계자와 교제하게 되는 좋은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박노해’라는 이름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불온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작금에도 이 땅에서 그의 이름은 아마도 계속해서 그렇게 고정화되어 인식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하는 자들 역시 B급 좌파로 딱지가 붙어 이 땅의 시선들과 함께 나아가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시를 읽고 있는 저 또한 그런 레떼르가 붙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박노해 시인의 시를 노래할 때마다 묻어 있는 사람 냄새가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그를 B급 좌파 빨갱이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이 땅에 많이 있지만 나는 왠지 그의 사상적인 내용에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고 있는 사람다운 사람의 삶에 대한 결벽증적인 추구가 참 귀하게 보입니다. 그가 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서도 나는 그 냄새를 맡았습니다. 연대기적인 기록이 아니고 주변잡화식의 나열처럼 보이는 시 배열로 인해 조금은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역으로 나는 격식을 따지지 않는 시인의 자유로움에서 그가 그 동안 당해 왔던 삶의 굴곡들이 얼마나 처절했을까를 엿보게 되어 같은 편이 되어 주고 싶었습니다. 시인의 노래들을 짧은 지면에 함축하여 감흥들을 싣는다는 것은 도리어 시인의 내적인 내공들을 옅게 볼 수 있는 누를 끼칠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몇 가지 서평자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노래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슬픔의 힘’(P.487.) 울지 마 사랑한 만큼 슬픈 거라니까 울지 마 슬픔의 힘으로 가는 거니까 울지 마 네 슬픔이 터져 빛이 될거야 이 시를 읽다가 너무 행복했습니다. 시가 따뜻해서, 시가 엄마 같아서, 시가 은총으로 가득해서. 그래서 너무 좋았습니다. 삶으로 영글어진 고난과 고통의 승화를 경험한 자만이 노래할 수 있는 ‘슬픔의 힘’이 나에게도 충만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섬기는 교회의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시인의 노래 ‘양들의 사령관’(P.526)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얼굴 없는 숫자는 죄악이다 숫자가 압도한 삶은 죽음이다 숫자가 지배한 사회는 죽은 세상이다 순전히 양적인 소유의 집착은 정말로 중요한 삶의 질을 추락시킨다.
이 시가 가슴에 남은 이유가 있습니다. 시를 읽다가 갑자기 “작은 교회 목사들은 목회에 실패한 자들이다.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목회를 실패한 자들의 변명에 불과하다.”고 말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의 말이 겹쳐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숫자가 압도한 삶은 죽음이라’는 시구가 왠지 삶의 Bible처럼 들리는 것은 나만의 환청인가? 의 자문을 하다가 답에 대한 고민은 딱 1초만 하고 곧바로 그의 직설이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나 같은 목사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어 공명되었기에 또 한 번 시인에게 감사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시인은 책에서 서평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촌철살인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라(P.486.)”에서는 목사로 사는 나에게 오늘의 현재성에 대한 최선의 삶을 역설해 주었고, “4대강 살리기로 4대강이 살해될 때(P.477)” 에서는 목회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인 자연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 것인가의 도전을, “소녀야 책을 덮고 읽어라 허리 숙인 논밭의 농부들을 읽어라 저 들녘과 주름진 얼굴에서 100권의 고전을 읽어라(P.458)”에서는 삶의 땀 흘림 만큼 위대한 책과 공부가 없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삶을 살 줄을 모른 자는 죽을 줄도 모른다.(P.312)” 에서는 ‘지금 그리고 현재’의 삶의 정황을 얼마나 신중하게 성찰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누구나 옳은 말을 할 수 있을 때는 지금 삶이 말하게 할 때이다.(P.253)”에서는 목사로 살고 있는 나는 삶이 말할 수 있는 자인가? 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노래들이 격식을 갖추고 있지 않아 나 또한 적은 감동만을 열거해 보았습니다. 서평의 짧은 글보다 시인의 내공을 만나려면 말 할 것도 없이 직접의 그의 글을 만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끝으로 그냥 끝내기가 아까워 이 책에 담겨 있는 시인이 갈파한 산문시를 통해 받은 감동이 너무 커서 서평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주일 낮 예배 시간에 인용한 한 대목을 설교 원고 그대로 소개하면서 졸평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저는 이제 박노해 시인의 ‘삶과 나이(P.162)’라는 시를 읊어드리고 설교를 맺을까 합니다. 어느 가을 아침 아잔 소리 울릴 때 악세히르 마을로 들어가는 묘지 앞에 한 나그네가 서 있었다 묘비에는 3.5.8...숫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이 마을에 돌림병이나 큰 재난이 있어 어린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구나 싶어 나그네는 급히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때 마을 모스크에서 기도를 마친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묘비에 나이를 새기지 않는다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오 사는 동안 진정으로 의미 있고 사랑을 하고 오늘 내가 정말 살았구나 하는 잊지 못할 삶의 경험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집 문기둥에 금을 하나씩 긋는다오 그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문기둥의 금을 세어 이렇게 묘비에 새겨준다오 여기 묘비의 숫자가 참삶의 나이라오 나는 시를 읽다가 시인의 삶의 산문을 읽는 것 같은 느낌으로 가슴을 쳤습니다. 우리는 참되게 산 숫자의 나이를 묘비에 기록한 무슬림의 한 사람처럼 훗날 나의 묘비에 하나님의 방향성에 맞게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살았던 횟수를 기록하게 된다면 과연 얼마의 숫자를 기록할 수 있을까 깊이 성찰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목표를 잘 달려가고 있습니까? 성찰하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제, 시인의 또 다른 노래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느린 걸음)’를 10월 독서의 목록으로 정해 구입 신청을 했습니다. 기다려지는 것은 그를 통해 얻는 감동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다 같을 수는 없겠지만 색깔 논쟁이라는 유치찬란함에서 벗어나 그가 말하는 인간다운 삶의 질퍽함에 빠져 보기를 기대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