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다비드 드 브르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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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현대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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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04-02 10:4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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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의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렇게 그의 책 '산책'에서 말했다.
“온갖 세속적 얽힘에서 벗어나 산과 들과 산속의 숲속을 걷지 못한다면 나는 건강한 영혼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할 것 같다.”
이런 분명한 철학적인 세계에서 살아서 그랬는지 소로우는 하루에 4시간 이상을 걸었음을 회상한다. 4시간이라고 설정한 이유는 ‘내면적인 필요’ 때문이라고 밝힌다.(p.137) 이 정도의 정신이라면 걷기는 건강을 위한 수단이라는 차원을 뛰어 넘는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다비드 르 브르통은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아주 의미 있는 말을 남기며 글을 맺는다.
“지구는 둥글다. 그러므로 그 지구를 태연한 마음으로 한 바퀴 돌고나면 우리는 어느 날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p.261)"
저자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그가 도시를 걸을 때 느꼈던 소회의 한 자락일 것 같다. 그는 피에르 상소의 한 말을 인용한다.
“도시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한다.”(p.199)
이렇게 말한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도시는 우리를 땅에서, 산에서, 하늘에서, 산에서, 숲에서, 들에서 벗어나게 한다. 예를 들어 작은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해와 바람과 샘과 들어가고 나온 지형의 기복에 만족하는 가운데 주위환경과의 강한 감각적 관계 속에 얼마 안 되는 몇 채의 집들이 지어져 있음에도 감동을 받게 하지만 도시는 반대로 모든 것을 사람과 인공적인 물건으로 뒤 덮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의식은 도시보다는 도시이외의 지역에서의 걷기만이 철학적인 걷기의 유용함이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것을 전제하며 걷기 예찬으로 몰입해 보자. 제일 먼저, 저자가 말하는 걷기는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작업임을 선언한다. 발로, 다리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고 말한다. 이 말의 역전 의미는 걷기를 포기한 삶은 이런 행복한 감정의 상실을 각오하라는 협박이기도 할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철저히 고백하는 저자는 그래서 걷기는 별 것 아닌 작은 일들에 대한 기본적인 존재 철학의 발전에도 알맞은 것임을 역설한다. 계속해서 걷기의 유익을 저자가 말하는 대로 따라 가보자.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하는 것이다.”(p.21)
나는 저자의 이 말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저자의 걷기 예찬 중에 가장 압권이라고 생각했다. 이 보다는 더 위대한 찬사가 또 어디에 있으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어지는 저자의 걷기 예찬에 귀를 기울여 보라.
“이런 경험을 경험하는 자는 그 순간 그 경험의 주도권이 인간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목적이 없이 그냥 길을 걷는다. 지나가는 시간을 음미하고 존재를 에돌아가서 길의 종착점에 더 확실하게 이르기 위해 걷는다. 전에 알지 못하던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해 걷는다. 길이 거기에 있기에 걷는다. 걷기는 신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
그렇다. 저자는 걷기의 가장 중요한 유익을 걷기를 자아 존재에 대한 성찰의 시간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저자의 이런 관점은 이미 또 다른 걷기 예찬의 거인들과 입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pp.94-95)
장 자크 루소는 “보행에는 내 생각과 활력과 생기를 부여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설파했다. 그 이유는 한 자리를 머물러 앉아 있으면 거의 생각할 수가 없고 내 몸이 움직여야 그 속에 정신이 담기기 때문인데 걷기는 바로 나에게 이런 활력과 생기를 부여해 주는 요소임을 분명히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1874년에 제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걸으면서 나의 가장 풍요로운 생각을 얻게 되었다. 걸으면서 쫒아버릴 수 없을 만큼의 무거운 생각은 하나도 없다.”
니체는 ‘환희의 지혜’라는 한 아포리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저자는 인용한다.
“나는 손만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다. 내 발도 항상 한 몫을 하고 싶어 한다. 때로는 들판을 가로질러서 때로는 종이위에서 발은 자유롭고 견실한 그의 역할을 당당히 해낸다.”
어디 이 뿐인가? 그의 불후의 명저인 ‘차라투스트라’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심오한 영감의 상태, 모든 것이 오랫동안 걷는 길 위에서 떠올랐다. 극단의 육체적 탄력과 충만이”
더 보자. 그의 희열적인 걷기 찬사를.
"보행은 세계의 희열을 향한 자기개방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면적인 휴지와 평정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변 환경과 몸으로 만나는 일이므로 우리는 여러 장소의 감각적 조건에 끊임없이 혹은 거리낌이 없이 자신을 맡기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걷는 사람은 그렇게 바삐 서두르는 사람이 없다. (p.119)"
바쁘게 서두르며 길을 걷는 사람이 없기에 당연히 걷는 사람들의 길은 살아 있다. 이 대목은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들이 왜 걸어야 하는가? 서평자는 나름 단언한다. 길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길의 반대말을 정의한다. 독자들이여! 길의 반대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답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알고 나면 의미가 있게 그 답이 다가올 것이다. 걷기의 반대말은 집이다. 왜 그런지 아는가? 걷기는 어떤 거처를 향유하는 것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스위트 홈을 연상하지 말라. 집이라는 공간 자체를 저자가 걷기의 반대 개념으로 설정한 이유는 움직이지 않음에서이다. 집은 무이동성이다. 집은 이동하지 않는다. 안주함과 편리함과 안락함과 쉼의 상징이다. 그러나 걷기는 안주하지 않는다. 편리하지도 않다. 쉼도 없다. 그 예로 저자는 몇 예증을 책에서 건넨다. 먼저는 카베사 데 바카이다. 그는 1527년 스페인의 안달루시아를 출발하여 플로리다까지 먼 걷기를 감행한다. 마침내 1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갖은 고통과 시련과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여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기적을 일군다. 또 한 사람은 르네 카이예이다. 어린 시절 마을사람들이 사 준 신발 한 컬레만으로 세네갈의 항구 도시인 생루이를 출발하여 팀북투까지 걷기를 감행한다. 팀북투에서 다시 사하라 사막을 횡단해 탕헤르와 툴롱을 경유하여 프랑스에 도착하는 소위 말하는 죽음의 걷기 레이스를 펼친 끝에 바카이처럼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전설이 되었다. 마치 정신병자와 같은 짓(?)이라고 일반사람들이 치부할 수 있는 일들을 이들이 감행한 이유가 무엇일까? 집이라는 곳을 떠나 자기를 버리는 죽음의 걷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자아 성찰, 그리고 종교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다면 속죄의 행위까지 연결시키려는 행동의 기도가 바로 걷기라고 동의했기 때문이다. 브르통이 이들을 소개한 이유는 걷기를 종교적인 숭고한 신앙의 행위라고까지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이유로 그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걷기의 정신성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제일 먼저 저자는 걷기를 정신적 순회라고 보았다. 그래서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나 순례자는 항상 걸으면서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신의 현존 아래에서 걸었다고 정리했다.(p.229)
걷기는 금욕적인 행위요, 영적인 단련이었다. 그래서 순례자는 자기 집과 자기의 마을에 제공하는 안전과 안락을 포기하고 신이 깃들어 있는 장소를 찾아가는 순례의 길을 걷기로 떠난다. 이런 영적인 걷기는 기독교신앙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에서 공히 나타나는 공통적인 종교적인 행위였다. 결국 걷기는 홀로의 걷기가 아니라 신들과 한께 걷는 걷기로 승회된다. 이제 저자의 일설로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길을 걷다보면 세계가 거침없이 그 속살을 열어 보인다. 또한 황홀한 빛 속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들을 만나기도 한다. 길을 걷는 것은 때로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는 기회이고 하다.” (pp.252-255 중략)
저자는 이렇게 강하게 선포한다.
“걷기는 삶의 불안과 고뇌를 치료하는 약이다.”라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상한 생각을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사회학을 전공한 사회학자이다. 그런데 사회학을 전공한 학자가 말하고 있는 상당수의 지론들이 종교적이라는 이상한 생각 말이다. 사회학에 대하여 문외한인 목사이기에 일문일답하기도 부끄럽지만 한 가지 나름 생각을 정리한 것이 있다.
사유와 성찰이다.
저자도 말하지만 도시에서 길을 걷는다는 것은 지구상에 내가 서 있다는 것조차를 망각하게 하는 비극임을 명시했다. 콘크리트 숲에서 사유와 성찰이 되겠는가? 에 대한 에두름이다. 웬만한 지성을 가진 자라면 크게 이견을 보이지 않으리라 믿는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비극 중의 하나는 사유와 성찰이 사라졌다는 것과 그 사유와 성찰이 심지어 필요 없다고 까지 생각하는 참담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브르통 교수의 걷기 예찬은 단순히 건강을 위한 걷기를 말하는 형이하학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걷기를 통해 상실된 사유와 성찰의 회복을 가져오자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이리라.
서평의 머리말 즈음에 소개한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할 때 양가죽으로 만든 졸업장이기 때문에 수수료 1달러를 내기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라 사유와 성찰의 자존감이 있는 결과물이 아니겠는가?
책 읽기를 마치면서 걷기를 탁구와 더불어 병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탁구를 치면서 나도 모르게 승부욕에 빠져 역시 세속이 추구하는 경쟁의식에 함몰될 때가 혹 있는데 부족한 생각과 성찰과 사유함의 시간을 걷기 기도를 통해 내 것 화하는 지혜로운 시도가 절실함을 다시 한 번 각인하는 아름다운 시간이 되었다. 동시에 이 책은 글 읽기를 사랑하는 후배도 함께 공유하며 읽고 있는데 서평을 통해 내공을 쌓아가고 있는 후배에게 격려와 더불어 주 안에서 수고하는 그 수고에 감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