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6.01.31 셀 사역2024-04-22 16:08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설 명절 계획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예수가 함께 계시니 (찬송가 325장)
●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베드로전서 1:6-7
● 제목: 잠깐입니다.
1)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앞으로 임할 시련을 말했는데 이 시련은 대체적으로 어떤 시험이었습니까?
(설교 내용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면서 말해 보자.)
● 예) 어떤 신학자는 마카비 시대의 핍박, 어떤 신학자는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 담임목사의 설명은?  

2) 이 시련이 오면 어떤 유익이 있다고 베드로는 역설했습니까? (설교의 테마를 중심으로)



  

3) 시련은 잠깐이며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세인지기들은 개인적으로 당하는 시련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설교를 듣고 난 감흥으로 나누어보자.
● 셀 지체들에게 개인적으로 적용하는 시간을 빼놓지 말고 가집시다.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을 위해
  ② 새신자들의 정착을 위해
  ③ 셀 원들의 중보기도를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기도
4) 광고
5)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016년 1월 31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베드로전서 여섯 번째 강해)

본문: 베드로전서 1:6-7
제목: 잠깐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수를 믿으면서 기대하고 있는 것이 예수 믿으면 행복해진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의 고통을 더 민감하게 만지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나 시련에 대하여 함구하시거나 뒷짐 지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대전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당하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전제입니다.
내가 내 자유의지를 남용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음으로 인해 오는 고통이나 시련까지도 주님이 만지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소 아시아와 인근 지역에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향하여 시험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남깁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본문 6-7절). 이것으로 모두 근심하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나 이런 시험 당할 것을 전제한 이유는 그 시험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받게 될 것은 세속적인 차원의 것을 역설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드로가 선포한 시련의 전혀 다른 역설은 ① 기뻐하라는 것과 ② 시험이라는 불 때문에 금보다도 더 귀한 믿음을 얻게 될 것이며 ③ 주의 재림 시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해줄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이 시험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일부 신학자들이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번역한 ‘여러 가지’를 뜻하는 ‘포이킬로이스’라는 헬라어가 유대 독립 지도자였던 마카비가 로마와 맞서 싸울 때에 빈번하게 사용되던 단어 형용사였기에 로마가 무력으로 유대 독립 단체였던 열심당원들을 고문하던 때의 고난을 말한다고 주석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AD 70년 베스피아누스 황제의 아들이었던 디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는데 바로 그 때의 기막힌 참극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본서의 강해 서두에서 살펴 본 베드로의 이 책의 기록목적을 볼 때 AD 64년에 벌어졌던 네로의 로마시 화재 사건으로 인해 자신에게 불리해진 판세를 뒤집기 위해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 씌워 결국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인근 주변 지역에 있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까지 임했던 대 박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 배경 이해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시험’이라는 공통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당하는 시험은 영적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습니다. 시험 자체가 결론이 아니라 의미 부여이며 시험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도 과정을 아름답게 만들어 귀한 족적을 남기는데(예.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하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정이라는 도구가 소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시련의 과정을 중요시 여기는 자들인 동시에 그 시련의 과정을 중요시 여기다보면 반드시 그 시련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결론이 있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시련이라는 의미 있는 과정을 통과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1) 영혼에 느껴지는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본문 6절). 근심은 했지만 결론은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맥의 이해는 신앙의 틀을 떠나면 불가능 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린도후서 4:17절)”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는 시련, 환난, 고통 등은 잠시 받는 가벼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벼울 뿐만 아니라 이 경한 환란을 통과하면 주어지는 영광은 무거운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겁다는 말은 권위가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투병 중에 있었던 작가 최인호씨에게 마태복음 26:33절 말씀이 위로가 된 것은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도 하고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하시기도 하지만 그 전에 주님은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동일하게 당하고 계시기에 나의 아픔을 체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고통 가운데 계신 분이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고통 가운데에서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2) 정금보다 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본문 7절 전반절). 베드로는 금보다 귀한 믿음의 탄생을 힘입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 48:10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연단(鍊鍛)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鍊은 같은 동작을 10,000번 이상 하는 것을 말하는 무술용어이고, 鍛은 망치로 1,000번을 두드리는 것을 칭하는 단어로 결코 가볍지 않은 강한 시험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은으로 시험하지 않고 고난의 풀무 불 속에서 나를 택하였다고 이사야는 대언한 것입니다. 이런 강한 시련과 시험을 주시는 것은 정금보다 귀한 믿음을 주시기 위함임을 말해 줍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에 구금되어 있었을 때 술 관원장의 꿈을 하나님의 지혜로 해몽하여 준 후로 만 2년 동안 요셉은 잊혀진 사람으로 감옥 더 구금되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2년이라는 세월은 이전에 보디발의 집에서의 11년의 세월보다 더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2년 동안이나 더 연단하신 것은 그의 날개 짓이 더욱 힘차게 뻗어나가게 하심이었습니다(창 40:23-41:1절). 다시 말해 요셉으로 하여금 7년의 흉년과 7년의 풍년을 준비하는 지혜를 갖게 하신 시간이 2년이라는 시간이었습니다.
  제련할 때 뜨거운 용광로에 제련할 금맥을 넣으면 나중에 정금만 남습니다. 현실적으로 이런 믿음을 소유한다는 것이 쉽지 않으나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연단은 가볍지 않지만 그 연단의 끝은 반드시 정금 같은 믿음으로 재탄생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 1:2-4). 이 믿음을 가진 자만이 그래서 엘리바스의 세 번째 변론에 대하여 항변한 욥의 고백처럼 이렇게 노래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아오리이다.”(욥 23:10)

3.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본문 7절 하반절). 시련은 잠깐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그 날에 정금 같은 믿음을 갖고 시련이 와도 기뻐한 자들에게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확약한 분명한 한 가지는 잠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주어지는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절). 짐 엘리엇 선교사는 아우카 족에게 복음을 정하기 위해 아마존 정글에 들어갔다고 원주민에 의해서 순교를 당한 것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휘튼 대학 출신의 수재인 그가 에쿠아도루의 아마존에서 원주민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것을 보고 개죽음을 당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는 본문 7절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영원히 잃어버릴 수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영원히 간직할 수 없는 것들을 버리는 사람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들은 이미 자기중심적인 삶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자들이고 또 그렇게 살아온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잠깐이면 사라질 시련에 지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시련 속에서 정금 같은 믿음을 부여 받고 그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기뻐하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시면 주실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